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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 목 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추상(秋霜)
학鶴은 나무에 앉지 못한다 Ⅰ. 머리말 우리 겨레의 그림 민화民畵Minhwa는 한화韓畵 중 실용회화實用繪畵로서 서민뿐만 아니라 상류계층 사람들까지 즐겼던 우리 국민의 그림이다. 민화속에는 민속화民俗畵적인 민화도 있고, 민족화民族畵적인 민화도 있고, 민중화民衆畵적인 민화도 있으며, 민체화民體畵적인 민화도 있다. 민화에는 우리의 염원, 꿈, 행복이 표현되어 있다. 민화는 우리의 마음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함축된 인간미를 안고 역사를 달려온 겸허한 우리의 희망이다. 한민족의 것이면서 우리 인류 모두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이 인간 본래의 공통된 염원으로 승화되어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민화는 우리 마음의 노래이다. 우리들 마음의 꽃이다. 우리들 마음의 거울이다. 우리들 마음의 삶이다.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직관적으로 조망해 보면, 중국문화는 화려기예華麗技藝하고, 일본 문화는 단순섬세單純纖細한데 비하여, 우리문화는 서민의 우직질박愚直質朴, 선비문인과 화원의 솔직담백率直淡白 한 특질이 있어 보인다. 이점이 문화에 있어 한국성을 결정하는 내용이라고 본다. 우리 민족의 이런 문화특징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민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민화는 장식적 필요로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토속신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는 주술적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민화는 집단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민화는 뽄그림이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의 원류에 있어서 문인화나 도화서 화공들의 그림을 철저히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담아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르다. 이는 민화가 속칭 ‘뽄그림’이라고 하여 일정한 본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점차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특징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본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조선시대 상류층과 왕권 중심으로 형성된 유교적인 세계관이 토속적이고 종교적인 민중들의 세계관으로 전이되었으며, 민화가 양산되고 보급되면서 점차 서민들이 지배층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이다. 민화는 우리 민족의 감정과 정서를 대변하는 독특한 문화 양식이다. 민화에는 분명한 뜻이 있다. 기복 등과 같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품에 의미가 빠져서는 안되지만 의미로만 지배당해서도 안 된다. 이제 복사에서 넘어 현대의 회화로 민화가 발전할 수 있으면 민화의 관심은 국제적으로 점점 높아질 것이다. 민화는 지나간 과거의 그림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그림이다. 융복합 창조시대를 맞아 서로 다른 업종의 사람들이 협업하여 민화를 현대회화로 발전시키고 한류로드로 수출하는 문화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민화 속에 등장하는 새, 나비, 꽃, 나무 등 여러 사물을 실제로 볼 기회도 늘었고 해상도가 높은 사진영상을 통해서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필자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 그룹 “새를사랑하는사람들” 을 개설 운영하며 다양한 새들을 자주 접하고 있다. 민화계의 원로 巴人송규태 선생님으로부터 민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2014년에 “페이스북민화미술관”을 개설한 필자는 송학도 속의 학鶴을 더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는 뽄을 새로 만들어 보고자 조류 사진 전문가인 친지에게 소나무 위에 앉아있는 학 사진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친지로부터 돌아온 첫 대답은 “학은 나무에 앉지 못한다. 