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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4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요한 17,11ㄷ-19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하나 됨
교부 크리소스토모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로마 황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엄명을 받았으나, 그는 죽어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며 맞섰습니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로마황제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고독한 개인감방에 집어넣어라.”
그러자 그 신하가 울상을 하며 대답하기를,
“황제님,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황제가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별 놈이냐? 빨리 집어넣어라!”
“황제님은 모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거기다 가두어 넣더라도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중얼 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한답니다.
그러니까 혼자 두게 하면 그에게 좋은 일만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황제가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가 고개를 흔들어 대면서, “황제님, 그건 더욱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전도할 기회가 생겼다고 매우 좋아할 것이며,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의 사람들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극악무도한 악질죄인도 변화시켜 오히려 상급을 받게 해주는 일입니다.”
황제가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당장!”
신하가 사색이 되어서 다시 말하기를, “아이구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처형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한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제일 좋은 것을 안겨주는 셈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아이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면서도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 지방을 지나는 중에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한 인부에게 갈매기들이 왜 죽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인부가 대답하여 주었습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보고 먹이를 던져 주게 됩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여러 가지를 맛있게 받아먹게 되지요.
실은 이런 음식은 갈매기들에게 해로운 음식들이며 좋은 자연음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갈매기들이 그렇게 과자나 캔디나 받아먹다 보면, 좋은 자연 음식에 대한 식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자연 음식 먹이가 바다 속에 그렇게 많지만 결국 갈매기들은 이처럼 굶어서 죽는 답니다.”
갈매기는 본래 자연의 음식을 먹어야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너무 익숙해지다보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완전히 속해버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치는 그 안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생활하다가 알렉산드리아 도시로 설교하러 다니셨는데 오래 버티시지 못하고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물고기로만 살려면 사막에서만 살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토니오 성인은 도시로 자주 나가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은 삶인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그 속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며, 맛을 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기도만 하는 자매에게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일을 시켰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흡수되어 버리면 세상에 필요한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또한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도 그 세상 구원을 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절대 서로 흡수되어 혼돈상태가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될수록 그 분별은 더 커집니다.
아기들은 남녀 함께 벌거벗겨 놓아도 서로 창피함을 모르지만 다 큰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다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이 나를 여자로 만들어 주었어요”라고 한다면 어떤 남자가 사랑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구별이 더 명확해 지는 것입니다.
요즘 명상센터나 여러 종교의 가르침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서로 분별이 없어지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즉 알고 보면 다 내 안의 신성이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합니다.
성당 다니시는 분도 제가 고맙다고 하면 “다 하느님이 하신 거지 제가 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또는 내 안의 영과 성령을 혼동합니다.
내 안의 영이 성령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과 하느님의 영을 엄연히 구분합니다.
다만 하느님의 영의 도움 없는 인간의 영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될 수는 있지만, 나와 하느님의 구별은 그만큼 더 명확해 져야하는 것입니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그 정확한 분별 안에서의 결합입니다.
즉 속해 있지만 속해있지 않은 결합인 것입니다.
다 하느님이 하신 것이라면 내가 해서 칭찬 받거나 벌 받아야 할 책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며 이 세상 사람에 속하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옷도 빛나고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곳에 머물려는 제자들을 데리고 이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바로 마귀를 쫓아내 주십니다. 당신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거룩함도 줄 수 없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들 안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드님이 아버지께로 가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지만 둘이 아닌 상태, 즉 속하지만 동시에 속하지 않는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세상에 대해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4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요한 17,11ㄷ-19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인생 여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합니다.
반전에 반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생애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위대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신앙이 한 단계에 머물러있지 않고 거듭 일취월장했다는 것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한 산골 소녀 마리아는 용기 있는 응답을 통해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도우미요 협조자로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십자가상 예수님의 안내로 사도들의 어머니로 임명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랜 세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일을 사도들에게 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은 대체 어떻게 생활하셨을까요?
마치 대왕대비 마마처럼?
아니면 영부인처럼?
절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할머니 한 분은 평생 자녀들을 위해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자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건강도 좋지 않고, 허리도 굽고, 무릎 상태도 좋지 않으니, 제발 편히 쉬시라고 목청을 높여도, 할머님은 막무가내입니다.
매일 새벽이면 밭으로 나가십니다.
평생 해오던 그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평생 해오셨던 바로 그일,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 자질구레한 일을 이제는 사도들을 위해 계속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묵묵히 사도들의 어머니로 충실하게 살아가시던 성모님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하늘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발령내셨습니다.
천상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천상에서도 그 역할은 똑같습니다.
아들 예수님, 사도들에게 하셨던 그 일, 우리의 도우미요 협조자, 후원자요 안내자로 살아가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으셔서,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해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저희 살레시안들은 이런 어머니,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오늘 많이 힘드십니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십니까?
다른 그 누구에 앞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마치 어린 자녀가 어머니에게 청하듯이.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
(2023. 5. 24. 수)(요한 17,11ㄷ-19)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4-19).”
여기서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면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구원 사업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박해자들’도 ‘모든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잃은 양’인 줄 모르는 ‘잃은 양들’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에는 끝까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 의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고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너무 늦기 전에 믿고 회개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이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아버지의 말씀을(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그들의 삶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의 삶이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면 미움과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라는 말씀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미워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더 큰 미움을 받을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이리 떼 같은 그들이 양들로 변화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이리로 변해버리면, 또는 이리 떼 편으로 넘어가버리면 육신의 목숨은 구하겠지만 영혼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이리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 변화는 양이 더욱더 양답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즉 신앙인이 더욱더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안 믿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이라는 말은, 양이 양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고,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라는 말은 ‘봉헌하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거룩해지다.” 라는 말은, “진리를(복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봉헌하다.”, 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헌신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이고, 악에서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1.13).”
여기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고 (요한 17,6), 그 이름은 ‘사랑’입니다(1요한 4,8).
‘우리처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처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신앙인들이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하느님 밖에서, 또는 하느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고,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이들이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저와 함께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