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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하느님께까지 치고 올라가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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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23 03:34
- 하느님께까지 치고 올라가야!
“주님께서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시어,
제가 임금님께 당하는 이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오늘 저는 다윗과 비교하면서 사울을 보겠습니다.
물론 사울과 비교하며 다윗을 보기도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로 치고 올라가는 것 문제입니다.
인간 간의 문제가 있을 때 하느님께까지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인간적인 차원에 머물 때
우리는 하느님께까지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하느님 안에 머물지 못하며
그러기에 계속 관심과 시선이 문제로 삼는 그 인간을 향하게 되고 쫓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사울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 이렇게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
죽은 개 한 마리입니까, 아니면 벼룩 한 마리입니까?”
하느님께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고작 개나 쫓고 벼룩이나 쫓으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라는 거룩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 뜻을 찾지 시시하게 그리고 초라하게 인간의 뒤나 쫓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어제 말씀드렸듯이 화가 나더라도 인간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화를 하느님께까지 가지고 올라가 기도하는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고 하느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훌륭합니다.
임금이고 나이 많은 사울보다 성숙합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사울이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자기를 중심으로 나를 죽이려는 자나 적대자로 보지 않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로 보고 있습니다.
사울은 밑에서 노는데 다윗은 위에서 노는 것이며 그래서 고상하고 성숙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또 다른 측면에서 보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어제 사울은 한 가지 약속 곧 “주님이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사울은 요나탄에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어제 그리 약속했는데 오늘 다윗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 그 안에서 살아계시지 않게 됐고,
반대로 주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을 때 사울은 다시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윗보다 사울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기보다 사울처럼 많이 합니다.
시선을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 안에 머물기도 하다가 이내 인간에게 시선을 돌리고,
하느님 안에 머물기에 하느님께서도 내 안에 살아계시다가도
인간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이내 죽어계시고는 하잖습니까?
이런 우리 자신에 얼마나 깨어있어야 하는지,
살아계신 하느님께 얼마나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는지 명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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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늘 가꾸고 돌봐야할 성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영혼 당신께 숨나이다.”(시편57,2ㄱ)
불가에서는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인생사고(人生四苦)라 부릅니다. 삶도 늙음도 병듬도 죽음도 고통인 인생이라는, 즉 고해(苦海)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부탁받은 두 기도 내용도 계속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아침미사는 다음 두분을 위해 봉헌합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한 자매를 의탁합니다. 유방암 뼈속까지 전이되어 아주 위독합니다. 물도 잘 못마시고 병자성사 받은 상태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3명입니다. 신부님, 수사님들 기도부탁드립니다.”
“신부님, 딸이 학교 일이 너무 힘들다고 그만 둘수는 없고 죽고 싶다고 합니다...저도 딱히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저 기도할 따름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답은 기도뿐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자세와 더불어 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자주 강조하는 축제인생이지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은 고해인생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나름대로 힘겹게 고단한 인생들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묻게 되는 근본적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용기를 내어,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기도하며 감사하며 기쁘게 축제인생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다시 읽어보는 행복기도 두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는
복음선포의 꽃자리 지상천국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요 믿음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새롭게 확인 점검하게 되는 우리의 성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예외없이 산을 찾았던 주님은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 열둘을 불러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십니다.