발가락 구조가 앉을 수 없게 되어있다.”였다. 조류학박사에게 다시 문의하여보니 “조류의 뒷발가락을 1지라고 부르는데 대개 산새를 포함해 횃대에 앉을 수 있는 새들은 1지가 길고 발톱도 긴 편인데 반해 두루미는 1지가 거의 퇴화한 형태로 물리적으로 횃대를 잡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학의 생태학적 특성과 관련된 문헌들을 조사하고, 학을 그릴 때 도움이 될 만한 사진들을 제공 받아 함께 정리하여 보고 학의 민화 속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그림 속 두루미 두루미鶴는 그 고결한 흰빛과 날개 끝의 검은 깃으로 호의현상縞衣玄裳 즉 흰옷에 검은 치마를 입었다고 했고, 이마의 붉은 점으로 인해 단정학丹頂鶴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신선들이 학의 등에 올라타 하늘로 오르내렸으므로 여기에 신선적 이미지가 덧보태져 선학仙鶴·선금仙禽·태금胎禽등의 별칭으로도 불렸다.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는 학이 천 년이 되면 빛깔이 푸르러지고, 또 천 년이 지나면 검어진다고 했다. 지리산에는 고려 때부터 청학동靑鶴洞이라는 유토피아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왔다. 이곳에 살고 있다는 청학靑鶴은 바로 천 살 된 학을 말한다. 청학은 따로 먹는 것이 없고 이슬만 먹고 살며 신선들의 탈것이 된다고도 했다. 또 이천 살이 된 학은 현학玄鶴이라고 한다. 학은 이렇듯 신령스런 존재로 깊이 새겨져 왔으므로 옛 그림에는 학을 그린 것이 유난히 많다. 학이 나오는 그림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다. 그중 흔한 세 가지만 들어보면, 첫째는 학만 한 마리 그린 것이 있고, 둘째는 학이 소나무 등걸에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 셋째는 학이 소나무 가지에 올라서 있는 것이다. 그 밖에 학 한 마리가 바닷가에 외롭게 서 있는 모습, 혹은 학을 대나무 숲과 함께 그린 양식이 있다. 학 한 마리가 ‘수壽’라면 여기에 대나무, 소나무 등을 배치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인 학은 거북이와 더불어 오래 사는 짐승의 대표격으로 천년장수千年長壽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학수鶴壽하면 수석壽石처럼 장수를 뜻한다. 학은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의미로 세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학이 등장하는 세화로 송학동춘도松鶴同春圖가 있다. 이는 학수송령도鶴壽松齡圖라고도 한다. 학이 천 년, 소나무가 백 년을 뜻하므로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소나무는 사시장철 푸르니 장춘長春의 뜻이 있고, 두 마리 학은 부부가 해로하며 오래오래 살라는 동춘同春의 뜻을 담고 있다. 소나무 위에 학이 한 마리만 앉아 있으면 그 사람의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가 된다. 그림 속에도 “학의 수명은 그 나이를 알지 못하리 학수불여기기야鶴壽不如其紀也”라는 구절과 함께 그림 받을 사람의 이름을 써두었다. 오래 사는 것들을 한데 모아서 구성하면서 이때 학이 소나무 위에서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 학은 소나무 가지에 올라가지 않는다. 학은 초원이나 늪지에 사는 새이다. 이런 곳에서는 뱀이나 족제비 등 설치류들에게 해를 받기 쉽지만, 워낙 큰 새이기 때문에 별 위험을 느끼지 않는다. 또 해부학적으로도 발가락 셋이 앞으로 뻗어 있고 며느리발톱이 위쪽으로 올라붙어 있어 나뭇가지를 움켜잡을 수 없기 때문에 나무 위에서 사는 것樹上棲息이 불가능하다. 소나무 위에 올라가 사는 새는 황새로 학과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 학수송령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이라야 되었던 것이다. 단원 혹은 조지운, 혹은 화투 그림에서 보는 “학이 솔가지 위에 올라서 있는 그림”은 솔가지의 신薪자가 새해의 신년新年을 뜻하고 학이 장수長壽를 뜻하므로 신년익수新年益壽, 새해도 더욱더 무병장수하셔서 건강하시라는 뜻을 나타낸다. 신薪위에 학壽이 올라가 더하여 익益 있는 형국을 글자로 푼 것이다. 소나무 대신 대나무를 그리면 죽학도竹鶴圖가 된다. 죽竹은 축祝과 중국 음이 같아서, 대나무와 학이 만나면 바로 축수도가 된다. 죽학도는 대숲에서 학이 길게 목을 빼 울음을 울고 있는 장면이다. 구름을 함께 그린 것은 청운靑雲의 벼슬길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품당조도는 학이 바다 물결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그림을 말한다. 