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버블 붕괴' 뒤에 숨겨진 대장성과 일본은행의 실수…"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정책의 말로 [모리나가 타쿠로의 견해] / 10/7(월) / THE GOLD ONLINE
1990년 초 버블 붕괴 이후의 10년은 장기 불황과 경기 후퇴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립니다. 버블이 붕괴되고 나서 10년 동안 일본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리나가 타쿠로 씨의 저서 「쓰면 안 되는 일본 경제 추락의 진상」(삼오관 신샤 발행, 포레스트 출판 발매)으로부터, 버블 발생으로부터 붕괴 후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 봅시다.
◇ 버블은 이렇게 발생했다
플라자 합의에 의한 초엔고가 찾아온 후, 일본 경제는 심각한 경기 후퇴에 돌입했다. 정부와 일본은행은 경기악화를 막기 위해 큰 재정출동과 과감한 금융완화를 거듭하는 대규모 경제대책에 나섰다.
우선 재정 정책을 보면, 공공 사업비(실질 공적 고정 자본 형성)의 성장은, 1986년이 3.9%, 1987년이 5.1%, 1988년이 5.5%, 1989년은 ▲0.4%가 되고 있다. 비싸다고 하면 비싸지만, 엄청나게 큰 것은 아니다.
한편, 일본은행은, 이전까지 5.0%였던 재할인율을 1986년 1월에 4.5%로 인하했다. 이후 같은 해 3월 4.0%, 같은 해 4월 3.5%, 같은 해 11월 3.0%로 급격한 인하를 단행해 1987년 2월 2.5% 최저 수준까지 낮췄다. 급격한 금융완화로 엔고 불황에 맞서려 한 것이다.
이 가운데 닛케이평균주가는 1985년 말 1만 3,113엔에서 1986년 말 1만 8,701엔, 1987년 말 2만 1,564엔, 1988년 말 3만 159엔, 1989년 말 3만 8,915엔으로 4년 새 3배가량 올랐다.
부동산 가격도 급등했다. 전용도 평균의 시가지 가격지수(2010년 3월말=100)는 1985년에 159.4였던 것이 1990년에는 46%상승한 233.3이 되어 다음 1991년에는 257.5로 최고치가 되었다.
세간에서는 재정출동과 일본은행의 금융완화가 거품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재정출동 규모는 별것 아니고 재할인율도 2.5%까지 낮췄을 뿐이다. 그래서 거품이 되어 버린다면, 최근의 제로 금리 정책은 더 큰 거품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버블을 일으킨 최대의 원인은 일본은행의 「창구 지도」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각 은행마다 대출 증가율 상한을 지시하는 창구 지도를 줄곧 해왔다. 버블 시기에는 겉으로 1980년대 후반에는 폐지된 것으로 돼 있었지만, 그것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근무하고 있던 싱크탱크가 은행의 자회사로, 내가 입사했을 무렵은, 연구원의 대부분이 은행으로부터의 출향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품기의 창구지도가 엄청난 압력을 은행에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마지막 행장-홋카이도 타쿠쇼쿠은행 파탄 20년 후의 진실」(카와타니 사다마사 저, 다이아몬드사, 2019년)에서, 「버블기에는, 일본은행의 창구 지도로 각행에 전기비 3할증이라고 하는 큰 대출 범위가 주어졌다」라고 카와타니 전 행장은 증언하고 있다.
대출 증가율은 은행마다 크게 다르다.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듣기로는 적어도 10할 증가 정도의 틀은 각 행에 주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은행은 일본은행에서 부여받은 대출한도는 반드시 소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 해의 대출 한도가 줄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공서가 따낸 예산을 반드시 소화하려는 것과 같은 행동원리다.
하지만 세상은 엔고 불황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어 새로운 자금 수요는 거의 없다. 원래 은행은 부동산이나 주식 투기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데, 그런 것은 대출 품의서를 쓸 때 잘 속이면 된다. 결과적으로 은행들은 투기를 돕는 형태로 대출을 확대해 나갔다. 그것이 거품 발생의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 투기자금 대출은 한동안 잘됐다. 주가와 땅값이 급등하면서 충분한 수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품은 반드시 꺼진다. 폭락은 1990년 연초부터 시작됐다.
◇ 거품붕괴 10년새 5분의 1로 폭락한 땅값
시장 최고치가 된 1989년 12월말의 닛케이 평균주가는 3만 8,915엔이었다. 이후 1년마다 연말 주가를 보면 1990년 2만 3,848엔, 1991년 2만 2,983엔, 1992년 1만 6,924엔으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누구의 눈에도 거품 붕괴는 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거품 붕괴를 재정금융정책으로 완화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동산 대출 증가율을 금융기관의 총대출 증가율 이하로 억제하도록 대장성이 지도하는 총량규제를 도입한 것은 1990년 3월 27일로 거품이 붕괴된 지 3개월이나 지나서였다.