열둘을 뽑으시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셨음은 물론이겠습니다. 당신을 따르며 배우던 제자들중 열둘을 불러 당신의 일을 나눌 사도를 뽑으십니다. 여기서 알게 되는 우리의 성소와 신원입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소이자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처럼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요 이에 응답한 우리들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가 우리의 성소이자 이중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들의 면면이 개성들 뚜렷하기가 총천연색 사진처럼 참 다양하고 풍부해 보입니다. 도저히 함께의 공동체를 이루기 힘든 사도들입니다. 새삼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다양성의 일치의 제자들이자 사도들의 공동체임을 깨닫게 되며 교회의 원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바로 이 열두 사도중,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로 묘사되는 마지막 인물이 우리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예수님의 실수인가? 도대체 왜 이런 유다를 뽑으셨을까?’ 그러나 이런 성소의 신비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의 성소를 끊임없이 재정비, 리모델링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무이한 귀한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평생 늘 돌보고 가꿔야할 우리의 성소입니다. 저절로의 성소가 아니라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성소의 불 꺼져 성소를 잃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렇듯 성소를 잃음은 절대로 하느님 탓이 아닌 내 탓입니다.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가 그 적절한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사도로 불러 주신 성소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여,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늘 기도와 사랑, 회개의 삶에 충실했다면 이런 불행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사무엘 상권에서 만나는 사울과 다윗이 우리 성소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이미 하느님의 신뢰를 잃은 사울과 하느님의 총애중 승승장구하는 다윗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줄기차게 자기 목숨을 쫓는 사울에 한없이 관대한 다윗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다윗과 비교하면 사울의 성소관리는 너무 허술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보이지 않고 다윗에게처럼 주님 사랑과 기도, 회개의 삶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자기 성소를 전혀 가꾸고 돌보지 않았기에,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질투의 무지의 포로가 되어 자기를 잃고 사니 자업자득입니다.
누구 탓도 아닌 자기 탓입니다. 도대체 사울에게는 생존에 급급할 뿐, 사랑과 기도, 그리고 회개로 입증되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면 사울은 주님과 무관한, 심지어 상관없는 남남의 관계처럼 느껴집니다.
참으로 우리의 성소에 반면교사가 되는 복음의 배반자 유다와 사무엘상권의 사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면서, <기도와 사랑, 회개의 삶>에 충실하므로, 늘 주님을 보고 배우며 자신의 성소를 돌보고 가꿨을 나머지 사도들이요 다윗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늘 가꾸고 돌봐야 할 우리의 성소입니다. 이렇게 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총으로 고해인생중에도 축제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성소를 지켜 주시며 우리 모두 축제인생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높직이 하늘 위에 주님 나타나소서
온 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57,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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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굳건히 서라. 내가 그대와 함께 하리라!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진리 안에 굳건히 서십시오. 내가 그대와 함께하겠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굳건히 서라. 내가 그대와 함께 하리라!
2026년 1월 22일 목요일
정의를 향한 걸음을 내딛을 때, 그 길은 고난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그는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굳건히 서도록 이끄셨습니다:
알라바바 몽고메리에서 항의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위협적인 전화와 편지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수는 점점 늘어났고, 1월 중순에는 하루에 서른 통, 마흔 통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박해 속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위협이 실제임을 깨닫자, 나의 마음은 흔들리고 두려움이 커져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공동체와 함께하는 모임에서 나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만일 언젠가 내가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그 어떤 폭력으로도 보복하지 말라. 지금까지 보여준 그 품위와 절제 안에서 계속 항의하라."
늦은 밤 위협적인 전화를 받은 뒤, 킹 목사의 마음은 기도를 통해 새로이 굳건해졌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르심을 체험하며 다시금 사명 안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고, 나는 한계에 다다른 듯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비겁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물러날 길을 찾으려 했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를 두 손에 묻고 부엌 식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기도드렸습니다. 그날 밤, 제가 하느님께 드린 말씀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주님, 저는 이곳에서 옳은 일을 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옳다고 믿기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약해졌습니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고 두렵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제가 약해지고 용기를 잃는다면, 그들도 약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저를 지도자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힘과 용기 없이 서게 된다면, 그들도 흔들릴 것입니다. 이제 제 힘은 다했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홀로는 더 이상 맞설 수 없습니다."
나에게 고요한 내적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야, 의로움에 굳건히 서라. 정의에 굳건히 서라. 진리에 굳건히 서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하리라."
