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생
경기여고, 이화여대 약대 졸업
1986년 미국 센추리 플라자호텔 매니저
1995년 살로먼스미스바니 파이낸셜 어드바이저
2006년 UBS파이낸셜서비스
아메리카 수석부사장
복잡한 명함을 한참 들여다보고 탐문한 결과 UBS파이낸셜서비스 미국법인의 자산관리그룹 수석부사장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금융전문 어드바이저만 전 세계적으로 1만1200여 명에 이르는 이 그룹에서 ‘First VP’는 5% 정도 된다고 한다. 제니 주가 바로 그중 한 명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동네인 베벌리힐스의 로데오 드라이브 앞 UBS 건물에 한국 사람은 제니 주와 그의 동료 5명뿐이다. 미국인 한 명을 포함, 총 6명으로 구성된 그의 팀은 UBS 베벌리힐스 지점 팀 중 단연 1등이라고 했다.
“150명의 자산관리사가 근무하고 있지만 운용하는 자산 규모나 성과, 고객만족도 등에서 우리 팀은 줄곧 1위”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관리하는 자산 규모는 5억 달러 정도. 고객 대부분은 1000만 달러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객이 만족할 만한 자산관리를 하려면 규모가 일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얘기다. 당장 눈에 보이는 수수료 때문에 모든 고객을 다 데려가려고 하면 제대로 된 서비스가 안 된다는 것.
고객 중 세계적 거물 많아
그는 “우리는 돈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돈은 우리 일의 부산물”이라고 밝혔다. 부자들 돈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쉽게 이해가 안 됐다.
“눈에 보이는 돈을 위해서 일하면 더 큰돈을 잃습니다. 정말 일을 즐기고, 우리 고객의 생활에 도움 주는 일을 즐기면 비즈니스는 따라오죠.”
고르고 고른 그의 고객은 어떤 사람들일까? 제니는 “이름만 말하면 알 만한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이름만 말해 달라고 요청하니 이름만 빼고 얘기해 줬다. 고객 프라이버시 때문이다.
그중에는 한국 사람도 있다고 했다. LA의 교포 사업가뿐 아니라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해외에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몇 명 포함된 모양이다.
베벌리힐스에서 최고급 레스토랑 소유자나 팝가수 라이오넬 리치 등 미국 최고의 연예인을 담당하는 변호사, 세계적인 가전업체의 전직 CEO, 최고급 호텔 지배인, 스웨덴 선박회사의 회장, 심지어 베벌리힐스의 게이, 레즈비언 클럽 회장까지도 그의 고객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금융계의 자산관리 서비스에 대해 “제대로 된 자산관리 서비스를 하려면 돈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생활(lifestyle)을 관리해 주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일반 고객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는 부자를 위한 서비스가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UBS 자산관리 부문에는 와이너리(와인농장)를 사고파는 와인 뱅킹, 미술품을 사고파는 아트 뱅킹, 블랙스톤·칼라일 등 세계적 사모펀드와 함께하는 투자 등이 있다. 심지어 자가용 비행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비행기 구입 파이낸싱도 해준다.
그는 “부의 역사에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 부자들은 인생 전반의 풍요(wealth)를 중시하는 반면 한국 부자들은 아직도 경제적 재물(riches)에 편중된 것 같다”면서 “부유한 재산뿐 아니라 정신적 안정, 사회적 존경 등이 함께 갖춰져야 진짜 부자”라고 말했다.
사실 제니는 대학까지 한국에서 나왔고,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고, 동양인에다 홀로 두 딸을 키우는 여자다.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 미국이라 하더라도 베벌리힐스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평균 이상은 아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세계 최고 부자들이 모여있는 베벌리힐스에서 최고 자산관리 전문가가 되었을까?
1955년생인 제니는 어렸을 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부도 곧잘 해 경기여고,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했다. 당시로선 최고의 신붓감인 셈이었다. 최고의 신붓감 답게 졸업 후 그는 전도유망한 공무원과 결혼했다.
두 딸을 낳고 조용히 살던 그에게 아웅산 테러라는 불행이 닥쳤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수행하던 남편은 그렇게 비명횡사 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바뀐다.
한국에서 잠시 직장을 다니기도 했지만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도전을 할 바에야 큰 물에서 해보고 싶었다. 1986년 호텔에서 첫 직장을 잡았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패턴화한다. 호텔리어로 일하면서 UCLA 호텔매니지먼트 코스를 이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맡은 컨벤션 사업에서 발군의 성과를 보였다.
그는 경쟁호텔 고객까지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만났다. “될 걸 알면서 만나는 건 누구나 하죠. 안 될 사람을 만나 고객으로 만들어야 남과 다른 성과를 내는 거 아니겠어요?”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회사 고객을 자기의 고객으로 만들었다. 그가 일한 센추리 플라자 호텔의 고객들은 대부분 제니 주의 고객으로 바뀌었다.
이런 사교력과 네트워크 덕에 그는 95년에 투자은행인 살로먼스미스바니의 재무상담사(financial advisor)로 자리를 옮겼다. “호텔리어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은행으로 옮기느냐”는 질문에 “왜 그게 이상하냐”고 되물었다.
그는 “당시 내 주변에는 큰 고객이 많았다”고 말했다. 보통사람들이 벽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는 도약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옮긴 직장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물론 이때도 주경야독은 계속됐다.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퍼모나(pemona)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것. 약대를 졸업해 약사자격증이 있는 그는 호텔경영학을 수료하고, 이제는 경영학 석사에 이르렀다.
이석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