학은 새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의 위치를 차지해 일품조一品鳥로 일컬어진다. 당조當朝는 조정에 선다는 말이니, 일품관의 높은 벼슬로 조정에 선다는 뜻이다. 이때 당조는 파도 앞에 서 있다는 당조堂潮와 쌍관된다. 본디 학은 파도치는 바닷가에 살지 않는다.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는 이유는 일품당조一品當朝 (당대의 조정에서 벼슬이 일품에 오르다)로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함께 그려진 바위와 대나무 그리고 소나무는 축수의 뜻이고, 물결을 함께 그려 오래 살 뿐 아니라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더불어 누리라고 축원했다. 송학도는 푸른 소나무 위에 고고한 두루미(학)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고고함과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두루미를 닮고자 하는 우리 선비들의 생각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데 실제 생태계에서 두루미는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 위에 앉거나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두루미는 습지나 논, 초원 등에서 서식하지, 나무 위에 내려앉지 않는다. 나무 위에 앉거나 둥지를 트는 새는 백로나 황새와 같은 종들이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백로나 황새를 두루미로 착각했거나 임의로 좋은 의미가 있는 소나무와 두루미를 하나의 화폭에 같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송학松鶴은 학과 외양과 생태가 비슷한 황새와 혼동해 소나무에 깃드는 황새의 습성을 본디 땅 위에 둥지를 트는 학에 이입시켜 만든 것이다. 이는 학 본연의 생태와 무관한 문화적 언어로서 시대가 내려오면서 하나의 창작 문법으로 정착했던 것이다. 또한, 학은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하는 새다. 옛 기록 상학경相鶴經에 따르면 학은 천 년 이상 산다고 했다. 십장생도는 오봉병과 더불어 조선시대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주제다. ‘십장생十長生’은 장수를 상징하는 자연, 동식물들을 말하는 것으로, 예부터 오래 산다고 여겨진 거북이나 학, 사슴 등의 동물과 하늘의 해, 구름, 땅의 산, 바위, 물 등의 지상계地上系,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不老草, 천도天桃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무병장수無病長壽의 상징으로 십장생 그림의 주요한 소재였다. 이 중 십장생은 해, 구름, 산, 바위,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불로초를 말한다. 십장생의 소재들은 우리 고유의 천신天神, 일월신日月神, 산악신山岳神 등의 무속 신앙 위에 중국의 신선사상을 수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십장생은 상서로운 의미 때문에 회화뿐 아니라 도자기, 공예품 등의 장식에 많이 활용되었다. 특히 회화에서는 왕실 행사에 사용되어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고 장수와 영원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Ⅲ. 두루미는 어떤 새인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예부터 두루미를 신선 같은 새로 여기고 산, 물, 돌, 태양, 구름, 소나무, 거북, 사슴, 불로초와 더불어 십장생十長生 가운데에 하나로 믿어 왔다. 이 새는 절식節食 능력이 뛰어나서 천 년이나 산다는 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고, 야생에서 약 30년 이상 사는데 인공 번식한 경우 61년을 산 경우도 있었으며, 동물원에서 최고 87년까지 생존한 경우도 있다. 학鶴의 순수 우리말은 두루미이다. 울음소리 ‘뚜루루루~ 뚜루루루~’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여 두루미라 부르게 되었다. 두루미는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에서 학鶴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두루미라고 부르는 종은 예로부터 단정학丹頂鶴으로 알려졌으며, 암수 모두 이마·머리꼭대기·눈앞까지 붉은색의 피부가 노출되어 있고, 노출된 피부의 앞과 뒤끝에는 뻣뻣한 검은색 털이 촘촘하게 나 있다. 머리의 붉은색은 번식기에 더욱 밝아지며, 다 자란 두루미의 깃털은 모두 흰색을 띠고, 목과 둘째·셋째 날개깃은 검은색, 다리는 회색을 띠는 검은색이다. 