나는 번개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고, 천둥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죄의 파도가 내 영혼을 무너뜨리려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끝까지 싸워 나아가라. 나는 결코 너를 홀로 두지 않으리라." 그 순간 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두려움은 거의 즉시 사라지고, 불확실함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48세에 암 진단을 받았고, 70세에 다시금 암을 맞이했습니다. 말기 전이암이라는 판정을 받은 뒤에도, 제 삶 곳곳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 압도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헌신적인 남편과 사랑을 주는 자녀들, 그리고 우리 삶의 빛과 기쁨이 되어주는 손주들로 축복받았습니다. 리처드 신부님께서는 늘 ‘큰 사랑과 큰 고통의 힘’을 말씀하시지요. 저는 어려움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자연과 사랑하는 이들을 통해 얼마나 큰 사랑을 드러내시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Kit E.
References
The Autobiography of Martin Luther King, Jr., ed. Clayborne Carson (Grand Central Publishing, 2001), 76, 77–7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evi Ventur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푸른 싹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고유한 땅과 자리와 환경 속에서 자라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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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만나 주시고, 몸소 당신으로 변모하는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시오. 그러나 그 머무름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이 됩니다. 기도와 활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이 참으로 함께할 때 우리는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입다."
가끔은 그날의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과 같은 이름이 열거되는 단순한 복음 말씀을 대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저는 "대립"—곧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눈앞에 떠오르곤 합니다. 일전에도 한 번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의 말씀에서 제 눈길을 끈 대립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음"과 "그들을 파견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곁에 두고 싶으셨다면, 왜 또 세상으로 보내셨을까요?
마르코 복음은 자주 이 표현, 곧 "당신과 함께 있는 현실"에 대해서 묘사하곤 합니다(2:19; 4:36; 5:18; 14:14, 67; 15:41). 이는 거의 제자직의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의 원천이었던 베드로도 "우리가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을 때"(2베드로 1:18)를 회상하며 기록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역시 산(혹은 언덕)이 등장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거룩한 산에서 기도와 묵상 안에 그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제자들도 그 산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모든 제자는 단지 그와 함께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말했듯이, 기도와 활동은 우리의 두 발과 같습니다. 둘 다 있어야만 우리는 참된 길, 곧 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회심이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 깊이 파고 들도록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존재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에 사랑이 차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존재가 사랑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될 때 우리 존재의 무의식 속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회의적인 정신 등이 조금씩 사라져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변모요 회심일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변모하게 하고 우리의 고정적인 생각과 관념을 뛰어 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이 깊이 새기고자 하는 수양을 자주 한다면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품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mindfulness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요즘 이 말을 "마음 챙김"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말은 마음 챙김 이상의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구원 역사 전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종들을 선택해 오셨습니다.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선택하셨고(1사무 16,12),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마르 3,13).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다."(요한 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할 사람마저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시편 57,2).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요한 20,21-23 참조). 그분은 교회를 통하여 풍성한 자비를 흘려보내십니다. 우리는 교회, 곧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자비의 분배자를 통해 그 자비를 받고자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실까요?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치유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겸손한 길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2열왕 5장).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섬길지 말지를 우리가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인생을 바꾸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 즉 하느님이 우리 변모의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의식하고 인식해야 합니다(1요한 4,1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사랑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입시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어떻게 섬기기를 바라시는지, 그 선택까지 받아들입시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와, 상처 입은 세상으로 흘러나가기를 빕니다. 여기서 비로소 진정한 치유와 변모가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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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원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가까이’라는 말은 [교회법](573조 1항)에서 ‘축성생활자’를 지칭할 때, 표현한 말마디입니다. 곧 “축성생활은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성소는 이토록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사랑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께 나아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어떻게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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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LA의 평화의 모후 성당에서 서울 대교구에 협력 사제 파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주교님들이 회의하면서 한 가지 제안했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으니 직접 가서 신부님도 만나보고, 사제가 지낼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 확인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작년 3월에도 오스틴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그때도 주교님께서 제게 임무를 주셨습니다. 