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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조금 황당무계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여자들
도 간간이 등장하기는 한다. 남자이야기에는 필히 여자가 등장해야 이야기
에 완성도를 더한다. 여자이야기에 남자가 등장하는 비중보다는 훨씬 적지
만 여자가 없는 남자 이야기는 공허하다. 개인적인 식성으로 말하자면 케첩
을 뿌리지 않은 돈까스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내 이런 내 식성을 매우 촌스
럽기 그지없다고 말한다. 요즘 누가 돈까스에 케첩 뿌려 먹니? 쏘오스 뿌려
먹지. 우아하게...그러나 비프스테이크도 아닌 바에야 우아해 봤자 돈까스
아닌가. 더군다나 음식을 먹는 신성한 행위인 식성에 촌스럽다거나 우아하
다거나 하는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건 가당치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
차피 인간의 몸을 통과해 한줌의 변으로 화할 것을...
어쨌거나 내가 돈까스를 먹을 때 케첩을 뿌려 먹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
다.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케첩의 양이다. 고기보다 케첩이 많으
면 그 맛을 버리는 법. 케첩은 가끔 가다가 고기 위에 일점 오 밀리미터 두께
로 뿌려 주거나 두꺼운 고기를 포크로 찍고 감질나게 찍어 먹으면 그 상승효
과를 다 한다. 고로 돈까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고기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이
다.
부연하자면 나는 젊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
에너지에 대한 숭배로 가득한 젊은 남자들. 그들이 육체를 통해 스스로의 존
재를 성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 무슨 사변적인 척하는 개 풀
뜯는 소리냐며 나를 힐난할 테고.. 그렇다고 팔팔한 몸 하나에 인생을 건 무
대포 인생들이라고 한다면 쥐뿔도 모르는 게 책 팔아먹으려고 구라치고 있
네라며 쇠몽둥이 같은 정강이로 나의 불두덩이를 걷어찰지도 모를 일이니...
어쩌면 나는 그들의 부실 시공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
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그들의 인생을 돈까스나 질겅거리며 구경할 뿐이다. 조금 수
다스런 구경꾼, 혹은 참견꾼이라고 해도 나는 만족하겠다.
그들의 인생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로 코메디다. 원래 한 발 물러서 구경
하는 사람은 모든 게 다 코메디로 보이겠지만 그들 자신도 그들의 인생을 코
메디로 생각한다는 것쯤은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
다.
그들은 때때로 스스로의 한계까지 다다르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괴로
워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데뷔한지 10년이 넘어도 뜨지 못하는 다급한, 혹
은 뜨기를 포기한 코미디언의 슬랩스틱을 보는 것처럼 스스로를 비하시키
거나 조롱하며 그들 자신을 희화화시킨다. 오히려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더
욱 악화 내지는 강화시켜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이고는 거기에서 허둥대
는 서로를 놀려대거나 골탕먹이면서 즐기는 듯도 하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이런 그들의
독특한 자기극복에 대한 매력 때문이다. 혹자들의 주장 데로 어쩌면 자기학
대로도 보일 수 있는 이 자기극복의 과정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존재감
을 확인하며 세상과 자신에 대해 알아 가며 그렇게 조금씩 강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육체로 향하는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이야기
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들 육체가 이루어 내는 야성의 절정으로 성큼 걸어갈 것
이다. 언어와 이론이 거세된, 본능과 육체만 존재하는, 즉 말하자면 난장판
의 싸움터로 같이 구경을 가 보자는 것이다.
1. 왕거식의 데뷔전.
만만할 리가 없었다. 외팔이는 한국랭킹 2위였다. 한쪽 팔로, 한국랭킹 2위
까지 올라왔다면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그의 의지와 끈기는 일단 거식보다
는 몇 수 위라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18전 11승 2무 5패. 5패이긴 하지만 외팔이는 케이오패가 없다. 맷집이 그
리 세다고 평가되지도 않는다. 보통선수들에 비해 오히려 턱은 약한 편이다.
