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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6일 목요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당신 변모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하늘 나라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고, 당신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도 알려 주셨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하자, 이른바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한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늘 나라를 미리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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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This is my beloved Son. Listen to him.”
말씀의 초대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를 통해 바라본 하느님의 모습이다. 그는 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주님께로 인도되는 것을 목격한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의 이 표현에 따라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셨다(제1독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스승님을 따라 산으로 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늘 나라의 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와 모세까지 만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체험을 선물하신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보더라도 실망하지 말라는 배려이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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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전’은 옷감을 희게 한다는 옛말입니다. 흔히 피륙을 바랜다고 하지요. 피륙은 무명베나 비단 같은 것을 말합니다. 삶거나 빨아 볕에 쬐어 ‘희게 하는 작업’이 마전입니다. ‘마전장이’는 이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지요.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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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뜻밖의 일을 당하면 정신이 혼란해집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보듯이 예수님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당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시자 베드로 사도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정신이 나갈지라도 살아생전에 주님의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언뜻언뜻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그 찬란한 모습을 닮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어떤 신부님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계시는 저의 후배 신부로 휴가차 한국에 잠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형, 우리 남아공 공동체 사람들이 형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보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내가 형을 잘 안다고 했지. 그런데 믿지를 않는 거야. 형처럼 유명한 신부를 내가 알 리 없다는 것이지. 따라서 새벽 묵상 글에 한번 내 이야기 좀 써 주라. 나와 형이 친하다는 걸 말야.” 이 자리를 빌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동체 형제자매님들께 말씀드립니다. 오상민 신부와 저는 무척 친합니다. 그래서 자주 전화 연락도 하고 만남도 갖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제가 오상민 신부와 친하다는 사실을 얼마나 주님께 감사해하는 지 모릅니다. 훌륭한 신부님, 재주도 많은 신부님과 함께 좋은 공동체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될 때에는 더욱 더 믿기 힘들지요.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부족한지요? 저는 자전거를 자주 탑니다. 그저께 그렇게 더운 날씨에도 저는 자전거를 끌고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신자들이 깜짝 놀라며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이렇게 더운 날에 자전거 타는데 괜찮겠어요?” 그러나 자전거 타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자전거의 속도 때문에 오히려 시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부족하다는 또 한 가지의 증거. 작년까지 저희 본당에는 보좌 신부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아이들 캠프에 전혀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당 미사를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올해부터 보좌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이들 캠프에도 함께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네요. 왜냐하면 아이들을 담당하는 보좌신부님이 캠프에 가야하고 저는 본당에 남아서 미사를 해야 하니까요. 우리의 생각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 생각이 꼭 맞다고 하면서 남에게 주장해서만은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모습을 본 제자들은 바로 이 자리에 눌러 살자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이러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자신의 생각이 물론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을 듣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을 듣는 우리들이 될 때,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항상 주님의 거룩함을 체험하면서 기쁨의 시간 행복의 시간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련이 없는 사랑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토마스 아 켐피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양승국신부-
<잘 본다는 것>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 가운데 ‘최측근’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되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변모’라기보다는 당신이 태초 때부터 지니셨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신 본래의 얼굴, 당신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갑자기 눈부시게 변모된 예수님 앞에서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던 베드로 사도가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구름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은 그의 충실한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던져주는 가르침에 순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은 늘 그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늘 그의 영광스럽게 변모된 얼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늘 그의 주변을 떠나지 말고 그와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관상(觀想)하라는 말씀입니다. 관상한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중요한 일상의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관상입니다. 매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매일 이웃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관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관상에 몰입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은총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하느님의 선하심,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사로잡혀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잊게 됩니다. 더 이상 나 자신 안에 갇히거나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이란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은총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관상에 충실한 사람은 이웃 안에 계신 하느님을 쉽게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신성까지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기에 부족한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결핍투성이의 이웃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잘 본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눈이 참 빛을 보는 그 순간 우리 영혼이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눈이 천국을 보는 순간, 우리 삶 역시 천국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눈이 하느님을 뵙게 되는 순간, 우리의 나날은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최영균 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 영광,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기를
예수님의 리더십 - 이동훈 신부-
예수님은 눈부신 거룩한 변모를 통해 제자들에게 당신의 미래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부활로 승리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다가올 십자가 사건에서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 주신 예수님의 배려다. 이는 예수님께서 스승으로서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한 예수님은 권위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셨다.(마르 1,?22 참조)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몸으로 실천하신 데서 온 것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13)라고 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그렇게 하셨다.
