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월의 중순.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저번 주에도 시도를 했다. 이 세상과 멀어지는, 관계를 단절하는 그런 시도.
하지만 망할 하늘은 내게 세상과 함께하라는 접착제를 발라놓았는지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하늘에 대한 반항으로 학교에도 가지 않았고 학교에 가지 않은 채 벌써 4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맨 처음에는 나를 찾아오던 선생들도 이제는 포기했다는 듯 어떤 문자메세지도, 전화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내주는 녀석이 있다. 바보같은 년.
오늘은 방학식을 했다고 내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빨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당당히 입학했던,
빨간 머리를 빨간 피로 물들이려 했던 나를 기억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
그리고 오늘, 내 머리카락이 아닌 내 몸을 모두 붉게 만들려고 하는 날.
“기억되고 있다는 건, 꽤 귀찮은 일이군.”
어차피 학교와는 인연을 끊은지 4달이 지났는데, 그 아이는 귀찮게 왜 자꾸…….
휴대폰을 충전하지 못해 ‘배터리가 없어 자동으로 꺼집니다’라는 메세지를 남기고는
내 휴대폰의 액정은 새까매졌다. 휴대폰을 충전하려면 아무도 날 반기지 않는 집으로 가거나
휴대폰 대리점으로 가서 돈을 내고 충전해야 한다. 하지만 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고,
더군다나 돈도 없었다. 아, 주머니에 들어 있는 70원이라는 동전 빼고.
어쩌면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지. 문자를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익숙해진 그 아이의 번호.
근처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전화를 받았다.
방학식을 해선지 밝은 아이의 목소리. 나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처럼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여보세요.”
“안녕.”
“누구……. 아! 앤!”
앤이라니, 도데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앤이라는 애가 학교라는 곳에 있었나?
난 아무래도 학교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앤이라니. 이름 참 괴상하군.
“앤이라니?”
“지금 어디야? 내가 거기로 갈게.”
오케이. 내가 원하던 말이야. 그리고 올 때는 돈을 가지고 와. 알았지?
“패밀리마트 앞이야.”
“응? 화진청과 옆에 있는?”
“응.”
삐삑. 얼마 통화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보다. 더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야겠지.
앤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말했다. 그러면 오랜만에 그 바보를 만나는 거.
“빨리 와.”
“응.”
전화는 뚝 끊겨버렸고 나는 공중전화에서 나와 패밀리마트 앞으로 나왔다.
그 아이는 벌써 패밀리마트 앞에 나와있었고 나를 보고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방학식을 했다고 사복으로 갈아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교복을 입고 있었다. 불편하지도 않나.
하긴, 중학교 때 입었던 교복은 편했지.
“앤, 왔구나!”
“…앤이라고?”
“아, 너 머리가 빨간색이잖아! 그래서 애들이 그렇게 불러. 빨간머리 앤이라고.”
빨간머리 앤…. 그래. 적어도 내 이름보다는 앤이라는 게 낫겠구나. 내 존재를 각인시켜버리는
이 희진이라는 이름보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 이름이 뭐였지?
“너, 이름이 뭐야?”
“응……, 내 이름 몰라?”
미안해, 하지만 난 너가 바로같다는 것만 알 뿐이지, 네 이름에까지는 관심이 없어.
지금 내가 네 이름을 알려고 하는 이유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일 뿐이야.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그 아이는
“응, 내 이름은 김 다솜이야.”
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김 다솜.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역시 학교에 가지 않으면 모르게 되는 걸까.
“왜 나온거야?”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냥, 네가 전화해 줬다는 게 기뻐서.”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내가 자기를 무슨 의도로 불러내는지 그런 이유를 알면서도
바보같이 문제아인 나와 어울리려 하는 김 다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저기, 너 돈 있어?”
끄덕끄덕.
“얼마 정도?”
“…삼만원 정도.”
부자구나. 너는. 김 다솜은.
“왜, 빌려 줄까?”
“응.”
김 다솜은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꼭 쥐어진 김다솜의 손에서 나온 건
조그만한 커터칼, 테이프, 실 그리고 내가 김 다솜을 찾은 이유인 돈.
