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리 시간에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동고서저".
그 동고서저의 험난한 산줄기를 동서로 관통하여 가로질러 가는 태백선.
진정한 산악철도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생생히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제천에서 출발한 열차가 영월역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악철도의 관문에 들어오고,
수리재 고갯길을 넘어 '자미원역'에 들어섬으로서 태백산맥의 서쪽 고지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는 저 밑에서 올라오는 정선선과 합류해 855m 높이의 추전역을 정점으로 다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러고는 영동선과 합류해 태백의 끄트머리인 통리역을 지나면,
무려 도계까지 400m나 되는 고도차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경사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간다.
자미원이 백두대간의 서쪽 관문이라면, 통리는 백두대간의 동쪽 관문인 셈이다.
실제로 통리역 바로 북쪽은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통리 바로 다음 동네인 도계와는 무려 남산 두 배 높이인 400m의 고도차가 난다.
영동고속도로의 "횡계"와 대비되는 곳이 바로 태백의 통리인 셈이다.
급경사길을 향해 내려가려는 열차에게는 지옥의 시작점이자,
급경사길을 힘겹게 올라온 열차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통리역.
통리역만큼 지리적으로 강한 임팩트를 지닌 역은 어떤 곳을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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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내를 순환하는 태백의 마스코트 버스가 통리역에서 일행을 내려주고 제 갈 길을 간다.
역 주변이 의외로 마을 규모가 제법 있는 편이라 버스가 가는 길에는 택시들까지 주욱 늘어서 있다.
이 곳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겐 그저 "험난한 고갯길의 시작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그런 역이었다.
하지만 막상 방문해 보니 의외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10분 이내 간격으로 수시로 다니는 버스, 역 앞에 죽 늘어선 택시, 역 안을 꽉 메운 사람들까지...
정차하는 열차도 별로 되지 않는 간이역임에도 첫인상이 아주 인상 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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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어느정도 활기를 띄면서도 한적하고 조용한 곳.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이상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적어도 초면에 느껴지는 인상은 그렇다. 조용하면서 활기가 있는 특유의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통리역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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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방면으로는 전 열차가 정차하지만 서울로 가는 열차는 그다지 많은 편 수가 정차하는 역은 아니다.
아직까지 열차를 전부 세우기엔 그만큼의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나보다.
다행히 도계, 삼척, 동해,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자주 운행하기 때문에,
통리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교통의 수혜를 크게 입는 편이다.
태백에서 강릉을 향해 내려가는 급경사길의 시작점으로,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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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예상보다 이용객이 제법 있는 편이다.
동네를 온통 둘러봐도 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 찾기 힘든데,
역 안은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가득 차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진다.
사람 하나 없는 썰렁한 동네, 사람으로 가득차 수다소리가 끊이질 않는 역 안...
태백에서는 절대로 낮설지 않은 익숙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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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소의 기형적인 돌들을 형상화 한 것일까? 독특한 모양의 갖가지 돌들이 역 한켠에 전시되어 있다.
한강과 낙동강이 동시에 발원하는 중요한 수계에 위치한 지역이기에,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돌들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흔지 않은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통리역 한 켠의 조그만 돌들이 마치 태백의 여러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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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역'을 상징하는 가장 큰 존재, 인클라인.
해발고도 700m의 통리와 해발고도 300m의 도계의 고도차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경사의 강삭철도를 일제시대 때 만들었다.
얼마나 경사가 급한지 열차가 제 힘으로 올라갈 수 없어 저 밑의 심포리라는 곳에서 기관차, 객차, 화차를 전부 분리해
로프를 이용해 400m 고지 위로 끌어올려, 통리역에서 다시 기관차, 객차, 화차를 연결했다.
열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심포리에서 내려 통리까지 험난한 경사길을 힘겹게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고 한다.
이런 원시적인 방식으로는 수송에 엄청난 한계가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1962년에 우회철도가 건설되었고,
그에 따라 인클라인은 자연스럽게 폐선되어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1962년에 우회철도를 건설하면서 폐선되었을 때 선로를 걷지 않고 그대로 나뒀더라면,
지금쯤 아주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물론 그 시절은 먹고 사는 문제와 전쟁 전후복원 문제로 힘들었던 시기였기에 흔적을 남길만한 여유도 전혀 없었겠지만,
우리나라에 하나뿐이었던 주요 간선의 인클라인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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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클라인은 비록 남아있지 않지만 인클라인을 대신해서 건설한 엄청난 길이의 우회철도가 건재하고,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열차가 뒤로 가는' 스위치백까지 멀쩡히 남아있다.
물론 그나마 이런 시설들도 내년에 15km짜리 또아리굴이 완공되고 나면 모두 사라지겠지만,
어려웠던 경제상황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인클라인과는 달리,
스위치백은 폐선 이후에도 관광자원으로 그대로 남겨둘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철길을 관광자원으로 만들 정도로 상당한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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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길로 향한 관문으로 열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
이 열차가 통리역에서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구불구불한 급경사 철길과 스위치백을 지나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열차를 타고 가는 승객들에게야 기차여행의 백미로서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의 시작점이겠지만,
그런 험난한 길을 직접 운전해야 하는 기관사와 열차 본인에게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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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타는 수많은 승객들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기차여행.