오스틴 한인 성당에서 서울 대교구에 본당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데 제가 가서 직접 보고 사제를 파견해도 좋은지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오스틴 한인 성당에 가서 사제관, 성당, 친교실을 보았습니다. 자동차, 보험, 급여 현황도 파악했습니다. 제가 판단한 내용을 토대로 교구에 보고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저의 판단을 참조해서 오스틴 한인 성당에 사제를 파견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작년 3월의 일을 기억하였고, 이번에도 제게 임무를 주셨습니다. 오스틴은 자동차로 4시간 정도면 가는 거리이기에 1박2일로 다녀왔지만, LA는 비행기로 4시간가량 가는 거리이기에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다른 여러 여건과 조건도 보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본당 신부님의 사목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성당을 신축하면서 한국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한국의 합덕 성당을 모델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성인의 유해를 모셔 왔고, LA 지역의 한인 신자들을 위한 성지를 조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성지를 통해서 한국 성인들의 영성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구장님께서도 허락하셨다고 좋아했습니다. 신부님은 절두산 성지를 방문하였고, 절두산 성지와 자매결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성지를 찾는 교우들이 영적인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본당을 신축하는 중이기에 여러 여건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신부님은 협력 사제를 위해서 숙소와 자동차를 제공하고, 보험과 급여를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전의 신축은 교우들에게는 큰 부담이지만, 신부님의 열정과 영성이 있기에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보고 판단한 것을 교구에 보고 하였습니다.
교구 성소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예비 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분이 후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단, 감실, 성작, 성합, 제의와 같이 전례에 필요한 성물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 컴퓨터, 세탁기, 운동기구와 같이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기숙사를 축성할 때 후원자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기숙사 현관 입구에는 후원자들의 명단을 적은 동판을 만들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은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오스틴 한인 성당을 방문하고 보고 했던 일, LA 평화의 모후 성당을 방문하고 보고 했던 일이 교회를 위해서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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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3,13–19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당신께서 원하신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열두 사람을 세우시어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파견하십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교황)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함께 있게 하신 다음,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제자됨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름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완성된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시고,
함께 자라갈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문화 주간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부르심으로 엮인 공동의 작품입니다.
주님,
제가 혼자 완성되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당신과 함께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함께 세워지는 기쁨을 알게 하시고,
제 삶이 공동체를 살리는 작은 기둥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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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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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두 사람이 죽어 하느님 앞에 갔습니다.
사람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 이유라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하고 또 다양한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소설이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는 걸 알고도 읽는다는 게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부부도 아님에도 부부라 생각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가상인데도 허구인데도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구이고 가상이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간접체험 같은 걸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냥 어떤 관념적인 이야기는 실제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가 많기 때문에 제가 실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이 속에서 우리가 신앙의 한 면을 진지하게 곰곰이 묵상하며 중요한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서 함께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핵심 주제는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의 판단기준이 있다면 과연 그게 무엇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신자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마치 상황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같은 느낌입니다. 두 남자가 길을 함께 가는데 앞에 왠 비구니 스님이 쓰러져 있습니다. 실제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 이 두 남자는 개신교 신자로 설정하겠습니다. 그럼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 같네요. 아마도 상황은 이해되시겠죠. 문제는 한 사람은 보니 비구니 스님인 걸 알고 이거 부처를 믿는 사람이네 하고 마치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이고 해서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무시하고 지나갔던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분명 만약 크리스챤이었다면 분명 어떻게 해서라도 도움을 줬을 게 분명한 사람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 상황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다른 남자는 일단 위험한 상황에 있음을 직감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을 생각했습니다. 근데 보니 비구니 스님입니다. 순간 갈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처를 믿는사람이잖아 하고 말입니다. 한낱 불상 같은 걸 숭상하는 우상숭배하는 사람처럼 생각을 해 무시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생명은 중요한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도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도움을 줘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구호조치를 취해 비구니 스님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날 그 주위에 자연재난이 있어서 그만 두사람은 죽게 되었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외면한 사람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아서 오히려 그게 예수님을 절실히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거라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 남자는 은근 약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좋은 일인데 이게 그 사람은 예수님도 믿지 않는 비구니 스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상황은 다 설명을 했습니다. 