턱은 단련되지 않는다. 맞으면 맞을수록 약해지는 게 턱이다. 하지만 외팔이
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케이오패가 없다. 맞아도 맞아도 오직 악으로, 깡으
로 버티고 일어서는 것이다. 쓰리넉다운(한 라운드에 세 번다운되면 자동
케이오패)이 적용되는 룰에서는 두 번 이상 다운 되면 외팔이의 자세가 달
라진다. 방어도, 공격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성한 팔, 짧은 팔, 심지어 목을
길게 늘어뜨려서라도 상대방의 목을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심하게 껴
안아 버리고 남은 시간을 보낸다. 세 번째 다운이란 그의 사전에 없다. 상대
방이 아무리 밀어제껴도, 주심이 아무리 브레이크를 선언하고 둘을 떼어 내
려 해도 외팔이는 상대방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떼어내다 체력이 소진한 심판이 실격패를 선언 한 것이 두 번. 그 때
붙여진 외팔이의 닉네임은 오공뽄드 되겠다. 그럼 외팔이는 뭐냐고? 그것도
닉네임이다. 하지만 외팔이라는 닉네임은 외팔이에겐 거의 본명이 되었다.
확인하는 차원에서 링아나운서의 에코 맥시멈 멘트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
겠다.
"한 팔로 싸워왔다! 한 팔로도 충분하다. 한 팔도 남는다.! 홍코우너.....케이
케이비(코리아킥복싱 약자 되겠다. 뭐 너무 창의력 없이 스탠다드한 이니셜
이 아니냐고 나무라도 어쩔 수 없겠다.) 슈퍼미들급 랭킹 2위....181에 85키
로그람. 팀 킬뎀올(kill them all. )소속...외우..파알...이이!..."
오대오 황금분할. 정갈한 가르마의 링아나운서의 멘트는 약 일곱 번의 메아
리로 진저리치며 관중들의 달팽이관을 자극하는 것이다.
어쨌든 외팔이는 왼팔 하나밖에 없다. 오른팔은 팔꿈치까지. 거기서 그의
뼈와 살은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오른팔에도 글러브는 끼고 있다.
잘린 팔꿈치에 글러브를 끼고 끈을 어깨로 돌려 단단히 묶어 놓았다. 장식용
이 아니다. 글러브는 분명히 그 효용을 다한다. 외팔이는 짧은 오른 팔로도
접근전시 상대방의 안면을 공격한다.
외팔이가 짧은 오른팔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매우 감동
적인 장면이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그로테스크하게도 보이는데, 선진사회
로 진입하는 문턱의 대한민국상황에서 뒤쳐지지 않는 일등시민의 범주에
편입되려면 될 수 있는 한 이 장면을 감동적인 장면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강
박이 나를 옥죄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는 않겠다.
이 시합은 팔꿈치 공격이 허용되지 않는 킥복싱 룰이다. 하지만 글러브를
끼었다면 그것은 팔꿈치 공격일까 정권공격일까. 외팔이의 그 동안의 대전
에서 그것은 정권공격으로 인정되었다. 주최측의 진보적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시합은 제한이 많은 입식타격룰이 적용된다. 팔꿈치 공격 및
목을 껴안고 두 번이상 무릎올려치기를 가하는 행위, 후두부(뒤통수) 공격.
등이 제한된다 )
외팔이는 17살 때 교통사고로 오른 쪽 팔꿈치까지를 절단해야만 했다는 공
식적인 기록이 있긴 하지만 사실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어린 나이에 머리
를 굴리다가 오른 쪽 두 번째 손가락 두마디를 절단하면 면제된다는 동네 양
아치들의 말을 이 홉들이 소주 여섯 병을 분음한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청취
하게 되어 술이 깨기 전 여명이 밝아 오는 도살장 창고에서 주로 돼지 뒷다
리를 분리하는 도끼칼로 오른 팔 두 번째 뼈마디를 신음 한 번 없이 절단해
버렸다는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괴한 소문이 호사가들의 유비통신으
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 전언의 진상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그런 소문이 돌만
큼 외팔이는 과격했고 끈질겼으며 무모해 보이는 듯 했지만 용의주도한 선
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세컨이 빠지고 1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강력한 오른 발 로우킥(허리 아랫
부분을 가격하는 킥)이 거식의 왼쪽 허벅지에 가해졌다. '처얼썩!' 마치 물을
먹인 오동나무 절구로 떡반죽을 내려치는 듯한 강력한 소리가 경쾌하게 울
렸고 관중들의 낮은 탄성이 잠깐 장내에 퍼졌다. 가라데와 무에타이를 수련
한 외팔이는 온몸이 회초리와 같았다. 외팔이는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살과 살이 엉켜 붙는 느낌, 뼈와 뼈가 충돌하는 느낌을 즐길 줄 알았기 때문
에 외팔이는 이 링에서 버텨 온 것이다.
