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환장고개를 올라서자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 온통 은빛 억새꽃 군락이 끝없이 펼쳐졌다. 화왕산(756.6m) 십리 억새평원에는 부드러운 바람에도 몸을 뉘었다 일어서는 솜털 같은 은빛 꽃의 출렁임이 새삼 깊어진 가을을 느끼게 한다.
지난 겨울 억새를 태워 올 가을에는 억새가 더욱 무성해졌다. 5만6천평에 이르는 드넓은 억새평원과 그 둘레를 감싸고 있는 2.4㎞의 화왕산성 성벽길에는 가을의 바다로 나선 가을 나그네들의 하얀 여행이 꼬리를 물고 있다. 모두 억새꽃 사이를 누비며 사진을 찍거나 풍성한 억새꽃을 한 아름 안고 가을의 추억을 담기에 바쁘다.
해가 지자 은빛 평원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어른키보다 훨씬 높은 무성한 억새밭으로 걸어가자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긴다.
“스쳐간 날들이 일어서서/ 하늘 향해 손사래 치며 웅웅거린다./ 더러는 아쉬움으로/ 더러는 애잔함으로/ 눈우물 가득 고이는 하늘을 품고/ 미련 한 자락 감아 안는다./ 먼길 걸어/ 다리 풀고 앉는 억새꽃 숲에/ 흰머리 너풀대는 세월들이/ 서걱서걱 소리 내며 허리를 푼다.…”(이시은의 ‘억새꽃’)
화왕산은 옛날에 화산 활동이 활발해 불뫼, 큰불뫼로 부르기도 했다. 왜적을 무찔러 화왕산성을 굳게 지킨 홍의장군 곽재우의 충혼과 기개가 어린 곳이기도 하다. 불의 산답게 불기운이 있어야 풍년이 들고 평안하다 해서 1995년부터 억새 태우기 축제를 열고 있다.
하산길에 문득 누구보다도 화왕산을 사랑했던 화왕산 지킴이 하도암(57)씨가 생각나 자하계곡 아래 첫집 화왕산장(불임금묏집)을 찾았다. 그는 지금의 지명인 ‘火旺山’이 일본인의 음모로 ‘火王山’으로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10년만에 해후한 산인은 올 2월부터 후두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항암치료로 탐스러웠던 꽁지머리는 다 빠지고 부기가 오르고 쉰 목소리의 중늙은이에서 예전의 눈빛 형형하고 날렵했던 모습을 찾지 못해 한동안 망설였다. 그와 더불어 후배가 보냈다는 전어젓을 안주 삼아 막걸리 몇잔으로 회포를 푼 뒤 화왕산을 떠났다.
이튿날 어스름 새벽에 이방면 안리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자연내륙습지인 우포를 찾아갔다. 우포늪과 목포늪, 사지포늪, 쪽지벌 등 늪지 4개로 이뤄진 우포는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에 걸쳐 있으며 총 면적이 70만 평에 이른다. 10여m 높이의 대대제방에 올라서자 1억4000만년 전 한반도의 생성과 함께 태어났다는 우포늪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이미 동이 터 태고적인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의 장관인 물안개를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왕버들이 우거진 물가에는 일찍 잠에서 깬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들이 생이가래와 마름, 개구리밥 등 물풀을 헤치며 부지런히 먹이를 잡고 있다.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는 왜가리의 모습도 보인다. 겨울에는 시베리아 등 북극 지방에서 황새와 노랑부리저어새, 고니 등이 날아들며, 가창오리의 화려한 군무가 펼쳐진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는 계절에도 우포늪은 또 다른 생명을 품는다.
창녕/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
||||||
|
첫댓글 좋은 정보 스크랩해 갑니다^^
잘보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