만약 이런 가상의 설정 속에서 물론 가상입니다만 누가 그럼 과연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일까요? 이게 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걸 자주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답은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비구니 스님을 구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뻔한 이야기를 제가 언급했을까요? 우리는 이를 통해서 이 뻔한 단순 사례를 통해 다시 한 번 더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이 자녀인지 그걸 다시 한번 상기하자는 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가장 큰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본 본질이 무엇이며 그 본질에 따라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례를 받았다고만 해서 예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례는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의 상징입니다. 만약 세례로 다 결정이 된다면 세례 이후의 어떤 행위나 그 행동의 가치가 그 속에 묻혀서 판단이 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할 하등의 필요성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로 모든 신분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신분이 고정이 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을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을 하면 이 세상 그 어떤 신심행위를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자녀가 아닌 사생아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무심코 생각하고 우리가 평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우리는 지금 나는 하느님을 따르는 자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묵상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은 자신있게라고는 말씀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그저 형식상 겉으로만 자녀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주 일부분만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걸 오늘 새벽에 묵상 체험글을 올리느냐 하면 최근 제 주위에 우리가 이걸 잘못 알아서 어떤 한 부부가 상처를 받아 다른 공동체로 떠날 위기에 처한 현실을 보며 제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한번 진심으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공유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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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3,13-19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
오늘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다윗이라는 인물의 너른 배포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음에도 그런 자신을 모함하며 죽이려드는 사울을 끝까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랬기에 사울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울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세속적인 조건들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뜻을 기준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실수와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을 시기 질투하여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온갖 악행을 꾸며도, 그는 자신이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하느님께서 기름 부음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왕으로 뽑은 사람이니, 미움이나 원망 그리고 복수심 같은 개인적 감정에 휩쓸려 그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건 그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무식한 사람, 고집 센 사람, 성격이 불 같은 사람, 의심 많은 사람, 심지어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언제든 당신 등에 칼을 꽂을 사람까지 제자로 뽑으신 것 또한 그들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세속적인 조건들로 판단하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 뜻을 기준으로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얕고 짧은 생각으로는 유능한 사람,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 인기나 명예가 높은 사람을 뽑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데에 더 유리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서로 자기가 잘 났다며 아웅다웅하는 우리 모습이 ‘도토리 키 재기’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걸 아셨던 겁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그분 뜻에 따라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따로 있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 안에 머무르면서, 예수님을 믿고 배우며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건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고, 여러 성물들을 장신구처럼 주렁주렁 달고만 다니는 ‘위선’과는 다르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진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기보다 그분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그 배움이 머리 속에 생각으로만 머무르지 않도록 행동과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그분의 선함에 조금씩 물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석에 붙어있던 쇳가루가 자력을 갖게 되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머무르던 우리도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과 철저한 순명을 갖추게 되지요. 그런 상태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자비를 기쁘게 실천하면, 그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에 힘 입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으로 뽑으시어 특별한 길로 불러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매일 매순간 그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런 삶이 우리 모두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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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 중 일부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78
1월23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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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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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 최두헌 요한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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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제자로 뽑으시는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이 며칠 저희 집에 며칠 묵어갈 때였습니다. 연령대가 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야말로 대가족이었습니다. 손이 두 개여서 일일이 다 품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 원장님를 돕기 위해 형들과 누나들은 꼬마들 한 명씩 도맡아 케어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대여섯 살 꼬마들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꼬마가 우리가 하니 괜찮다고 극구 말려도, 밀걸레를 손에 꼭 쥐고 열심히 바닥을 닦았습니다.