거식은 미처 다리를 들어 방어할 새도 없이 로우킥을 허용하고 말았는데 그
충격이 대퇴부를 거쳐 옆구리를 훑고 왼쪽 골에 '웅'하고 느껴질 지경이었
다. 외팔이는 로우킥을 적중시키고는 만족스럽게 피식 웃고는 더 이상 공격
하지 않고 가볍게 빽스텝을 밟으며 왼쪽으로 돌았다. 아마 로우킥 위주의 치
고 빠지는 전술로 나올 듯 했다.
태만은 그 동안의 외팔이의 경기를 비디오로 분석해 보았었다. 역시 지금과
같이 외곽에서 거리를 유지하며 로우킥 공격으로 기회를 만들었었다.
"거식아 붙어라! 접근해서 코너 쪽으로 몰아서 붙여!"
태만이 세컨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 작전은 외팔이와의 대전이 잡히던 보름
전부터 거식에게 주입한 것이었다. 태만은 공이 울리자마자 러쉬해서 외팔
이가 로우킥을 사용할 거리를 두지 말 것을 거식에게 신신당부했었다.로우
킥은 근접전에서는 잘 먹히지 않는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붙히면 로우킥의
강도는 현저히 약해지기 마련이다.
"접근전이면 유리하다. 외팔이가 왜 외팔인 줄 아나? 팔이 하나라 외팔이다.
접근해서 펀치공격으로 풀어 가면 절대 불리하지 않다. 니는 팔이 두 개다.
맞재? 한 방 맞고 두방 치면 된다. 이론적으로 공박할 여지가 없다."
단내가 날 정도로 거식에게 반복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거식은 콧구멍을
후벼파다 코피를 질질 흘리거나 비듬을 털어 숫자를 세어 보거나 하며 태만
의 잔소리를 허공에 띄울 뿐이었다. 공부 못하는 인간들은 이유가 있다고 태
만은 생각했다.
태만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댔지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거식의 다리는 뻣
뻣하게 굳어서 링 외곽을 도는 외팔이의 움직임을 겨우 몸만 돌리며 따라 갈
뿐이었다. 오히려 강력한 로우킥 한 방에 겁을 먹은 듯 해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빽 스텝을 밟을 포즈였다.
거식에겐 데뷔전 이었다. 몸이 얼어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붙으라니까! 원 투 뻗으면서 전진하란 말야! 전진해서 클린치하라고!"
태만의 옆에 있던 장코치가 악을 썼다.
장코치의 악에 받힌 소리를 듣던 거식은 세컨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매우 기
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마치 바쁜데 왠 잔소리냐. 너나 잘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평소 장코치는 거식의 저런 표정에 몹시 불만을 가지
고 있었다. 게으르고 거만하면서도 상대방을 깔아 보는 듯한 무례한 표정.
'난 저 표정이 정말 싫어!' 라고 거식을 볼 때마다. 볼멘 소리를 하던 장코치
였다.
"저 새끼가! 저 표정 뭐야 저거! 얼어버린 거야? 시합하기 귀찮은 거야?"
열혈코치 장코치는 당장이라도 링에 튀어 올라갈 듯 머리의 반은 링에 밀어
넣고 악을 쓰고 있었다. 장코치의 성화에 거식은 시끄러우니 한번 들어주겠
다는 듯 다시 가드를 올리고 왼쪽 발을 한 발 앞으로 당겨 스텝을 밟으며 전
진을 시도했다.
쨉. 쨉 쨉 겁먹은 토끼처럼 총총거리며 거식이 데쉬했다.
"아쭈 저새끼바라. 장난치나.?"