더구나 이 총량규제가 풀린 것은 이듬해인 1991년 12월이었다. 버블을 억제하기 위해서 도입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버블 붕괴 후에 이런 지도를 하면, 버블 붕괴 후의 계곡을 깊게 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부동산 가격, 특히 대도시 상업지의 땅값은 거품 해소를 넘어 훨씬 깊은 계곡(역거품)으로 가라앉았다.
역분사를 한 것은 일본은행도 마찬가지다. 버블 붕괴 후인 1990년 3월 20일, 일본은행은 재할인율을 지금까지의 4.25%에서 5.25%로 인상했다. 이어 1990년 8월 30일에 공정 비율을 6.0%까지 끌어올렸다.
과연 공정 비율은 6.0%를 정점으로 1991년 7월 1일에 5.5%로 인하하고, 그 후 1995년 9월 8일에 0.5%가 될 때까지 단계적으로 인하하고 있다. 다만 버블 붕괴 이후 1년 넘게 역분사를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자금 공급 측면에서는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은행이 자유롭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자금 공급량을 머니터리 베이스(현금+일본은행 당좌예금)라고 부른다.
그 머니터리 베이스의 대전년 증가율을 각 해의 12월의 숫자로 보면, 1989년이 12.6%였던 것에 대해, 1990년은 6.6%, 1991년은 ▲2.8%, 1992년은 1.4%, 1993년은 3.7%, 1994년은 4.0%, 1995년은 6.1%가 되고 있다.
즉, 버블 붕괴의 후, 자금 공급이라고 하는 면에서 말하면, 일본은행은 적어도 5년에 걸쳐 금융 긴축에 나선 것이 된다.
왜, 대장성과 일본은행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긴축을 버블 붕괴 후에도 계속했는가. 그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재무부와 일본은행이 앓고 있는 '긴축병' 때문인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인지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가지 가격지수로 볼 때 6대 도시권 상업지의 땅값은 1990~2000년 10년간 5분의 1로 대폭락했다. 그리고, 전후의 일본 경제를 지탱해 온 「주식의 보유」와 「부동산 담보 금융」이 붕괴로 향한 것이다.
모리나가타쿠로 / 경제 분석가 / 독협대학 경제학부 교수
https://news.yahoo.co.jp/articles/d0261c571b40ec1e42081c75da1229ac5eee276e?page=1
日本「バブル崩壊」の裏に隠された大蔵省と日銀の失態…“常識では考えられない”政策の末路【森永卓郎の見解】
10/7(月) 11:02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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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写真はイメージです/PIXTA)
1990年初頭、バブル崩壊からの10年は長期不況と景気後退が続いたため「失われた10年」と呼ばれています。バブルが崩壊してから、10年ものあいだ日本経済が回復しなかったのはなぜなのでしょうか。森永卓郎氏の著書『書いてはいけない 日本経済墜落の真相』(三五館シンシャ発行、フォレスト出版発売)より、バブル発生から崩壊後の流れを詳しくみていきましょう。
バブルはこうして発生した
プラザ合意による超円高が訪れた後、日本経済は深刻な景気後退に突入した。政府と日銀は景気悪化を食い止めるため、大きな財政出動と大胆な金融緩和を重ねる大規模経済対策に打って出た。
まず財政政策を見ると、公共事業費(実質公的固定資本形成)の伸びは、1986年が3.9%、1987年が5.1%、1988年が5.5%、1989年は▲0.4%となっている。高いといえば高いのだが、とてつもなく大きいというわけではない。
一方、日銀は、それまで5.0%だった公定歩合を1986年1月に4.5%に引き下げた。その後、同年3月に4.0%、同年4月に3.5%、同年11月に3.0%と急激な引き下げを行ない、1987年2月に2.5%の最低水準まで引き下げた。急激な金融緩和によって、円高不況に対抗しようとしたのだ。
そのなかで、日経平均株価は1985年末に1万3,113円だったのが、1986年末に1万8,701円、1987年末に2万1,564円、1988年末に3万159円、1989年末に3万8,915円と、株価は4年間で約3倍に値上がりした。