사실 크게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 없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일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 되는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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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훌륭한 리더는 조직 체계를 만든다>
마르코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란 첫째,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편애는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는 가장 무서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는 ‘시스템을 만드는 리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났을 때 짓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시스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 수도회를 세운 것과 같고, 마더 데레사도 사랑의 선교회를 세운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이어갈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리더가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역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는 리더가 사라지면 금방 와해됩니다. 또 리더가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치더라도 혼자 힘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끌 때 처음엔 혼자 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이 와서 모든 백성의 송사를 본인 혼자 다 처리하려 하지 말고 그 권한을 천 명, 백 명, 오십 명, 열 명에 해당하는 리더를 뽑아 그들에게 맡기라고 충고합니다. 모세는 그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훨씬 편하게 좋은 결과를 얻어냅니다.
사람은 한 조직에서 참모형이 있고 리더형이 있습니다.
참모형 리더는 참모로 있을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자신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참모들은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두세 사람이 합친 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반면 리더형 인간은 남 밑에서 일을 할 때도 리더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최선을 다하지만, 지도자가 되면 훨씬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예로 들자면 유비는 리더형 인간이고 제갈공명은 참모형 인간입니다. 유비가 만약 남의 밑에 있었다면 그는 중간급 정도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조라는 엄청난 사람이 판치는 곳에서 한 나라의 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실력으로는 제갈공명이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것에 비해 사람들을 일치시킬 능력이 부족했음을 알고 유비의 대를 이어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만약 유비와 제갈공명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삼국지의 이야기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야 많이 있겠지만,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과 사장실장인 시마 사토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손정의 사장은 비전을 제시하고 무작정 나아갑니다. 그래서 무모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이 중간에 시마 사토시는 그 무모한 도전을 시스템화하여 전략을 짭니다.
예를 들어 손 사장이 몽골에서 일본으로 전기를 끌어오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시마 사토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났고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대선 후보인 박근혜 측근, 문재인, 안철수까지 다 만나고 다녔습니다. 보스가 꿈을 꿀 때 그 꿈의 실행 계획을 짜주며 일반 직원들도 그 꿈이 황당무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손발이 잘 맞으면 못할 게 없지만, 참모 스타일이 지도자가 되고 보스 스타일이 참모가 되면 손발이 맞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모도 되고 리더도 되어야겠지만, 리더가 되었을 때 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온 예화를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자 네 명을 모으고, 일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고 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이야기 끝.
에드와 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는가, 아니면 시스템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뽑아 교회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개인의 힘만을 믿는다면 그건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 자신 밑에 있는 사람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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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낼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함께하시며, 권한을 주시면서 파견하신 까닭은 아버지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곧 구원 사명을 완수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특별히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주어지는 소명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부름을 받습니다. 저마다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흠 없기 때문에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더라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 사랑과 은총으로 채워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 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배우고, 세상에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는 삶 속에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께서 보내시는 곳에서 사랑과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아직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절망과 두려움에 갇힌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마음을 다하여 응답하고, 그 응답을 세상에서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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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분 곁에 두신 사건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순히 가르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고, 그분의 삶과 구원 사업에 참여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이는 교회가 ‘공생과 파견’이라는 두 축 위에 세워진 것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분의 말씀에 흠뻑 젖어야,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제자란 스승의 말씀 속에 잠겨, 그분과 하나 되는 사람이다.”(De Doctrina Christiana, 4.10.16) 즉, 참된 제자가 되려면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스승과의 친밀한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는 삶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어부, 세관원, 혁명가 등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의 부활과 말씀을 체험하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며 복음을 전했다. 이는 교회가 각계각층을 포용하는 보편적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또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시몬→베드로, 사울→바오로, 레위→마태오) 그들의 신분과 정체성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을 상징한다. 우리 신앙인도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으면,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삶과 정체성 전체가 변화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참된 제자는 단순한 수행자가 아니라, 주님의 친구이며,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여정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성 바실리우스는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참된 제자의 삶이다.”(Regulae fusius tractatae, 12) 즉, 예수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에서 오는 은총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가? 그분의 친구로서,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가?”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쳐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 우리 모두 주님과 친밀한 삶을 나누며, 그분을 닮는 참된 제자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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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서 나에게 이름을>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이름을>
그분께서 나에게 무엇이라도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름 붙이시는 그분과 이름 얻는 내가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이니까요
그분께서 나에게 그루터기라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머나먼 길 걸어온 지친 벗들
잠시나마 쉴 자리 될 수 있는
그분께서 나에게 하얀 종이라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낯설지만 새로운 한 걸음 내딛는 벗들
벅찬 꿈 곱게 써내려 갈 수 있는
그분께서 나에게 한 모금 물이라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된 여정 목마름에 타들어가는 벗들
새 삶의 기운 북돋울 수 있는
그분께서 나에게 한줄기 빛이라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캄캄한 앞길에서 비틀거리는 벗들
다시 곧추세우는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분께서 나에게 한 방울 눈물이라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홀로 숨죽여 흐느끼는 벗들
결코 외롭지 않게 품을 수 있는
그분께서 나에게 길옆 작은 꽃이라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 옮기는 벗들
잠시 눈길 훔쳐 삶의 소중함 일깨울 수 있는
그분께서 나에게 무엇이라도