두루미 무리는 전 세계 9천여 종의 새들 가운데 가장 큰 무리를 이루며, 작은 것이 몸길이 약 90㎝이고 큰 것은 150㎝ 이상이다. 모든 두루미는 암수의 외부 형태가 같고 보통 수컷이 암컷보다 크다. 두루미는 남아메리카와 남극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대륙에 서식하며, 현재 전 세계에 15종의 두루미 종류가 있다. 두루미는 두루미과에 속하며, 두 개의 아과(두루미아과와 관학아과)로 구성되어 있다. 관학아과에 속하는 두루미 종류는 유럽과 북미에서 지난 5천만 년 동안 서식하였다. 그 중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서 서식하는 관학아과의 관머리두루미와 흰볼관머리두루미 2종만이 살아남았고 15종의 두루미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나무 위에서 잠을 잔다.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두루미는 두루미아과에 속하며, 흑두루미, 미국흰두루미, 검은목두루미 등과 함께 같은 분류군에 속한다. 두루미아과에 속하는 두루미는 뒷발가락이 매우 짧고 다리 위쪽에 붙어 있어 쉽게 걸을 수 있으나 나뭇가지에는 앉을 수가 없다. 두루미는 주로 습지에 살기 때문에 그 생활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긴 목과 긴 부리, 긴 다리, 가늘고 긴 발가락의 형태를 발달시켜 왔다. Ⅳ. 두루미의 발가락 두루미의 길고 깡마른 다리는 몸의 털이 젖지 않고 물에 오래 서 있는 데 적합하고 또 새가 날 때 길고 깡마른 목과의 균형을 잡는 데 유용하다. 두루미 새끼가 알에서 부화할 때는 다리가 짧다. 새끼들은 식물이 아직 크기 전에 일찍 부화하고 식물이 자라는데 맞추어 아주 빨리 다리가 자라서 풀과 나뭇잎 너머 부모를 바라볼 수 있다. 나무에 앉지 않는 오리, 거위 그리고 도요새와 같은 대부분 물새들은 뒷발가락이 짧거나 없다. 뒷발가락은 새들이 진흙에 빠져 움직일 수 없게 하지만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을 때는 매우 유용하다. 왜가리는 나무에 둥지에 틀기 때문에 긴 뒷발가락을 가지고 있다. 두루미는 땅바닥에 둥지를 틀기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물새와 마찬가지로 뒷발가락이 아주 작다. 나머지 발가락들은 질척질척한 진흙 위에서 두루미 몸의 균형과 지탱을 하기에 적합하게 충분히 길다 두루미는 뒷발가락이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해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다. 대신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 타조는 많이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앞발가락도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었다. 마치 돼지나 소가 2개의 발굽을 갖고 있어 잘 뛸 수 있는 것과 같다. Ⅴ. 두루미와 비슷한 백로, 황로,왜가리, 황새 우리 주변에 백로, 황로, 왜가리, 황새 등의 희고 큰 새들이 관찰되고 있지만, 보통사람들의 눈으로는 분류가 잘되지 않는다. 형태적으로 긴 다리, 긴 목 그리고 긴 부리를 가지고 있는 새들이기 때문이다. 두루미와 달리 나무에 둥지를 트는 백로, 왜가리, 황로 그리고 황새들의 뒷발가락은 퇴화하지 않고 잘 발달해 있다. 두루미는 종종 백로白鷺와 혼동되기도 한다. 백로 역시 목과 다리가 길어 외모가 비슷할 뿐 아니라, 소나무 숲에 나뭇가지를 모아 집단으로 번식하길 좋아하기에 병풍이나 동양화에 소나무와 함께 그려진 학으로 혼동하기 쉽다. 하지만 백로는 두루미와 달리 머리 위가 붉지 않고 온몸이 흰색이며 크기도 작다. 백로류가 대부분 여름철에 보이는 데 비해 두루미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철에나 볼 수 있다. 학동鶴洞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을 보면 과거에 두루미가 살았던 곳이 아니라 백로가 많이 살았을 환경을 지닌 곳이 많다. 두루미는 나무에 앉지도 않으며, 넓게 펼쳐진 습지와 하천을 좋아한다. 그에 비해 백로는 심산계곡이라도 다랑논이 있으면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두루미는 머리가 붉은 것 이외에 목 주변과 꼬리 쪽이 검은색이어서 백로와 구별된다. 두루미 머리에 붉은색이 도는 부분은 깃털이 붉어서가 아니라 작고 무수한 피부 돌기에 혈액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꼬리처럼 보이는 검은색 부위는 실제 꼬리가 아니라 날개깃이 길게 늘어져 덮은 것이기도 하다. 백로는 외형적인 차이는 없으나 크기에 따라 중대백로, 중백로, 쇠백로로 구분한다. 백로와 왜가리는 긴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날 때 목을 S자로 굽히는 것이 특징이다. 