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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이널에 브롱이가 파이널 MVP받을때 왠 덩치 크시고 인상좋으신 할아버지가 주지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보니~?
제가 좀 무지해서... 빌러셀옹인지 몰랐거든요;;;ㅡㅡ 그 분의 위대함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찾아보니 머 더욱 대단하신 분이시더군요~...~
파이널 MVP트로피 이름도 그분의 이름이 있으니 엄청나신 분인거 같아요~
아래글은 어느 블로그에서 좀 퍼왔는데 좋은 내용 같아서 같이 넣어봤어요.
http://blog.naver.com/sundanceguy/20062115089
<빌 러셀과 아워백; 보스턴의 전설>
[전설의 조건]
11번의 우승은 필 잭슨의 9번 보다 많은 것이다. 선수겸 감독으로 거둔 2번의 우승은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다. 마이클 조던과 같은 5번의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역사상 4명밖에 없는 NCAA 대학 농구를 우승하고 바로 이듬 해 NBA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선수이다. NBA 명예의 전당은 물론, NCAA 명예의 전당, 국제 농구 연맹 명예의 전당에까지 헌액되어 있다. 누군지 짐작이 가는가?
2009년 2월 14일, 농구팬들에게는 발렌타인 데이보다는 NBA의 All-Star Game의 전야제로 인식되어있는 이 날, NBA는 중대 발표를 했다. 앞으로 NBA Final의 시리즈 MVP에게 주는 트로피의 이름을 Bill Russell NBA Final MVP Trophy라고 명명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발표였다. 이제 팀을 NBA에서 우승시킨 가장 훌륭한 선수는 ‘빌 러셀 트로피’를 받게되는 것이다. 대체 빌 러셀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이길래 이렇게 전 농구계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일까?
07’/08’시즌 보스턴 셀틱스가 가장 우승 가능성이 높은 팀이 되자마자 보스턴 셀틱스의 삼총사 만큼이나 주목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빌 러셀이다. 보스턴 셀틱스 뿐만 아니라 NBA조차 All-Star Game에 그를 초청하는 등 보스턴의 전설이 보스턴의 왕좌 탈환 시즌과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 콧대 높은 케빈 가넷 조차도 빌 러셀이 나타나면 한번도 앉은 상태로 그를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빌 러셀이 농구장에 나타나면 모든 농구 인사들은 자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한다. 그는 농구의 걸어다니는 전설이다.
<나는 윌트에게 진다, 하지만 시합은 보스턴이 이긴다>
[시합을 이기는 방법]
가장 성공한 농구만화로 꼽히는 ‘슬램덩크’를 보면, 북산고 주장 채치수의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나는 신현철한테 진다. 하지만 북산은 산왕에게 지지 않는다.’ 아마 이 대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NBA 선수가 바로 빌 러셀이라고 생각한다. 빌 러셀은 커리어 20-10을 기록한 선수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이 20-10이 우리가 생각하는 평균 20득점 이상 평균 10리바운드 이상이 아니라 그 반대인 평균 20리바운드 이상에 평균 10득점 이상이라는 것이다. 빌 러셀은 철저한 수비지향 선수였다.
빌 러셀의 최대 라이벌로 꼽히는 선수가 바로 윌트 챔버레인인데, 이 둘의 대결은 최고의 공격형 센터와 최고의 수비형 센터의 대결로 묘사되곤 한다. NBA 역사상 평균 리바운드가 20개 이상인 선수는 단 2명, 바로 윌트 챔버레인과 빌 러셀이다. 물론 윌트 챔버레인이 1위이고 빌 러셀이 2위이다. 통산 리바운드 숫자가 2만개가 넘는 선수도 단 두명. 이 역시 윌트 챔버레인이 1위이고 빌 러셀이 2위이다. 한 게임 최다 리바운드는 윌트 챔버레인의 55개이며 그 바로 뒤가 빌 러셀의 51개이다. 물론 5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한 선수도 윌트와 러셀 단 둘 뿐이다.
<보스턴 최후의 보루 빌 러셀>
이 세기의 라이벌은 필라델피아와 보스턴 소속으로 매년 플래이오프에서 마주쳐야하는 악연을 이어가게 된다. 61’/62’시즌 챔버레인은 한 경기에 100점 이상을 득점하는 능력을 보여주면서 한 시즌 평균 득점 50.36점이라는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시즌을 끝낸다. 빌 러셀의 평균 득점은 18.9점으로 그의 커리어 하이였다. 하지만 이 시즌의 MVP는 빌 러셀이었으며 NBA 우승팀 역시 필라델피아가 아닌 보스턴 셀틱스였다.