거식의 스텝에 장코치가 혀를 내둘렀다.
처얼썩!
거식의 왼쪽 허벅지에 외팔이의 로우킥이 다시 한 번 작렬했다. 거식의 촐
싹거리는 데쉬를 간파했던 외팔이가 오른쪽 싸이드 스텝으로 왼쪽으로 빠
져 거식을 흘려 보내며 정확한 가격을 성공시켰다. 거식의 왼 발이 조금 꺾
이며 주춤했다. 거식이 주춤거리는 사이 외팔이가 어느새 거식의 왼 편으로
접근해 턱에 왼손 훅을 적중시켰다. 거식이 휘청거렸다. 틈을 주지 않는 외
팔이의 연속적인 공격이 가드를 올리고 웅크린 거식에게 가해졌다. 옆구리
의 훅 공격으로 거식이 몸을 웅크리자 다시 뒤로 빠져 연속적인 로우킥을 거
식의 무릎관절에 적중시키고 있었다. 오른 팔이 없으므로 외팔이의 왼쪽 손
은 두 배로 빠르게 움직였다. 두 손을 모두 가진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
한 왼손 더블훅이 옆구리와 안면을 빠르게 난타하고 있었다. 펀치속도는 두
손을 모두 쓰는 것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놀라운 속도였다. 그것도 옆구리
와 안면, 상하를 자유자재로 강타하는 외팔이의 왼 손 훅은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연습. 연습. 그리고 또 연습. 그것은 얻
어진 것이 아니라 외팔이가 쟁취해낸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겠다.
외팔이의 코치 김상범 관장의 인터뷰를 들어보자.
"처음에 말이야...나도 많이 놀랐지..격투기 이거 정말 아무나 하는 거 아니
거든. 근데 외팔이가 처음에 찾아왔을 때 내 그놈 눈을 보고 거절할 수가 없
더라고...분노. 절망. 희망. 뭐 이런 단어들을 초월해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으려는 눈빛이랄까...뭐 잘은 모르겠지만 그 놈 눈도 그렇고 힘없이 날리
는 그 놈의 오른 소매를 보면서도 그런 게 느껴져서 내 외팔이를 받아 들였
지. 처음에는 킥을 하다가 자꾸 넘어졌어. 킥을 찰 때는 몸의 중심이 중요한
데 외팔이는 자꾸 중심이 흐트러졌어. 한 팔로 중심 잡기가 어려운게 당연했
지 그래서 하체 단련만 백일을 하더라고.그리고는 킥을 시작하고 펀치 연습
을 시작한 거야. 외팔이가 독종은 독종이었어. 어느 날은 밤 늦게 혼자 연습
을 하고 있길래 그만하고 가라 그랬더니 조금만 더하고요 그러는거야. 그래
서 내가 많이 했으니까 내일 하라고 그랬지 그랫더니 뭐라는 줄 알아? 천 오
백 삼십번만 더 치면 되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하루에 몇 번 치는데 그랬더
니 이 만번이라는 거야. 이 만 번. 지가 무슨 에너자이저라고... 내가 그 소릴
듣는 순간 나이 오십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참느라 혼났잖아. 전적을 떠나
서 내가 외팔이하고 계속 갈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지...저 놈 주먹 한 번
봐. 완전 소가죽이 됐다니까..."
눈시울이 붉어진 김상범 코치를 인터뷰하면서 나는 왕거식의 데뷔전이 누
가 승리하고 패배하고를 떠나 멋진 게임이 될 거란 걸 확신했다. 물론 내 확
신은 확인되었다.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가보자.
외팔이의 펀치가 쉴 틈 없이 거식의 안면과 복부를 타격하고 있었다.
"클린치! 클린치! 뭐 하는 거야 클린치하라니까!"
태만과 장코치는 맹연습한 합창단처럼 똑같이 소리 질렀다.
여기저기 관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레프리는 바싹 웅크리고 고개를 숙
인 거식의 상태를 체크하려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레프리스톱(레프리가 선
수의 상태를 판단해서 재량으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것)을 시킬 요량이었다.
그 때, 몸을 웅크린 자세에서 거식이 왼손을 휘둘렀다. 상대를 보지 않고 무
작정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외팔이의 오른 쪽 관자놀이에 스치는 듯 싶었다.