백로와 왜가리는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도 목을 약간 구부리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으로 물고기 등의 먹이를 잡을 때 목을 스프링처럼 재빠르게 펴서 잡을 수 있다. 반면, 두루미는 잠잘 때를 제외하고 땅에 앉아 있을 때나 날 때 대부분 목을 곧게 편다. 백로는 다리와 부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의 하얀 깃털로 덮여 있고, 왜가리는 전반적으로 회색을 띠는 깃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백로는 두루미로, 왜가리는 재두루미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재두루미는 뺨이 붉은색을 띠고 뒷목이 유난히 흰 데다 날개깃이 꼬리 쪽으로 길게 늘어져 우아하게 보인다. 왜가리는 머리를 보면 검은색의 눈썹이 길게 발달해 머리 뒤까지 뻗어 있다. 왜가리는 혼자 가만히 서 있는 일이 많으나, 재두루미는 대부분 가족이 함께 걸어 다니며 먹이를 찾기 때문에 습성에서도 다르다. 재두루미는 왜가리와 달리 나무 위에는 앉지 않는다. 왜가리와 백로는 네 번째 뒷발가락이 길어서 나뭇가지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나무 위에도 앉을 수 있고 둥지도 나무 위에 만든다. 또한 두루미는 발자국을 보면 뒷발가락이 퇴화하여 세 발가락 자국만 찍히고, 백로나 황새는 네 발가락 자국이 찍히므로 구별이 된다. 황로는 멀리서 보면 크기가 작아서 쇠백로와 비슷하지만, 여름깃이 어깨·가슴·머리 꼭대기에 오렌지색을 띠고 있어서 구별되는 새다. 가까이 보면 쇠백로는 부리가 검은색으로 보이고, 황로는 오렌지색으로 보인다. 다른 백로류와 함께 나무에 둥지를 만들며, 적은 수가 번식한다. 2. 황새 두루미는 황새와도 혼동하기 쉽다. 두루미처럼 날개 끝이 검고 키도 커서 생김이 비슷하지만, 황새는 눈 주변만 붉고 목은 희다. 다리 또한 붉은색이어서 검은색을 띤 두루미와 구별된다. 황새는 두껍고 긴 부리를 가진 큰 물새로 몸뚱이가 하얗고 날개 뒤의 반쪽은 검고 그 사이에 은회색 반점이 있다. 호반, 하구, 소택지, 논, 밭 등 넓은 범위의 습지대 물가에서 살며 혼자 혹은 두 마리 더러는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는 조용하고 경계심이 강한 새이다. 온몸의 길이는 112㎝이고, 편 날개 길이는 200㎝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이 황새를 백관白鸛, 부금負金, 흑구黑勼, 조근, 관조觀鳥, 한새, 항새, 참항새 등으로 불러왔다. 황새가 한국에서 예로부터 흔한 새였다는 것은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황새를 송단松檀 황새 또는 관학鸛鶴’이라 하여 그림과 자수 등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능히 알 수 있다. 황새는 우리 주변에 흔히 발견되는 백로와는 분류학적으로 매우 다르다. 게다가 두루미와는 분류학적으로 백로보다 더 멀다. 쉽게 말해 황새는 독수리와 오히려 가깝고, 두루미는 닭과 가깝다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표 2>. <표 2> 계통도 예부터 소나무 위에 앉은 학으로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새가 바로 두루미가 아니라 황새이다. 두루미는 나무에 앉는 법이 없으며, 둥지도 땅 위에 만들고 생활도 땅에서 주로 한다. 황새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미루나무, 느릅나무, 팽나무, 물푸레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등 주로 마을 가까운 곳에 홀로 선 큰 나무에서 새끼를 친다. 둥지는 5~20m에 이르는 키가 큰 나무의 가지 위에 있기도 하지만 주로 나무 꼭대기 골라 나뭇가지를 엉성하게 쌓아 올린 다음에 짚과 풀과 흙으로 굳혀 접시 모양의 큰 둥지를 튼다. 황새는 뒷발가락이 있어 나뭇가지를 움켜쥐거나 서 있을 수 있지만, 황새 역시 자주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뒷발가락이 그리 길지는 않다. 따라서 나무 위에 즐겨 앉지 않으며 번식을 할 때만 둥지를 만들어 앉는다. 유럽황새는 부리가 붉은색이지만 우리나라의 황새는 부리가 검은색이다. 임금새란 의미로 임금 황을 써서 황새라고도 한다. Ⅵ. 맺음말 민화는 지나간 과거의 그림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그림이다. 나무에 앉지 않는 대부분의 물새들은 뒷발가락이 짧거나 없다. 뒷발가락은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을 때는 매우 유용하다. 우리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겨울철새인 두루미는 뒷발가락이 매우 짧고 다리 위쪽에 붙어 있어 쉽게 걸을 수 있으나 나뭇가지에는 앉을 수가 없다. 