이름 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름 붙이시는 그분과 이름 얻는 내가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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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3-19)
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신 일은, ‘힘’을(권능을) 주신 일이기도 하고, ‘책임’과 ‘임무’를 맡기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의 권한과 힘을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임무 수행을 하라고 ‘위임’해 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권한과 힘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에만 그 위력이 발휘되는 것,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권한과 힘이라고 착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사도들이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는데(마르 9,18),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그랬을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 외에도 원래 사도 직무는 전부 다, 또 신앙인들이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들은 전부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사도 3,6-8ㄱ)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2) 내 안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면, 먼저 ‘내 안에’ 복음이 가득 들어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예수님의 수난 때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가득 차면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사도 2장).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성령 강림’이 사도들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도들 안에 복음이 가득 차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을 남에게 전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없으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신앙을 증언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지도 못하고, 남을 믿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고 증언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사랑 가득한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처음 보셨을 때 바로 칭찬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타나엘’을, 우리 교회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예외적으로 바르톨로메오 사도만 칭찬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들은 각자 어떤 특별하고 뛰어난 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도로 뽑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사도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열둘을 뽑으셨습니다(루카 6,13)
우리는 사도들의 평범한 겉모습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비범함과 특별함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 자기 자신의 내면에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나만의 특별함’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나 겸손 같은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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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마르3,13-14.16)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하고,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을 보면,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신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심으로서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셨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적대관계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 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하던 이들이었다. 예수님은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 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 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이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진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살아난다. 찡그린 얼굴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주님,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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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 말 성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그리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고,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이 세 가지, 곧 예수님과 함께 있음, 파견과 복음 선포,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짐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문장의 논리상 파견과 복음 선포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는 목적은, 첫 번째 목적인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로 뽑으신 열두 명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글도 모르는 어부들과 세리, 열혈당원까지, 그들이 보기에 대부분 죄인들을 모아 놓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네.’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통하여 사도로 변화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증언합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함께 박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하는 복음 선포자로 변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사람들로 변합니다.(사도 5,16 참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는 은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봉사자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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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부르심과 행복한 응답>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은 주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이 근원적인 소명의 삶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간절히 만나고자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기도를 통해서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이나 세상의 갖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동기가 사랑임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부르시는 분은 항상 예외 없이 주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마치 주인인양 착각하며 나를 앞세우거나 내 업적으로 자랑하는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기준은 원하셨기 때문입니다.(3,13) 주님께서는 나의 원의와 상관없이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에게 좋을 것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시기 때문에 우리를 원하십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영원토록 나를 사랑으로 원하시는 분이 계심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비결이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시면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품과 성격, 신분과 경력, 외모, 재산 소유 정도 등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원하시기 때문에’ 뽑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부르실 때마다 기꺼이 응답해야 합니다. 나아가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우리도 신앙인답게 인간적인 요소나 기준 때문에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초대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강요나 구속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동기 자체가 나와 동료 인간들의 선(善)이요 행복이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조건 없이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속을 거닐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매일의 삶에서 왜 나를 원하시고 부르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러하셨듯이 ‘함께하기 위해서’(3,14),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도록’(3,14-15)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예수님과 함께하고, 함께하시는 그분을 드러낼 때 힘 있는 복음선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한 공동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 경청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늘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과 함께하면서 사회적 약자들과 억울한 이들, 소외와 차별로 고통을 받는 이들, 인간의 기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과 깊은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부름 받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원하시어 함께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사랑의 응답을 하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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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실과 의견 그리고 해석의 경계를 구분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과학으로 증명된 것은 모두 사실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도 과학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에 우려를 보냅니다.