외팔이가 주춤했다. 뒤로 물러섰다. 관중들이 '와' 함성을 질렀다.
외팔이는 섬짓했다. 물론 맞지는 않았다. 눈앞을 스쳐 간 펀치였다. 하지만
외팔이의 눈앞을 가르는 거식의 펀치는 외팔이의 안면에 차가운 바람을 일
으켰다. '부웅' 외팔이의 이마에 맺혔던 땀을 순간적으로 건조 시켜 버리는
것 같았다.
'이..이거 무식한 새끼잖아?'
외팔이는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방심한 채 공격에만 신경 쓰다가
운 나쁘게 이런 카운터펀치를 맞는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다. 하지만 외
팔이는 거식에게 미소를 띄어 보냈다. 가드를 내리고 잔 스텝을 밟으며 목을
푸는 시늉을 했다. 링에 기댄 거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드를 올리고 웅크
리고 있었다. 외팔이는 천천히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전진해 들어갔다.
"거식이 이 새끼야 눈떠라 눈 떠!"
장코치가 핏대를 세웠다.
거식은 몸을 세우고 가드를 내려 다시 장코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저 새끼 저거 나 놀리는 거지 저거? 응? 시합 끝나고 뒤졌어 저 새끼 저거
앙?"
장코치가 방방 뛰며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쫌 조용히 하소 아가 시합에 집중을 모하잔아요.."
태만의 일축에 더욱 열이 뻗친 장코치는 태만을 죽일 자세로 달려들었지만
태만은 무시했다.
"거식아 됐다. 됐다. 천천히...천천히 해보래이..."
태만은 거식의 등뒤로 위치를 옮겨 거식에게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거식은 태만을 흘끔 돌아다보며 마우스 피스를 입술로 물고 불분명하게 말
했다.
"지랄하네 니 같으마 천천히 할 수 있겠나. 이 스벌놈아!"
그 말을 들은 태만은 안심했다. 입이 살아 있으면 거식은 살아 있다. 태만은
그걸 알고 있었다.
거식은 링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전진하는 외팔이를 예의 그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
외팔이는 쉽사리 데쉬하지 않았다. 좀 전의 공격이 거식에게 그리 큰 데미
지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데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또 저 무시하는 듯한
표정은 뭔가? 인상도 더러운 놈이 왠지 모르게 사람의 속을 긁는 표정을 짓
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이 피 튀기는 격투기 링위에서 한 팔로 살아온 자신
이다. 관장이 시합 전에 생긴 거부터 하는 짓까지 뭔가 이상하게 기분 나쁜
놈이니까 신중하게 풀어 가라고 귀띔해 주었지만 저런 녀석이 자신의 투쟁
본능을 강화시켜 준다는 걸 외팔이는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기꺼이 즐겼다. 그
것을 즐겼기 때문에 여태껏 한 팔로 이 링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거다. 외팔이
는 거식을 데뷔전을 치르는 초짜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기회를 잡고 흥
분했던 자신을 가라앉히고 한 방 한 방 충격을 누적시키는 작전을 펴기로 했
다. 야금야금 무너뜨려 주지..
거식이 링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자 외팔이도 사정거리 밖에서 좌우로 돌기
만 했다. 심판이 거식과 외팔이에게 파이트!를 외쳤다. 그 소리가 거슬린 거
식이 심판마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심판이 빈정이 상해 다시 한 번 파이
트!를 외쳐 싸울 것을 종용했다. 거식의 표정은 누구에게나 불쾌감을 일으키
기에 충분했다.
거식은 외팔이를 따라 가드를 내리고 목을 풀어 보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외팔이의 스텝을 따라 링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관중들이 산발적으
로 박수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어 댔다. 관중들은 맷집이 센 선수를 좋아한
다. 관중의 성이 찰 때까지 맞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쉬익'
외팔이의 로우킥이 거식의 왼쪽 무릎을 향해 날아왔다. 거식은 살짝 백스텝
을 밟아 외팔이의 로우킥을 흘려 보냈다. 허공을 가른 외팔이가 가볍게 한
바퀴 돌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찰나, 거식의 오른발이 링바닥을 차고 반원
을 그리며 날아갔다.
