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
정한모
새벽은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 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鍾)소리
시동(始動)하는 악셀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박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 위에 실려
일러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稜線)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펴저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殘骸)들을 쓸어내며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마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 나기 이전(以前)의 생명(生命)이 되어
혼돈(混沌)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暗黑)의 벽(壁)에
섬광(閃光)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시집 『새벽』, 1975)
[어휘풀이]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작품해설]
정한모는 시집 『아가의 방』을 통해, 현실의 폭압적인 세계 속에서 ‘아가’의 순수한 생명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튼튼하고 안전한 보로막인 ‘아가의 방’ 설치해 놓은 바 있다. 이 시는 그러한 시인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밝음의 세계를 ‘새벽’까지 확산시킴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펼쳐 보인 작품이다.
전 6연 36행의 이 시는 시상 전개에 따라 새벽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변주된다. 즉 1·2연은 ‘하루의 시작으로서의 새벽’을 청각적인 이미지로, 3·4연은 ‘세상을 밝히는 표상으로서의 새벽’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는 데 비해, 5·6연은 ‘새롭고 정의로운 밝은 시대를 함축하는 새벽’을 상징적 이미지로 보여 준다.
이 시의 의의는 암흑의 현실 상황 속에서 어둠을 노래하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속에서 새로운 빛과 생명을 예감하는 미래 지향의 시 의식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새벽은 /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 빛이 된다’ 는 시인의 신념은 바로 험난한 과거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밝고 힘찬 미래를 내다보는 정신의 힘, 곧 역사의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새벽을 예감하는 눈’,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내고 스스로 빛이 되어 어둠을 몰아내는 그 눈이야말로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미래의 희망으로 끌고 나아가야 하는 시인의 시대적인 사명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새벽’은 교시적(敎示的) 기능을 작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소리, 즉 ‘첫닭의 울음소리’ · ‘외양간의 쇠 방울 소리’ · ‘참새 소리’ · ‘교회당의 종소리’ · ‘악셀레이터 소리’ ·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등 다양하게 변주되며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은 자연음의 하강과 인위적 음향의 상승을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써 그 표현 가치를 배기시키는 한편, 새벽빛의 동적 이미지를 ‘바다’에서 ‘뭍’으로, ‘능선을 따라 골짜기’로,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 ‘누워 뒹구는’ 곳으로 공간을 옮겨가며 묘사함으로써 태양의 상승과 햇빛의 확산을 또렷하게 나타낸다. 이렇게 ‘새벽’은 빛의 연장선 위에 있을 뿐 아니라, 빛이 함축하는 그 밝고 건강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의욕과 갈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새벽은 / 새벽을 예감하는 눈’ 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새벽을 예감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자만이 빛의 산실로서의 새벽의 참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둠의 고통을 아는 자만이 새벽의 기쁨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라하겠다. 결국 밤이 다하면 아침이 저절로 오는 것을 소극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 어둠을 허물을 아침을 앞당기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을 뒤집어 본다면, 시인의 눈에 비친 당대 현실은 여전히 어둠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역사의식은 ‘암흑(暗黑)의 공포(恐怖) / 그 두꺼운 벽(壁)을 향해 / 건곤일척(乾坤一擲) / 일격(一擊)을 가(加)하는 / 철권(鐵拳) 같은 / 울음소리’(『새벽』7)와도 같이 온갖 암흑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대결 정신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자신의 음성이 작고 약한 ‘참새 소리’와 같은 것이라하더라도,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그것이 나중에는 ‘어둠의 켜가 잘라지’게 하거나 ‘두꺼운 어둠에 균열(龜裂)이 가’게 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과 대결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신념과 희망을 표출한다.
그리고 생성의 원칙적 에너지인 빛으로 표상되는 그의 신념은 여기서도 ‘빛’과 ‘어둠’의 이원적 대립 구조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인식하는 현실은 항상 어둠으로 존재하지만, 빛은 반드시 어둠 속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빛난다는 이치와도 같이 그를 둘러싼 현신 상황이 고통과 절망의 어둠이기 때문에 그는 역설적으로 꿈과 희망의 빛을 노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카오스의 본체인 어둠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질서, 즉 조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 정신이 찾아낸 것이 바로 이 ‘빛’과 ‘새벽’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어둡고 황량한 현실 속에서 인간을 지켜 주고 밝은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스스로 빛을 내뿜어 / 어둠을 몰아내는 / 광원이 되’는 새벽을 노래한다.
이와 같이 시인이 현실의 어둠을 긍정하면서 빛에 의한 새로운 부정을 지향하는 것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그의 신념적 표현이며, 인간애의 간접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이 휴머니즘 정신은 세상이 비인간화되고 물질화되면 될수록 그 본래적 가치를 더욱 빛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작가소개]
정한모(鄭漢摸)
일모(一茅)
1923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45년 『백맥』에 시 「귀향시편」 발표하여 등단
1972년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73년 『현대시론』 발간
1983년 시선집 『나비의 여행』 발간
1975년 서울대학교 교수
197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84년 한국문화예술원장
1988년 문화공보부장관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1년 사망
시집 : 『카오스의 사족(蛇足)』(1958), 『여백을 위한 서정(抒情)』(1959), 『아가의 방』(1970), 『새벽』(1975), 『사랑시편』(1983), 『아가의 방 별사(別詞)』(1983), 『원점에 서서』(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