커리어 30-20 선수인 윌트 챔버레인은 분명 빌 러셀과의 라이벌 대결의 승자였다. 적어도 둘만의 대결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데뷔와 동시에 신인왕과 MVP를 동시 수상한 윌트 챔버레인이 15시즌 동안 2번의 NBA우승과 4번의 MVP 타이틀을 따낸 반면, 빌 러셀은 13시즌 동안 11번의 NBA 우승과 5번의 MVP를 수상했다.
채치수의 말처럼 신현철은 채치수를 이겼다. 하지만 시합은 북산의 승리였다.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이 만나면 언제나 윌트 챔버레인의 승리였다. 하지만, 시합은 언제나 보스턴이 이겼다.
<빌 러셀과 톰 헤인손>
[진정한 리더]
보스턴을 8연패의 팀으로 만든 레드 아워벅은 65’/66’시즌 이후 은퇴를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 중에서 그의 후계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처음 부탁했던 프랭크 램시와 밥 쿠지는 모두 난처함을 표하며 그의 거절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리고 아워벅이 세번째로 찾아간 톰 헤인손 또한 거절하는데, 거절의 이유는 빌 러셀을 다룰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톰 헤인손은 자신의 거절의 이유였던 빌 러셀을 차기 감독으로 추천한다. 바로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최초의 흑인 감독이자 감독 및 선수로 뛴 66’/67’시즌은 그가 처음으로 윌트 챔버레인에게 팀의 패배를 허용한 시즌이기도 하다. 동부 Final에서 만난 필라델피아는 보스턴을 4승 1패로 쉽게 물리치고 NBA Final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 시즌 빌 러셀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게 된 이유는 빌 러셀이 패배 직후 바로 윌트 채임벌린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것을 포함해서(리그 8연패를 하던 보스턴을 첫 흑인 감독으로서 이끌었던 빌 러셀이 리그 9연패를 실패했다는 부담감을 생각했을 때, 게임 직후 빌 러셀이 보인 반응은 놀라운 일이었다.), 보스턴이 필라델피아에게 1승 4패로 지고나서 탈락이 확정된 그 게임 후에 보스턴의 라커룸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시합 후, 보스턴 라커룸에서는 백인 선수였던 존 하블리섹이 흑인 선수인 샘 존스에게 먼저 샤워를 하도록 양보한 뒤, 샘 존스가 샤워하기를 기다린 후 자신도 샤워를 마친 것은 물론, 샤워 후 두 선수가 나란히 앉아서 시합의 문제점에 대해서 토론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아직, 흑인 선수들이 원정길에 호텔이나 식당에서 쫒겨나는 일이 많았던 시절에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빌 러셀 하의 셀틱스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러셀 앞에만 서면 언제나 착한 소년이 되는 K.G>
그 이듬해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은 다시 플래이오프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중간에 마틴 루터 킹의 살해 사건이 일어나면서 자연스레 연기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시리즈에서 빌 러셀은 3,4 차전의 윌트 챔버레인의 상대로 자신이 아닌 웨인 엠브리를 내보내면서 혹시 이제 윌트 챔버레인을 두려워 하는게 아니냐는 소문을 일으키게 된다. 4차전이 끝난 뒤, 1승 3패로 뒤쳐져있던 보스턴은 5차전과 6차전을 내리 이기면서 3승 3패로 시리즈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펼처진 7차전에서 빌 러셀은 후반 내내 윌트 챔버레인을 단 2번의 슛 시도로 막아버리면서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며 NBA 역사상 처음으로 1승 3패에서 4승 3패로 시리즈를 역전시킨 팀이 되게 된다. 물론 최초의 NBA 우승 흑인 감독이자, 선수겸 감독으로 우승한 최소의 선수겸 감독이기도 했다.