커피를 생각해 보세요. 커피가 몸에 좋다는 말이 많습니다. 당뇨, 파킨슨, 알츠하이머, 간질환, 뇌졸중 등 질병 위험감소에 좋다고 합니다. 또한 풍부한 항산화 성분으로 세포 손상을 막고 노화를 방지한다고 합니다. 집중력 향상과 피로 해소 효과도 있고,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해서 운동 능력도 향상됩니다. 우울감도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거의 만병통치약입니다. 그러나 밝혀진 나쁜 점도 많습니다. 불면증을 가져올 수 있으며, 카페인이 있어서 민감한 사람을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위산 분비를 촉진해서 불안감을 느끼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철분 흡수를 방해해서 영양소 흡수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독이나 금단 현상도 있습니다.
좋은 점, 나쁜 점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적당히’는 과연 과학적일까요? 실험과 연구로 얻은 결과도 결코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절대적인 믿음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것에 참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주님에게만 둬야 합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산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산은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계시가 이루어지는 거룩한 장소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했듯이, 산 위에서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을 형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제자들의 자질이나 능력이 뛰어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철저히 예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공로보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즉, 엘리트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신 부족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지내게 하시고, 또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면서 변화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엘리트 의식을 갖습니다. 자기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내세우는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는 주시는 무상의 은총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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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갔다."(마르 3,13)
<부르심과 파견!>
오늘 복음(마르3,13-19)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곧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6-17)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뽑힌 사람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면서, 동시의 예수님의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성탄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듣고 있는 독서는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태어난 '사무엘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판관이며 대사제이고 예언자'입니다. 사무엘의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의 부르심, 그리고 두 번째 임금인 이사이의 아들 다윗의 부르심과 이 둘의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펼쳐나가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활동들'입니다. 한마디로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하느님 부르심에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그 반대인 죽음과 멸망의 모습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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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 3,14)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앞세워
보내시기보다
먼저 곁에
머무르라
부르십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이 시간은
삶으로 익어 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사도의 삶은
멀리 나아가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주님 곁에 머무는 데서
탄생합니다.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사람은 변화됩니다.
참된 변화는
앞서 나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머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따로 떼어 놓인
행위가 아니라,
삶 한가운데서
함께 살아내는
생활입니다.
파견은
바깥세상을 향한
이동이기 전에
내면의 중심을
되찾는 여정입니다.
중심이 바로 설 때,
삶 전체가 이미
사명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이 순간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깊은
기도가 됩니다.
참된 가르침은
말을 앞세우지 않고,
스승과 함께
살아낸 삶 속에서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사명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관계에서 태어난
사명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명 그 자체가
되어 가는 사람을
빚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중심을
조용히
당신께로 옮기십니다.
주님 곁에
머무는 이 시간이,
이미 우리 삶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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