타볼 산에서, 문수봉에서 -김찬선신부-
제가 타볼 산을 처음 올라 간 것은 10여 년 전일 것입니다.
매력을 풍겨라 -전삼용신부-
유학하면서 몸이 썩지 않는 여러 성인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먼저 란치아노에 가면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1,200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있고, 로마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엔 요한 23세의 시신이 돌아가실 때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는 몸은 로마에 머리는 시에나에 있고,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워낙 설교를 잘 하셔서 몸이 다 썩었는데 혀와 성대만 썩지 않아 전시되어 있고, 베네치아에 가면 루치아 성녀가 유리관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몸이 썩지 않는 성인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죽어서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시는 분들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씨시 옆에 있는 몬떼팔코란 산동네에 모셔져있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입니다. 저의 친구 신부가 거기에 다녀오더니 저에게 “성녀 심장에서 십자가가 나왔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심장에서 뭔 십자가가 나오냐고 의아해 했지만 보고나서 그 친구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심장에서 다른 십자가가 나온 것이 아니라 심장 근육이 뭉쳐져서 십자가가 형성이 되었고 그 위에 예수님의 모습까지도 형성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수난하셨던 도구들 즉, 매 맞으실 때 묶이셨던 기둥, 가시관, 채찍, 해면, 못 등이 심장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심장 안에서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같은 모양과 무게의 세 개의 돌이 나왔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성인들은 수백 년 지나면 물이 빠져나가고 몸이 굳어 옷을 갈아입힐 때 아래에 천을 놓고 위에 덮어서 중간을 꿰매는 방법을 쓰는데, 이 성녀는 800년이 지난 지금도 산 사람이 몸과 팔을 굽혀가며 옷을 입는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몸이 잘 썩어야 후손이 잘된다는 말이 있는데, 왜 어떤 성인들은 저렇게 몸이 썩지 않는 것일까요? 몸이 썩게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 “너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땅도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졌다면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육신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 안으로 들어 올 때는 죄 없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정한 것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부모의 육체를 반반씩 물려받기 때문에 부모의 죄가 아이의 육체를 통하여 옮겨집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성모님이 원죄가 없으셔야 했던 이유, 또 동정이셔야 하는 이유는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육체를 아들에게 물려주어 흠 없는 희생제물이 되게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원죄가 없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육체는 죄 때문에 받을 썩어 없어질 운명을 지니지 않았고 그래서 두 분은 당신의 깨끗한 육체를 지니고 하늘나라에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분들이 승천하셨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면 서로 닮는 것처럼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썩지 않는 성인들이라도 그 육체를 지니고는 하늘나라에서 사실 수 없습니다. 그 몸 안에 원죄의 뿌리가 남아있고 그래서 아주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죄로 물든 영혼을 정화하니 육체까지도 정화 되어 썩는 것이 아주 더딘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당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말씀이시고 빛이십니다. 당신 빛을 인간의 육체 안에 감추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베드로가 두려워 이상한 말을 한 것처럼 어떤 인간도 그 분의 빛을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빛이 너무 강한 전구는 불투명한 유리나 종이 등으로 가려 사람의 눈을 보호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언 듯 불투명한 유리나 종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더 밝은 빛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옷이 어떤 마전장이도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났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만든 옷이 빛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내면이 빛나니 밖에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까지 빛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옷은 인간의 영혼을 가리고 있는 육체를 상징합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화장을 하고 잘 꾸미고 다닐 때보다도 수녀님이 되어 수도복을 입고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더 예뻐 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빛을 더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그냥 있어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보이게 됩니다. 저는 수도자라고 하여 극기의 삶을 살고 속세를 떠났다는 의미로 일부러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누가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우리 안에 빛을 더욱 강하게 받아들여 육체가 빛나게 하고 썩지 않을 정도로 천사와 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하느님을 모신 사람은 그 겉모습까지도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 종교는 우리 육체를 손상하며 영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드높여 육체까지도 매력을 풍기는 종교이어야 합니다.