不動産価格も急騰した。全用途平均の市街地価格指数(2010年3月末=100)は、1985年に159.4だったのが、1990年には46%高の233.3となり、翌1991年には257.5と最高値となった。
世間では、財政出動と日銀の金融緩和がバブルをもたらしたと言われていて、私もそうだと思っていたのだが、財政出動の規模はたいしたものではないし、公定歩合も2.5%まで下げただけだ。それでバブルになってしまうなら、近年のゼロ金利政策はもっと大きなバブルを引き起こしているはずだ。
私はバブルを引き起こした最大の原因は日銀の「窓口指導」だったと考えている。日銀は、それぞれの銀行ごとに貸出の伸び率の上限を指示する「窓口指導」をずっと行なってきた。バブル期には、表向き1980年代後半には廃止されたことになっていたが、それが存続していたことを私は知っていた。
というのも、私が勤めていたシンクタンクが銀行の子会社で、私が入社したころは、研究員の多くが銀行からの出向者だったからだ。そして、バブル期の窓口指導がとてつもない圧力を銀行に与えていたことが最近になって次々と明らかになってきた。
たとえば、『最後の頭取─北海道拓殖銀行破綻20年後の真実』(河谷禎昌著、ダイヤモンド社、2019年)で、「バブル期には、日銀の窓口指導で各行に前期比3割増といった大きな貸出枠が与えられた」と河谷元頭取は証言している。
貸出枠の伸び率は銀行によって大きく異なる。統計があるわけではないが、私が聞いた話では、少なくとも1割増程度の枠は各行に与えられていたようだ。
銀行は、日銀から与えられた貸出枠は必ず消化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うしないと翌年の貸出枠を減らされてしまうからだ。役所が獲得した予算を必ず消化しようとするのと同じ行動原理だ。
ところが、世の中は円高不況の嵐が吹き荒れていて、新たな資金需要はほとんどない。本来、銀行は不動産や株式の投機にカネを貸すことを許されていないのだが、そんなことは貸出の稟議書を書くときにうまく誤魔化せばよい。結果的に、銀行は投機に手を貸す形で、融資を拡大させていった。そのことがバブル発生の最大の要因になったのだ。
しかもこの投機資金への融資はしばらくはうまくいった。株価や地価が急騰したことで、十分なリターンを獲得したからだ。
しかし、バブルは必ず弾ける。暴落は1990年の年初から始まった。
バブル崩壊…10年間で“5分の1”に暴落した地価
市場最高値となった1989年12月末の日経平均株価は3万8,915円だった。以降、1年ごとに年末の株価を見ると、1990年は2万3,848円、1991年は2万2,983円、1992年は1万6,924円と、株価は「つるべ落とし」で下がっていった。誰の目にもバブル崩壊は明らかだった。
本来ならバブル崩壊を財政金融政策で緩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ころが、ここでじつに不思議なことが起きたのだ。
不動産向け融資の伸び率を金融機関の総貸出の伸び率以下に抑えるように大蔵省が指導する「総量規制」を導入したのは1990年3月27日で、バブルが崩壊してから3カ月も経ってからだった。
しかもこの総量規制が解除されたのは翌1991年の12月だった。バブルを抑制するために導入するのならともかく、バブル崩壊後にこんな指導をしたら、バブル崩壊後の谷を深くするに決まっている。実際、不動産の価格、とくに大都市商業地の地価は、バブル解消を通り越して、はるか深い谷(逆バブル)に沈み込んでいった。
逆噴射をしたのは日銀も同じだ。バブル崩壊後の1990年3月20日、日銀は公定歩合をそれまでの4.25%から5.25%に引き上げている。さらに1990年8月30日に公定歩合を6.0%まで引き上げた。
さすがに公定歩合は6.0%をピークに1991年7月1日に5.5%に引き下げ、その後1995年9月8日に0.5%となるまで、段階的に引き下げている。ただ、バブル崩壊後1年以上にわたって逆噴射を続けたことは事実だ。
それどころか、資金供給の面ではもっと恐ろしいことが起きている。日銀が自由にコントロールできる資金供給量をマネタリーベース(現金+日銀当座預金)と呼ぶ。
そのマネタリーベースの対前年伸び率を各年の12月の数字で見ていくと、1989年が12.6%だったのに対して、1990年は6.6%、1991年は▲2.8%、1992年は1.4%、1993年は3.7%、1994年は4.0%、1995年は6.1%となっている。
つまり、バブル崩壊の後、資金供給という面からいうと、日銀は少なくとも5年にわたって金融引き締めに走ったことになる。
なぜ、大蔵省と日銀は、常識では考えられない引き締めをバブル崩壊後も続けたのか。その理由は、正直言って、よくわからない。財務省と日銀が罹患している「引き締め病」のためか、アメリカからの圧力に屈したのか、明確な証拠はどこにもない。
ただ、はっきりしていることは、「市街地価格指数」で見ると、6大都市圏の商業地の地価は、1990年から2000年にかけての10年間で、5分の1に大暴落した。そして、戦後の日本経済を支えてきた「株式の持ち合い」と「不動産担保金融」が崩壊に向かったのだ。
森永 卓郎
経済アナリスト
獨協大学経済学部 教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