'뻐적'
호두 깨는 소리가 들렸다. 외팔이의 왼쪽 무릎이 푹 꺾였다. 관중들이 놀란
함성을 질렀다. 거식의 강력한 로우킥이 외팔이의 무릎에 적중했던 것이다.
외팔이는 왼발을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서 링에 기댔다. 거식이 당했던 상황
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데쉬해랏! 그대로 몰아부치랏!"
장코치와 태만이 다시 한번 합창단으로 변신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거식은 데쉬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가드를 내리고 외팔이를 바라
보기만 했다.
"저 새끼가 뭐하노 저 새끼가.. 빨리 데쉬하란 말이야. 사람 속 디비지네 저
새끼 케이오 되기 전에 내가 디지겠다. 으아악!"
장코치가 튀긴 침으로 세컨 주변의 링 바닥이 흥건해 졌다.
외팔이는 무릎에 통증이 조금 완화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외팔이가 맞아 본
로우킥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건 미들급의 파워가 아니다. 헤비급 이
상의 파워가 실려 있다. 다리가 별로 실해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서 저런 파
워가 생겨나는 것일까. 그리고 저 표정은 또 뭔가? 관장 말 데로 정말 기분
나쁜 자식이다. 어쨌든 데쉬하지 않은 건 저 자식의 실수다.
외팔이는 링에 기대고 가드를 올린 채 거식을 노려보았다. 심판은 다시 파
이트를 외쳤다. 외팔이는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그래 한 방 정도는 견딜 만
하다. 이제 더 신중하게 경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
거식이 천천히 외팔이를 향해 다가섰다.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하자 거식의
오른발이 세워지며 링 바닥을 찼다. 다시 로우킥이다. 외팔이는 왼 발을 재
빨리 빼며 뒤로 물러섰다. 거식의 오른 발이 허공을 갈랐다. 공중에다 힘을
쓴 거식은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 바퀴 정도 돌며 중심을 잡지 못하
고 허우적댔다.
"엇 씨벌"
마우스 피스를 물고 있었지만 거식의 발음은 똑똑히 장내에 울려 퍼졌다.
관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 새끼가 쪽팔리게.."
이때 장코치와 태만의 얼굴을 보았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이 잘 익은 딸
기쥬스색으로 변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을 것이다.
심판이 거식에게 주의를 주었다. 시합 중에 말하지 말라는 싸인이었다.주의
를 받으면서도 거식은 목을 제끼고 심판을 깔아 보았다. 심판이 한 번 만 더
그러면 감점을 주겠다고 빈정 상한 것을 감추지 못하고 거식에게 경고했다.
"파이트!"
심판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외팔이의 스텝이 정상을 찾았다. 왼쪽 무릎 언저리가 시뻘겋게 부어 올랐지
만 야구 방망이로 후려치며 단련해 온 하체다. 외팔이는 보폭을 좁게 하여
순발력 있는 스텝을 밟아 거식에게 접근했다. 거식도 외팔이를 따라 스텝을
밟았지만 그건 역시 게으른 토끼의 스텝이었다.
외팔이가 앞뒤로 가볍게 상체를 움직이더니 왼손 쨉을 뻗었다. 하지만 그
건 쨉이라기보다 스트레이트성의 강한 공격이었다. 거식의 인중에 명중했
다. 주춤하며 거식의 머리가 뒤로 약간 제껴진 틈을 노려 외팔이의 오른발이
솟아올랐다. 거식은 외팔이의 발의 움직임을 알아챘다.
"로우킥이다!"
태만과 장코치가 샴쌍둥이처럼 머리를 붙이고 소리질렀다.
거식이 왼쪽 다리를 빼며 엉덩이까지 빼는 순간,
"아니다!"
샴쌍둥이가 다급히 외쳤다.
각도가 다르다. 하이킥(목 윗 부분을 가격하는 킥)이다. 거식은 순간적으로
왼손 안면가드를 올렸다.