대신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 두루미의 발자국을 보면 네 번째 뒷발가락이 퇴화하여 첫 번째 발가락부터 세 번째 발가락까지 세 발가락 자국만 찍히고, 백로나 황새는 네 발가락 자국이 찍히므로 구별이 된다. 현재 전 세계에 15종의 두루미 종류가 있다. 두루미는 두루미과에 속하며, 두 개의 아과(두루미아과와 관학아과)로 구성되어 있다. 관학아과에 속하는 두루미 종류는 유럽과 북미에서 지난 5천만 년 동안 서식하였다. 그중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서 서식하는 관학아과의 관머리두루미와 흰볼관머리두루미 2종만이 살아남았고 15종의 두루미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나무 위에서 잠을 잔다. 두루미는 습지나 논, 초원 등에서 서식을 하며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 위에 앉거나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나무 위에 앉거나 둥지를 트는 새는 백로, 황로, 왜가리, 황새와 같은 종들이다. 송학도의 학은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백로나 황새를 두루미로 착각했거나 임의로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소나무와 학을 하나의 화폭에 같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황새의 습성을 본디 땅 위에 둥지를 트는 학에 이입시켜 만든 것으로 학 본연의 생태와 무관한 문화적 언어로서 시대가 내려오면서 하나의 창작 문법으로 정착했던 것이다. 학이 천 년, 소나무가 백 년을 뜻하므로 학이 소나무에 올라앉은 그림은 학수송령도鶴壽松齡圖가 된다. 오래 사는 것들을 한데 모아서 구성하면서 이때 학이 소나무 위에서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문제 삼지 않았다. 소나무 위에 올라가 사는 새는 황새로 학과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 학수송령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이라야 되었던 것이다. 상서로운 기운으로 경사스러운 일을 바라는 길상吉祥, 장수를 축원, 부부가 해로하며 오래오래 살라는 동춘同春, 벼슬길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라,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더불어 누리라 등과 같은 좋은 의미를 갖는 그림에 소나무나 대나무, 바위나 바다물결, 구름 등과 함께 학이 자주 등장한다. 장우성의 송학도를 보면 학의 퇴화한 뒷발가락을 포함한 생태학적 특성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학의 생태학적 특성을 잘 알기 전에 좋은 의미만을 생각하며 그린 민화를 보면 소나무 위에 서 있는 학의 뒷발가락이 백로 등과 같이 길며 다리 위쪽에 붙어 있지 않고 바닥 평면에 닿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루미는 나무에 앉을 수 있는 백로나 황새와 형태가 비슷해 보이지만 분류학적으로 매우 다른 조류이며, 생태학적으로 나무에 앉을 수 없다. 그러나 학을 그 생태학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화적 언어로서의 민화 속 학을 이해한다면 우리 민화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본 원고작성을 위하여 도움을 주신 민화계 원로 巴人송규태 선생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최종태 명예교수님, 가회박물관 윤열수 관장님,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이우신 교수님, 학교법인 백강학원 최현규 이사장님,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조승호 명예교수님, 서울교육대학교 미술과 조용진 전 교수님,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정병모 교수님, 한국민화협회 송창수 부회장님, 국립공원관리공단 황보연 박사님, 한국물새네트워크 대표 이기섭 박사님, 예산황새공원 김수경 박사님,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정애 박사님,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장준구 박사님과 원고정리를 도와주신 국립암센터 김민정 선생님과 박서진 연구원님, 한국세포주연구재단 김해림연구원님 그리고 삼성미술관 Leeum에 감사드립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추워진 날씨에 감기 & 건강 조심 하세요. 💕 😘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