함구령의 진정한 의미? -박상대신부-
▣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께서 곧 다가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선별된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받게 될 영광의 모습을 선취(先取)한 자기계시적 사건으로서 공관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가 9,28-36) 오늘 축일의 기원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6세기경부터 동방교회에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1457년 교황 갈리스토 3세(1455-1458) 때에 보편 교회의 축일로 제정되었다. 이는 1456년 터키 이슬람교도와의 벨그라드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대한 감사로 제정된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관복음은 마태오복음, 마르코복음, 그리고 루가복음으로서 대체로 마르코복음의 내용과 구조를 따르면서 예수어록과 각자의 특수사료를 바탕으로 편집한 복음을 말한다. 공관복음사가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예수님의 역사적 행적과 가르침을 놓고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복음서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복음에 있어서도 세 복음서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이 사건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다. 그것은 보통 원전(原典)을 놓고 수정, 변질, 첨가, 삭제 등의 방식으로 가능했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간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관복음서가 다른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같은 행적과 가르침을 근거로 저자의 독창적 구상을 따라 전개되고 있지만, 오늘 복음의 도입부는 거의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예수 추종의 길> -> <종말의 시기에 관한 토막어> ->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의 순서이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가 9,18-9,36) 이렇게 전개하는 순서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오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복음도 그렇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9,2-10)을 베끼면서 베드로와 제자들의 위상(位相)에 흠집이 날만한 구절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6절)와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물어 보았다"(10절)는 부분을 삭제해 버렸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변한 모습(얼굴과 옷)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루가는 이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모습이 변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저자 특유의 의도를 살리고 있다.
예수의 일행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가 필립보의 가리사리아에 도착한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세운 도시로서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다. 이 고백부터 이어지는 대목이 오늘 복음과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이 겉으로는 정확하고 장황하나 그 실속은 형편없다.(마르 8,32-33)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통하여 자기들이 고백한 메시아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 것임을 알아야 했고, 그 길이 곧 자신들 또한 가야할 길임을 알아야 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받고 죽어야 하며, 그러나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지존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으로 우뚝 서게 되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순서대로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신다. 이 산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도시가 헤르몬 산맥 아래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헤르몬 산이나 그 산맥에 속하는 산일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보여 주신다. 이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은 특별히 뽑힌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허락되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말씀으로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내용을 실제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이론적 가르침을 뒤받침 할만한 일종의 산 체험이나 견학 내지는 실습을 준비하신 것이다. 세 명의 제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거룩하게 변한 예수님의 얼굴과 옷), 자신의 귀로 들으면서("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예수에게 감추어진 신적 품위를 얼마동안 향유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나타난 모세(출애 33,18-23)와 엘리야(1열왕 19,9-13)도 거룩한 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믿음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름이 일자 그들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게 된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며,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의 성취자로 계시되며,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 홀로 제자들이 들어야 하는 주님으로 계시된 셈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까지는 철저하게 함구(緘口)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말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참다운 제자 됨의 추종으로 살아야 하고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을 열며
요즘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낮에는 도저히 밖에 있지를 못할 정도로 뜨거운 날씨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보니 별의별 상상을 다 하게 되네요. 만약 어떤 노래 가사처럼 흰 눈이 펑펑 내린다면 어떨까요? 또한 30도를 훨씬 넘는 요즘의 날씨가 아니라, 갑자기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가 된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손길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9,2). -김정훈 신부-
또 다른 변화를 꿈꾸며
'부스럼', '마른버짐', 이런 말들 들어보셨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아무것도 없던 시절, 영양 상태를 점검할 겨를이 없던 시절, 그저 배만 채워도 감지덕지이던 시절, 환경적 요인으로 저희 또래 중 많은 아이들이 이런 병을 끼고 살았습니다.
변하지 않아도… 올해는 예년과 달리 장마가 길어 피해도 많았지만 더위가 늦추어져서 한결 지내기가 수월했었는데 이제 그 더위가 만회하려는 듯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참을 수 있도록 선조들은 삼복더위 속에 ‘입추’라는 희망을 넣어둔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이번 여름의 더위도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이 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자면 이러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는 핵심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계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하여, 혹은 부모님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 같은 심리는 특별한 관계라서가 아니라 대소변을 가리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집을 부린 서너살 무렵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대소변 때문에 실수를 하고 핀잔을 받은 후 그 수치심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뒤로 넘어진 행동은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더 잘 해야 하고, 더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한다는 심리가 깊숙하게 자리 잡아 오랜 세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닦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우리 자신을 변하도록 닦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이기에 오히려 당신이 변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평화의 마을 가족들은 변하려고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지 쪼대로’(?) 행복하게 삽니다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믿고!