열차를 직접 운전하는 기관사에게는 가슴 조리게 하는 모험.
그러한 모험을 하기 직전, 통리역에서 잠시 한 숨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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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호는 통리역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난 후, 잊을 수 없는 여정을 향해 유유히 출발한다.
저 열차가 서게 될 다음역은 "도계역".
도계역까지는 직선거리로 단 6km에 불과하지만,
6km 거리를 가기위해 16.5km나 빙빙 에둘러서 400m를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엄청난 급경사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산악철도답게,
경부선이나 호남선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제동경고 표지판이 역 앞에 당당하게 위치한다.
저 철길이 이어지는 곳은 태백선이 갈라지는 백산, 철암 방면으로 상대적으로 고도차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동경고 표지판이 존재할 정도로, 도계에서 고개길을 올라와서도 험한 길은 그 이후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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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삼각 벽돌역사의 통리역. 아무리 봐도 너무나도 정감가게 생겼다.
역사와 선로 사이의 좁은 공간도 벽돌타일로 박아놓아 마치 역 광장같은 미묘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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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험한 고갯길의 시작역이자 종착역이기에, 통리역에서 신호취급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막중한 역할을 한다.
좁은 구내 안에 신호취급을 위한 신호소가 따로 존재할 만큼 통리역에서의 신호비중은 엄청나다.
얼마 전에는 중앙선 매곡역에서 신호분기를 잘못하여 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최고의 경사길을 자랑하는 통리역에서 신호분기 고장이 난다면 바로 대형참사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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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역 구내는 사람 하나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좁기만 하다.
마을 규모는 꽤 있어 열차는 세워야 겠고, 산악지역이라서 부지는 좁기만 하고,
그래서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해 조그맣게 플랫폼을 내어놓은 것 같다.
통리역 자체가 이용객이 굉장히 많은 역은 아니기에 무리하게 클 필요도 없겠지만,
이 정도로 좁은 플랫폼에 열차가 고속으로 통과하기라도 하면 엄청난 위협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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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진 철길과 전차선...
누구나 한번쯤은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기차여행을 하면 정말로 여행을 제대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곳.
평범한 듯 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특별한 곳이며,
누구에게나 잊혀질 수 없는 각별한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통리역을 뒤로 하고 15km 길이의 루프터널이 약 1km 떨어진 곳에서 공사중이다.
우리나라 최대 길이의 터널이 개통되면 지금의 통리역 또한 덩달아 이설될 것이다.
신선이 마을과 동떨어져 있어 수요도 상당히 줄어들고,
터널 한가운데에 신호장도 생기기 때문에 교행업무 비중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통리역에게 있어 루프터널로의 이설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는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비록 구불구불 내려가는 산악철길과 거꾸로 달리는 스위치백 등 소중한 추억이 우리 곁을 떠나겠지만,
그만큼 안전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더욱 빠르게 도계역을 향해 전진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수많은 추억들과 함께 우리나라 유일의 시설물이 떠나가기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청난 급경사의 문제와 터널 지반침하와 같은 안전 문제를 생각하면 통리역 이설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밖에 없다.
비록 통리역이 실제로 남아있을 날은 머지않았지만,
백두대간의 동쪽 관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역이기 때문에,
스위치백과 함께 가슴 한 켠에 소중한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되어질 것이다.
첫댓글 캬..........감동적이에유 ㅠㅠ
통리역을 지나서 바로보이는 도계역 만큼 멋있는 경치도 별로 없을거라 생각이 드네요... 다음엔 어느역을 해주실련지...~ 태백 근처의 역들은 다 예전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네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정말 고맙습니다!
잘봤습니다 . 원주로 이사가기전에 .. 한번 들려서 사진이나 찍어야겠군요 ,..
급경사..엄청나네요ㄷㄷㄷ;;
직선으로 혹은 곡선으로 뻗어 있는 철로,,,아름답고 애틋한 그리움이,,,,,
플랫폼 폭은 자미원과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통리ㄷㄷ 새벽열차에서 내리면 미인폭포 관광객과 등산객들로 붐비던 승강장.. 통리에 들리면 역앞 영주식당에서 식사를 하곤 했던 기억이 있네요. 아, 그런데 통리-도계가 400m 고도차가 나는지는 몰라도, 통리-심포리는 그정도 고도차가 아닌데..ㅎㅎ 265퍼밀 정도 ?죠.. 인클라인 구배가. 그리고 기관차는 철암발과 삼척발이 각각 심포리와 통리에서 대기했지 싶습니다. 그 육중한 무게의 기관차를.. 화차도 아닌데.. 끌어올렸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혹시 제 이야기가 틀리다면 지적을^^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알아보니까 기관차와 객차는 각각 심포리와 통리역에서 따로따로 대기해서 수송했다고 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