빌 러셀은 일명 ‘block shoot introduced by Bill Russell’이라고도 소개될 정도로 블럭 샷을 잘했지만, 안타깝게도 블럭 샷이 하나의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의 블럭 샨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최고의 수비 스페셜 리스트 였던 것과 지금 자료화면이 남아있는 주요 시합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블럭 샷을 하는 것을 봤을 때, 만약 그 기록이 남아있다면 NBA 역대 1위 정도의 수준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나는 시합에 임하면서 상대 선수의 모든 슛을 블로킹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요점은 모든 슛을 블로킹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모든 슛을 블로킹할거라는 생각을 하게하는 것이다.” –빌 러셀-
<조금 더 자주 보스턴에 나타나기 시작한 러셀>
[Felton X 그리고 세상과의 화해]
빌 러셀은 스스로 자신이 엄청난 차별을 받으면서 농구를 했다고 믿었었다. 1958년 오프시즌에 진행되어진 All-Star 투어 도중 빌 러셀과 다른 흑인 선수들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한 호텔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쫒겨났다. 61’/62’시즌의 시범경기에서는 빌 러셀이 레스토랑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며, 켄터키 주의 렉싱턴이란 도시에서 시합 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인종 차별에 대해서 환멸을 느꼈고, 이는 그가 인종차별 시장이라고 믿었던 보스턴과의 사이가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였는데, 가장 큰 사건은 68’/69’ 시즌에 일어났다. 7차전까지 간 끝에 LA에서 레이커스를 물리치고 리그 2연패에 성공한 셀틱스가 보스턴으로 금의환향했을 때 빌 러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를 통해서 그가 보스턴에서 선수 은퇴 및 감독직도 내놓겠다는 발표를 한다. 환영 행사장의 3만 팬들은 물론 보스턴의 모든 팬들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의 성공을 도와주었으며, 그를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될 수 있도록 힘써준 백인 아워벅에게조차 아무말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그의 No.6가 보스턴 셀틱스에서 영구 결번이 되는 행사장에조차 나타나지 않았으며, 1975년 행해진 그의 명예의 전당 헌액 행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와 보스턴 그리고 그와 세상간에 만들어진 감정의 골은 너무나 깊은 것처럼 보였다.
<a.k.a 울보 폴; 빌 러셀의 품에 안기다>
1999년 보스턴 셀틱스 측은, 빌 러셀에게 새롭게 오픈한 TD Banknorth Garden에서 빌 러셀의 No.6 영구 결번식을 다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삼고초려 끝에 어렵게 빌 러셀의 허락을 받아낸다. 1999년 5월 6일 열린 이 영구 결번식에는 백인 래리 버드와 카림 압둘 자바 그리고 선수 시절 말년의 불화로 30년 넘게 서로 대화를 안했다던 라이벌 윌트 채임벌린까지 찾아와 빌 러셀을 축하해 주었다. 윌트 채임벌린은 같은 해 10월 12일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자식들에 따르면 그의 유서에 빌 러셀의 이름이 두번째로 죽음을 알려야 될 사람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는 득점도 제대로 못하는 어떤 대학도 원하지 않던 센터였다. 하지만 그는 득점도 못하는 센터로서 샌프란시스코 대학을 2년 연속 NCAA 챔피언의 자리에 올렸다. 그는 한번도 평균 득점 20점을 해보지 못한 선수였다. 하지만 NBA는 그 어떤 선수의 득점력보다 그의 블럭 샷을 더 두려워했다. 그는 단 한번도 선수로서 윌트 챔버레인을 이겨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팀 보스턴은 언제나 승리했다. 자신은 최고가 못되더라도 팀을 최고로 만드는 리더,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은 빌러셀 옹의 커리어 평균 스탯이랍니다~... 리바가 후덜덜하네요;;;
<나는 윌트에게 진다, 하지만 시합은 보스턴이 이긴다> 정말 멋진 말이네요~^^
첫댓글 좋은글 잘보고 가용,
빌러셀이 르브론에게 트로피 줄때 보니 키가 비슷하던데...그럼 르브론 키도 206cm 이상?
와...리바 정말. 마지막 시즌 아깝네요. 전 시즌 더블더블 아깝게 놓치네요.
빌 러셀의 블락은 단순 숫자만이 아니라 그 퀄리티 또한 엄청났다고 하죠. 그냥 쳐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팀 동료의 위치등을 파악해서 쳐내는 수준의 블락이었다고 합니다.
프리스타일 게임 하시나요....;;
자기 팀원들방향으로 쳐내는수준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러셀은 하워드처럼 힘으로 쳐서 공을 라인밖까지 날려버리는 블락보다는 타이밍을 맞춰서 살짝 쳐내는 블락이었기때문에 공격권을 바로 가져오는 블락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영상에서 블락 강의하는 걸 봤는데, '공을 노리고 치지 말고, 슛하는 경로를 훑어내라'라고 강의하시더군요.. 블락의 신입니다 정말 ㄷㄷ
.... 차트에서 글씨는 안보고 숫자만 봤는데 리바수치보고 처음에 득점수친줄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