우리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 한포재 이건명 선생 ‘졸기’와 ‘절명시‘에서
1. 한포재 이건명 선생 졸기(卒記)
경종 2년(1722)월19일 최석항(崔錫恒)이 입대(入對)하여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을 죽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의 자(字)는 중강(仲剛)으로,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아들이다. 숙종 12년에 급제하였고 43년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군간(群奸)들이 곁에서 엿보면서 유언비어를 마구 퍼뜨렸지만, 이건명이 김창집과 함께 국정(國政)을 다스리면서 불온한 마음을 꺾어버렸으므로, 우뚝이 강물 가운데 버티고 섰는 지주(砥柱)와도 같았다. 그때 마침 저사(儲嗣)를 세우는 데 대한 건의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건명에게 묻기를, ‘아들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건명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아드님이 아직도 있는데, 만일 이의(異議)가 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건명이 군료(群僚)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전중(殿中)에서 입대하게 되었는데, 범촉공(范蜀公)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극력 진달하기를, ‘어찌 말이 간신(諫臣)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망설일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영종(英宗)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우도록 정책(定策)하였다. 이건명이 이에 삼대신(三大臣)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에게 국정을 대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몰래 들어가 입대하여 저지하였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처음 김창집이 주청사(奏請使)가 되었을 적에 이건명이 말하기를, ‘원보(元輔)가 사명(使命)을 받드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이에 차자를 올려 대신 가게 해줄 것을 청하니, 경종(景宗)이 허락하였다. 3월에 이건명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적신(賊臣)이 이에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변서(變書)를 올리게 했고, 4월에는 이건명이 의주(義州)에서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로 안치(安置)되었다. 성산(城山)을 지날 적에 빈객(賓客)과 고구(故舊)들이 찾아와 보고 서로 눈물을 흘렸으나, 이건명은 언소(言笑)가 태연자약하였으며, 다만 종국(宗國)에 대한 걱정만 간절히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기꺼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세제(世弟)만 편안하다면 다시 무슨 한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소(遺疏)를 초(草)하기를,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대비(大妃)를 받들고 아래로 세제(世弟)를 보호하여 원대한 왕업(王業)을 공고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드디어 살해(殺害)당하니, 그때 나이 60세였다. 덕산현(德山縣) 나연(蘿淵) 위에다 장사지냈는데, 밤마다 흰 운기(雲氣)가 분묘에서 나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영종(英宗) 원년에 이건명의 관작(官爵)을 충민(忠愍)이라고 했으며, 강가에 묘우(廟宇)를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네 충신이 연차(聯箚)를 올려 대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에게 저지당하였고, 세 충신은 사사(賜死)되었는데, 유독 이건명만이 화(禍)를 당한 것이 제일 참혹했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처음 조정에서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을 적에 이건명이 말하기를, ‘왕제(王弟)를 세우지 않으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경종(景宗)이 왕세제(王世弟)를 세우기에 몰두하여 이건명을 파견하여 고명(誥命)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청나라 예부(禮部)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건명이 이에 청(淸)의 각신(閣臣) 마제(馬齊)에게 가서 매우 간절하게 봉하여 줄 것을 청하니, 마제가 내용을 갖추어 주문(奏聞)하였으므로 드디어 고명을 허락하게 되었다. 최석항이 이 때문에 크게 분노하여 마치 개인의 원수를 갚듯이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건명이 화를 당한 것이 가장 참혹했던 이유인 것이니,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출처:【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영인본】41책373면>
[註]범촉공(范蜀公)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범진(范鎭)을 이름. 인종(仁宗) 때 지간원(知諫院)이 되어 저사(儲嗣) 세울 것을 청하여 장소(章疏)를 19차례나 올린 일이 있었음. 뒤에 촉군공(蜀郡公)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임.
[註]원보(元輔) : 영의정(領議政).
2. 한포재 이건명 선생 절명시(絶命詩)
한포재 이건명 선생은 신임사화때 무고로 누명을 쓰고 참혹한 죽음을 맞으면서 남긴 아래의 절명시(絶命詩)에서 죽어 먼저 돌아가신 선왕인 숙종대왕을 만나 면목이 없을 일을 걱정하였다. 나라에 대한 충성에 모든 것을 걸으신 것이다.
허국단심재 (許國丹心在)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은 여전하니
사생임피창 (死生任彼蒼) 죽고 사는 것은 저 하늘에 맡기노라
고신금일통 (孤臣今日慟) 외로운 신하가 오늘도 애통하니
무면배선왕 (無面拜先王) 선왕을 뵈올 면목이 없네
<출처: 한포재집(寒圃齋集)>
3.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
성경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하였듯이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라질 안개같은 인생인데 우리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답은 간명하다. 우리는 허망한 죽음이 되지 않도록 이생을 넘어서 영생(永生)을 바라보고 하늘의 뜻(天命)과 이에 부합하는 인륜도의(人倫道義)를 지키며 살다가 가야할 것이다. 그래야 떠나가는 길에서도 마음이 떳떳하고 평안할 것이다. 세상 떠나면서 미소 지으며 떠날 수 있을 것이다.
2023, 3. 2.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