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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스(Bee Gees)는 팝 역사상 최장기간 동안 활동을 했던 그룹 중의 하나로 특히 디스코 분야에서 대단한 히트를 기록한 수많은 곡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발라드에서 R&B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
'형제 그룹' 비지스는 1960년대 대중 앞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한 인기몰이를 하며 세월의 세찬 공격에 저항했다.
그리고 살아 남았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도약을 했고, 그들에게 애정을 쏟는 팬들 역시 골고루 분화(分化)되어 모든 세대를 아울렀다.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비지스이지만, 오늘날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세대마다 다르다.
먼저 50대의 중년층들에게 깁 형제들은 '추억의 팝 그룹'이다.
1960년대 후반의 싱글 차트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Holiday", "To love somebody",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 등을 흥얼거리며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국내에서도 비지스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Massachusetts", "Don't forget to remember", "First of may", "Words" 등이 외국의 순위와 관계없이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리퀘스트 됐다.
386세대를 전후한 연배에서 비지스는 '신나는 디스코 밴드'이다.
1977년 존 트래볼타가 주연한 디스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사운드 트랙에 수록된 "Stayin' alive", "Night fever", "How deep is your love" 등이 엄청난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겨운 디스코 리듬에 열광적으로 몸을 맡겼다.
정규 앨범에 수록된 "Jive talkin'", "You should be dancing", "Tragedy" 등도 디스코 붐에 크게 기여한 곡들이다.
이를 계기로 트리오는 1970년대 최고의 디스코 그룹으로 거듭났다.
그들이 끼친 디스코의 영향력은 국내 음악계까지 잠식했는데, '가왕(歌王)' 조용필의 영원한 클래식 '단발머리'가 대표적 사례이다.
그럼 비지스와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요즘 신세대들은 어떠한가.
그룹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는 그들은 '우회적' 방법으로 깁 형제들과 소통을 했다.
당대 인기 가수들의 리메이크가 바로 그것이다.
로비 윌리엄스(Robbie Williams)가 재직했던 테이크 댓(Take That)이 1996년에 커버한 "How deep is your love"(국내에서는 1995년 미국 흑인 4인조 포트레이트(Portrait)의 버전으로 유명하다)를 비롯하여, 같은 해 영국 댄스 팝 그룹 엔 트랜스(N-Trance)의 "Stayin' alive", 1999년 보이존(Boyzone)의 "Words" 등 젊은 후배 뮤지션들이 트리오의 명곡들을 재해석하여 높은 인기를 얻었다.
또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 <노팅 힐(Notting Hill)>에 담겨졌던 알 그린(Al Green)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도 원래는 1971년 비지스의 넘버원 히트곡이다.
때문에 신세대 팬들 역시 비록 원 곡은 모를지라도 비지스의 이름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도1999년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Holiday"가 삽입되면서 잠깐이나마 비지스 특수(特需)를 누렸다.
이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그룹이 계속적으로 대중들에게 회자(膾炙)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후배 가수들이 그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비지스의 고전들을 재해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지스 음악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출발했다.
비지스의 음악은 부챗살처럼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다.
단지 부드러운 발라드와 경쾌한 디스코만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팀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삼형제의 절묘한 하모니와 뛰어난 멜로디를 주무기로 그들은 록, 포크, 클래시컬 팝, 펑크(Funk), 디스코, 리듬 앤 블루스, 일렉트로닉 등 다채로운 장르를 표현해냈다.
음악계에 금자탑으로 새긴 많은 상기 명곡들에서 잘 나타난다.
이를 바탕으로 밴드는 대중 음악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즈(Beatles),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폴 매카트니(Paul MaCartney)와 함께 1억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최고봉에 올랐으며, 1994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을 시작으로, 1997년에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상',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 공로상', 월드 뮤직 어워즈에서 '평생 공로상'을 연거푸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헌액되어 명실공히 거장의 반열에 등극했다.
이뿐이 아니다.
비지스는 영국에서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각 시대마다 차트 1위 곡을 쏘아 올렸고(1990년대는 테이크 댓이 리메이크한 "How deep is your love"로 정상을 차지했다), 자신들이 작곡한 다섯 곡을 동시에 빌보드 톱 텐 차트로 발진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래미 시상식에 열 여섯 번이나 노미네이트됐으며, 일곱 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40여년동안 성공한 그룹으로 남아있는 비지스의 활동은 크게 두 시대의 음악적 갈래, 즉,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는 '소프트 락'의 시기와 70년대 중,후반의 '디스코 음악'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스타일에 상관없이 세 형제의 목소리, 즉 노래를 리드하는 배리 깁의 가성과 맑은 비브라토의 로빈 깁, 그리고 고음과 저음의 하모니를 이루는 모리스 깁의 목소리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기념비적인 음반 판매량과 화려한 수상 경력에서 알 수 있듯 비지스는 위대한 팝 그룹이다.
물론 상업적인 측면이 예술가의 잣대를 판단하는 완벽한 바로미터는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지구촌 팝 팬들의 큰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그들이 세계 팝 음악계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요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깁형제들의 음악 이력은 영국 맨체스터에서 1947년 9월 1일 태어난 맏형 배리(Barry Gibb)와 1949년 12월 22일에 태어난 쌍둥이 동생들인 로빈(Robin Gibb)과 모리스(Maurice Gibb)가 어린 시절 침대 위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서로 내비치면서 기지개를 켰다.