'뻐직'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 거식의 왼손가드가 미처 다 올라가기도 전에 외
팔이의 오른 발등과 발목사이의 타점이 정확히 거식의 관자놀이에 작렬했
다. 거식의 머리는 털썩였고 물과 땀이 범벅된 액체방울들이 작은 폭죽을 일
으켰다.
끝났다. 외팔이는 생각했다.
조졌다. 샴쌍둥이는 생각했다.
외팔이의 발등으로 전해 오는 전율. 강력한 발차기에다가 정확한 타이밍.
게다가 급소인 관자놀이에 적중했다. 외팔이는 짜릿한 발등의 쾌감을 느끼
며 길이가 다른 양손을 높이 들고 환호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외팔이는
자신의 닉네임을 이제는 살인하이킥으로 갈아 버릴 거라 결심했다.
거식의 다리가 꺾였다. 눈도 풀렸다. 충격에 몸이 퉁긴 거식은 넘어질 듯 넘
어질 듯 하며 뒷걸음을 치더니 태만과 장코치가 있는 코너 쪽으로 밀려와 코
너기둥에 몸을 기댔다. 쓰러지지 않았다. 다운되지 않았던 것이다.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심판이 거식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식
의 상태를 보고 스텐딩다운(서있는 자세라도 충격이 크면 다운을 외치고 카
운트에 돌입)이라도 시킬 모양이었다. 하지만 거식은 링줄을 부여잡고 해롱
거리면서도 달려오는 심판을 깔아 봤다. 한 때 자신도 피끓는 격투선수였던
심판은 예전 실력을 발휘해 거식을 때려잡고 싶었지만 자신의 목에 걸린 나
비넥타이를 쓰다듬으며 겨우 자제할 수 있었다.
"빠이뜨으!"
심판이 여간 삐쳐 있는 게 아니었다.
"거식아 그냥 주저앉아! 주저앉으라고! 그냥 다운 되 괜찮아 일단 다운 되
라니까!"
태만이 거식의 등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승리감에 도취했던 외팔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제길 살인하이킥은 안 되겠군. 아니다 아니다. 전율의 왼
손 훅도 괜찮지 그래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는걸. 외팔이는 한 템포 쉬었
다가 자신의 왼손훅에 턱을 맞고 해파리처럼 늘어질 거식의 비참한 최후에
조금 애도를 표하며 다다다다...데쉬했다.
주저앉으라는 태만의 악다구니에도 불구하고 거식은 링을 잡고 풀린 다리
를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외팔이가 사정거리 안으로 달려들었다. 피니쉬블로우(마지막 결정타)는 왼
손 훅이다. 외팔이의 왼 팔에 힘줄이 뽀드득거리며 튀어 나왔다.
"거식아 주저앉으라니까! 빨리 다운 되란 말이야. 엉!"
하지만 거식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드! 가드 올려! 얼굴을 감싸란 말이야!"
장코치가 소리쳤지만 그것조차도 관중들의 함성과 섞여 윙윙거릴 뿐이었
다.
외팔이의 회심의 일격이 출발하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의 거식의 오른 쪽
턱을 향해 왼 손을 어깨 뒤로 제끼고 온 힘을 다해 뻗을 찰나.
'땡'
외팔이의 손은 어깨 뒤에서 더 이상 뻗어 나오지 못하고 민망한 상태가 되
어 버렸다.
프레쉬맨의 속도로 심판이 둘 사이에 끼여들어 1회전의 종료를 알렸다. 비
록 선수에게 빈정이 상해 있었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 할 줄 아는 심판
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에게 또 다시 귀찮다는 듯한 눈빛
을 보내는 거식을 보고 심판은 자신의 신속한 행동을 못내 후회했다.
겨우 몸을 버티고 있는 거식의 엉덩이 밑으로 태만이 재빨리 의자를 밀어
넣자 거식이 폭포가 쏟아지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세컨으로 돌
아가는 외팔이에게 관중들의 박수가 쏟아졌고 의기양양해진 외팔이는 1초
만 더 있었어도 전율의 왼손훅을 보여주었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듯 왼팔을 과
장되게 휘둘러 댔다.
첫댓글 화두님 잘 읽었답니다. 그냥 읽는것보다 상상하면서 읽으니 정말 실감이 나는거 같아요...화이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