내게 돈을 건내는 김다솜의 손목에는 데일밴드와 반창고 여럿이 나란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동맥이 지나가는 곳이라서 잘못 건드리면 죽는다는 그 곳.
자살 시도니? 나와 같은 처지? 아니면 왕따?
그래도, ……이제 너를 생각해줄 시간따윈 없어.
“자, 여기 있어.”
“응, 땡큐. 잘 받았어. 나중에 갚을게.”
……앞으로 날 만날 일도 없겠지만.
“응……. 잘 가.”
그렇게 나는 그 아이가 나에게 건내준 삼만원을 손에 꽉 쥐고 생각했다. 만원을 내고 휴대폰을 충전하고
나머지 이만원으로는 싼 모텔에 들어가서 어제 친구 집에서 가져온 식칼로…….
“저기, 희진아!”
그 아이가 날 불렀다. 김 다솜이라는 아이가. 내가 죽을 만큼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
……내 이름을 불렀다.
날,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몸서리가 쳐진다. 화가 난다. 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 죽었는데.
이 희진은, 죽었는데. 왜 도데체 이 희진이라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거야.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그 아이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김 다솜.
김 다솜. 너는 내게 뭐가 미안한지 알고 미안하다고 하는 거니.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희진아. 죽지 마. 죽으면 안돼. 죽으면…….”
……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제기랄. 나 왜 우는건데.
영화에서 보니까 이럴 때 비가 오던데. 왜 비는 꼭 필요할때 안 오고 지랄이래. 하하. 하하하...
눈물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버리고 그 아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나는 이미 죽었어.”
나는, 이미 죽었다.
그 말에 김 다솜은 웃었다. 환하게. 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
휴대폰을 충전하고 계획대로 모텔에 왔다.
그리고 가방에서 식칼을 꺼내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죽고싶은 마음이 생기지를 않았다.
……김 다솜. 그 아이 때문이다. 그 아이가 내 죽음을 방해했다.
그 아이가 내가 할수 있는 마지막 행복의 시도를 막아 놓았다.
“제기랄.”
오늘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되었을까. 그러면 투신자살 해서 죽었을 지도 몰라.
그런 게 오히려 더 좋았을 지도. 이 상태로라면 나는 이 썩어빠진 삶에서 계속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바보]
……. 그 아이. 김 다솜이다. 이제 이름을 알았으니 김 다솜이라고 바꿔줄까.
아니. 그 아이도 자살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자기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아이가 학교 아이들이 날 앤이라고 부른다고 했던 것처럼. 그런 것처럼.
“여보세요.”
“저, 김 다솜씨 친구분 되시나요?”
……친구.
“그런데요.”
“김 다솜씨가 지금 병원에 와 있거든요. 샛돌병원. 와 주실 수 있으세요?”
병원. 무슨 병원. 그 아이, 아파 보이지는 않던데.
난 바빠. 난 오늘 죽어야 한단 말이야. 이 세상과 관계가 단절되어야 한단 말이야.
“왜요, 저 바쁜데요.”
“저……. 사망하신 것 같은데. 손목을 그으신 걸로 봐서 자살로 추정이 되는데. 혹시 평소에도……”
탁. 내가 끊어버렸다. 지금쯤 내게 전화를 한 사람은 여보세요! 하며 열을 내고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살. 오늘 내게 보여준 커터칼. 그게 네가 세상과 단절할 수 있게 한 물건이니.
넌 정말 죽어버렸니? 진짜? 정말이야? 제기랄.
……김 다솜. 나보고는, 죽지 말아 달라고 해 놓고.
첫댓글 다솜이가 왜 죽었을까....
...고러게요. 왜 죽었을까요. 아마 희진이처럼 살기 싫어서일지도... 헤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희진보고는 죽지 말라고 할 정도면, 아주 심성이 고운 아이인가봐요. 보통은 같이죽자, 이러고 물귀신처럼 늘어지는 사람도 많은데;;;;
휴ㅡ다솜아!!(어서반말을..)
에헤헤. 반말 쓰셔도 되어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솜이불쌍행
....고런가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