-서 공석 신부 -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어떤 비범함을 보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 말미에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제자들이 비로소 그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는,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구약성서가 사용한 표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높은 산,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모습이 변하는 것, 옷이 희고 빛나는 것 등이 모두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말하기 구약성서가 사용한 것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은 그분의 삶을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모세와 엘리야가 믿었던 하느님의 일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에 입각하여 이스라엘이 현실을 타개하도록 가르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것은 40년의 광야 생활과 같이 힘든 일이었지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구원을 갖다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 자유를 찾아 노력할 때 함께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에 억눌려, 노예와 같이 사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스스로 실천하는 자유를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런 예수님 안에 모세가 가르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전설적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정(王政)을 시작할 때, 왕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통치하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왕의 대관식에서는 왕의 체구보다 훨씬 더 큰 곤룡포를 입혔습니다. 그것은 왕이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보잘것없는 왕을 통하여 위대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사실도 선포하는 대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이 된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잊어버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권한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기에 반기를 들고 왕들을 비판한 인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적 자세 안에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왕을 잃었고, 그 권력의 공백을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가 메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그 사회의 실세는 유대교의 율사와 제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과 제도에 얽매여 자유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의 그런 현실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제도는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0.14).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도 예수님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의 경직된 율법 해석과 성전의 의례들은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비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제물봉헌에 게을러도, 하느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 구름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부터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가까이 계심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다니엘서(7,13)에는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옵니다. 신약성서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오늘 복음이 구름을 언급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을 세우고 비로소, 그분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 위에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율법과 제도에 순종하며,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켜서 자기를 위한 혜택을 얻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읽어내고, 그것을 실천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셨고, 유대교가 버린 이들에 대해 특별히 배려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합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의 모습을 띄워놓고, 그분의 자유를 보고 배워 실천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신앙인은 죽는 그날까지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배우는 일이라, 배우고 실천하고 또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홍승모 신부-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빵의 기적을 통해 성체성사와 신앙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적인 배고픔뿐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까지도 채워 주십니다. 성체성사는 이런 사랑의 주님과의 일치를 표현합니다. 이 일치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신앙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성장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우리 일상생활의 점진적인 변화로 서서히 완성되어 갑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영적인 측면과 육신적인 측면이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질문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실 기적과 같은 일을 필립보가 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가 아니라, ‘네가’라는 용어를 쓰셨을 것입니다. ‘우리가’라는 의미는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도록 요청하신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을 마련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8). 다만 제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믿음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아니 인간적인 우리의 눈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의 고픈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뻔히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나머지를 예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은총은 부족하기는커녕, 차고 흘러넘칩니다. 엘리사 예언자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도다”(시편 145,18).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육신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굶주림을 모자람 없이 채워 주시지만, 우리의 신앙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칠 때가 많습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처럼, 또 다른 기적의 표징만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이 권고는 우리가 각자의 처지에서 해야 할 최선의 것 중에 하나입니다.
“신비에로의 초대” -서현승신부- 어떤 사람이 빈 모자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냈습니다.
거룩한 변모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느 뜨거운 여름날 제자들 중 몇몇에게 오랫만에 산에 가자고 초대하였다. 초대받은 제자들은 신이나서 흔쾌히 그 초대에 응하였다. 그러나 그 산은 높고 힘들었다. 신바람은 어디가고 녹초가 되어 퍼져버렸다. 어느샌가 예수님은 엄청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기가막힌 멋진 광경을 목격하고 제자들은 놀라 경탄해마지 않는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산을 올랐는데 왜 예수님은 거룩하게 변모할 수 있었고 제자들은 그렇지 못하였을까?
아마도 지향이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 즉,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오르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놀러> 산에 갔다. 이러한 지향의 차이는 하느님을 만나고 못만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늘 용산에 있는 베틀레헴의 집(빈민식당)에 미사를 나갔다. 봉사하러 오신 분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제자들 중 일부를 뽑아서 하느님을 만나러 가자고 초대하신다. 그곳이 산 일수도 있고 그곳이 빈민식당 일수도 있고 그곳이 어디이든 상관이 없다. 그 초대에 우리는 기꺼이 예 하고 응답한다. 베틀레헴의 집에 봉사하러 오신 분들도 바로 휴가를 대신하여 하느님을 만나러 가자고 초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온 것이다.
자, 이제는 지향이 문제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러 베틀레헴의 집에 가자고 하였는데 나는 하느님을 만나기 보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마음으로 온 것이라면 마치고 나서 <어휴, 힘들었다> <그 수사님, 마음에 들었다, 안들었다> <그 봉사자 때문에 더 힘들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힘들고 지쳐쓰러지면서 타볼산의 제자들처럼 허느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변모는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의 장을 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밝게 빛나면서> 변화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여기저기에 초대해 주신다.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하자.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자.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실 지 모르지만 그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도 타볼산의 주님처럼 밝게 빛날 수가 있다. 거룩한 변모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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