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백마고지
1952년 10월 15일, 마침내 중공군(中共軍) 제38군(서방의 군단급 편제)은 패배(敗北)를 인정(認定)하며 수건을 던졌습니다.
철원 북방(鐵原北方)에 위치한 395고지를 놓고 열흘 동안 제9사단과 치열(熾烈)한 격전(激戰)을 벌였지만,
더 이상의 손실(損失)을 감당(勘當)할 수 없어 굴복(屈伏)한 것이었습니다.
무려 12번이나 고지(高地)의 주인(主人)이 바뀐 이 싸움에서 9사단도 엄청난 피해(被害)를 입었으나 인내심(忍耐心)이 좀 더 강했습니다.
↑고지전에서 사살된 엄청난 중공군 시신
↑지난달 28일 백마고지 395고지 정상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 추정 유해.
국방부 제공
바로 한국전쟁(韓國戰爭) 당시 벌어졌던 모든 고지전(高地戰)을 상징(象徵)하는 대명사(代名詞)가 되다시피 한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입니다.
능선(稜線) 모양이 말(馬)과 비슷하다고 해서 무명(無名)의 395고지는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되었고 대승(大勝)을 이끈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榮光)된 호칭(呼稱)을 얻었습니다.
반면 중공군 38군은 병력(兵力)의 절반 이상이 손실(損失) 당하며 부대(部隊)가 와해(瓦解) 될 정도의 타격(打擊)을 입었습니다.
↑격전 전 촬영된 395고지.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됩니다
이로써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세(攻勢)는 중단되었지만 그렇다고 미련까지 완전히 거두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1개 군단(軍團)이 와해(瓦解) 될 정도의 참혹(慘酷)한 피해(被害)를 입고도 복수(復讐)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휴전(休戰)이 이루어질 것 같았기에 더 이상 대규모 군사 행동을 취(取)하기는 곤란(困難)한 상황(狀況)이었습니다.
↑산등성이에 구축된 중공군 포대
때문에 전선(戰線)은 양측 모두 위력 수색(威力守賾) 정도의 소규모(小規模) 작전만 벌이며 소강상태(小康狀態)에 빠진 형국(形局)이 되었고 백마고지 전투를 끝으로 치열(熾烈)했던 대규모(大規模)의 고지전(高地戰)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상(豫想)과 달리 판문점(板門店)에서 벌어지는 휴전 회담(休戰會談)은 타결(妥結)될 듯 타결될 듯하다가 휴회(休會)와 정회(停會)를 반복(反復)하며 앞날을 예상하기 힘들만큼 난항(難航)을 겪고 있었습니다.
↑ 휴전 회담은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1953년 여름이 되자 중공군(中共軍)은 언제 성사(成事)될지도 모르는 휴전(休戰)과 별개(別個)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당한 수모(受侮)를 갚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두고두고 치욕(恥辱)스럽게 생각할 만큼 당시에 당한 아픔이 너무 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피로써 백마고지를 차지(借地)한 아군(我軍)의 대응(對應)도 철저(徹底)하였기에 고지 부근은 철옹성(鐵瓮城)으로 바뀌었습니다.
↑아군도 중공군의 재공격에 대비해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만일 이 상태(狀態)에서 다시 공격(攻擊)을 감행(敢行)한다면 중공군의 피해(被害)만 늘어날 것은 확실(確實)했습니다.
지난 전황(戰況)을 면밀히 분석(分析)한 중공군은 '병력(兵力)의 우위(優位)만 앞세워 너무 정면(正面)으로만 파고들다가 유엔군의 화력(火力)에 걸려서 된통 당하고 그 상태에서 적시(摘示)에 증원(增員)된 국군의 반격(反擊)에 밀린 것'이라고 결론(結論)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써야 했습니다.
↑유엔군의 화력은 공산군이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었습니다
유엔군의 화력(火力)은 도저히 극복(克復)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障壁)이다 보니 증원(增員)을 차단(遮斷)시키는 것에 초점(焦點)이 맞추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격(砲擊)과 폭격(爆擊)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고지(高地)를 점령(占領)하는 것은 보병(步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측면(側面)을 먼저 확보(確保)하여 후방(後方)에서 백마고지로 향하는 통로(通路)를 제압(制壓)한 후 공격을 감행(敢行)하기로 했습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관계자들이 11일 오전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 안 우리쪽 지역인 화살머리고지일대에서 발굴된 유엔군 추정 전사자 유해 위에 유엔기를 덮은 뒤례하고 있다.
철원/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백마고지 서남측의 화살머리고지가 다음 격전 장소로 예정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목(注目)한 곳은 백마고지에서 서남(西南)쪽 3km 부근에 위치(位置)한 화살머리고지였습니다.
지리적(地理的)으로 백마고지 보다 남쪽에 위치한 해발 281m의 이곳을 중공군이 점령(占領)한다면 백마고지 좌측 방(左側方)으로 국군이 증원(增員)되는 것을 차단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중공군이 화살머리고지에 대해 주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