삼형제는 처음 부모님으로부터 음악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휴(Hugh Gibb)는 빅 밴드의 리더였고, 어머니 바바라(Babara)는 전직 가수였다. 아버지는 형제들의 공연 모습을 보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미국 흑인 보컬 그룹 밀스 브라더스(Mills Brothers)의 축소판이라며 자식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트리오는 1957년 맨체스터에 있는 극장에서 인기 가수들의 히트곡을 부르며 최초로 대중들 앞에 얼굴을 비쳤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깁 형제들은 직접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립싱크를 하는 '재롱 잔치'를 펼쳤다.
팝 역사상 최고의 하모니 그룹으로 평가받는 비지스의 출발점이었다.
이듬해 부모님을 따라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간 삼 형제는 래틀스네이크스(Rattlesnakes), 블루캣츠(Bluecats)라는 그룹명으로 클럽과 극장 등지에서 공연을 하며 만만찮은 잠재력을 과시했다.
1960년 형제들을 눈여겨본 경마업자 빌 굿(Bill Good)이 라디오 DJ인 친구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 그들을 소개시킴으로써 트리오는 이름을 떨칠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굿은 자신과 게이츠의 이니셜을 따서 형제들을 B.G's라고 불렀다. 하지만 rothers Gibb에서 그룹명을 얻은 것으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 맞다!.)
얼마 후 비지스로 명칭을 바꾼 그룹은 TV 방송과 투어를 하며 잔잔한 반응을 얻어갔다.
특히 1962년에는 '트위스트 스타' 처비 체커(Chubby Checker)의 시드니 스타디움 공연에 게스트로 초청되며 호주의 아이돌 스타로 자리잡았다.
"Three kisses of love", "Wine and women", "Spicks and specks" 등이 차트에서도 호조를 보이며 인기를 모았다.
특히 모리스의 피아노가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Spicks and specks"는 정상을 차지했으며, 깁 형제들의 초창기 명곡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어 진다.
이러한 호주에서의 활동 기록은 1968년과 1970년에 발표된 앨범 [Rare Precious & Beautiful Vol 1]과 [Rare Precious & Beautiful Vol 2]에 각각 실려있다.
비지스는 그러나 호주에서의 찬란한 영광시대를 뒤로하고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1967년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험을 강행했다.
결과는 대성공. 거물 프로듀서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눈에 들어 전격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비상을 위한 탄탄한 밑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이 당시 로버트 스틱우드는 '비틀즈의 제 5멤버'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과 넘스(Nems) 엔터테인먼트라는 매니지먼트사에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틱우드는 비틀즈라는 빅 밴드를 거느리고 있는 엡스타인을 항상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제2의 비틀즈를 키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바로 이때 찾아온 이가 깁 형제들이었다.
로버트 스틱우드는 비지스의 탄탄한 작곡 실력과 경지에 이른 하모니가 비틀즈만큼 대중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보고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는 나아가 기타리스트 빈스 멜로니(Vince Melouney)와 드러머 콜린 피터슨(Colin Peterson)을 정규 멤버로 영입하여 5인조 편성으로 그룹의 라인업을 재편했다(멤버 숫자상에서도 비틀즈보다 많다!).
비지스의 무한질주는 시작됐다.
그들은 1967년에 "Holyday",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 "To love somebody" 같은 싱글들을 연속히트 시켰고, 같은 해 발매된 데뷔작 [The Bee Gee's 1st]도 빌보드 앨범차트 7위로 성큼 올라서며 지구촌 정복을 향한 첫 테이프를 순조롭게 끊었다.
밴드는 계속해서 이듬해 "Massachusetts"와 "World"가 수록되어 있는 두 번째 앨범 [Horizontal], 영국에서는 1위, 미국에서는 8위를 차지한 "I've gotta get a message to you"와 미국 차트 6위의 "I started a joke"가 들어있는 [Idea]를 내놓으며 인기바람을 탔다.
하지만 외적인 성공과는 달리 그룹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합병증을 앓고 있었다.
로빈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 생활을 갈망했고, 빈스 멜로니와 콜린 피터슨은 밴드의 실권을 쥐고있는 배리의 음악 노선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69년 3월 로빈은 독립선언을 했고, 그 때를 전후하여 빈스와 콜린도 팀을 떠났다.(로빈은 그해 8월 데뷔 싱글 "Saved by the bell"을 영국 차트 2위에 올려놓으며 솔로 전향에 성공했다.)
그러나 배리와 모리스는 그룹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하고 1970년에 앨범 [Cucumber Castle]를 발표했다(데뷔작의 수록곡과 타이틀이 같다).
이 음반은 1969년에 두 형제가 제작하고 출연한 동명 타이틀 영화의 사운드 트랙으로 만들어졌다.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불후의 명곡 "Don't forget to remember"가 실려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존재가치를 부여고 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8개월간 외도를 했던 로빈은 1971년 1월 형제들과 다시 합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만약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다면 비지스에 복귀할 생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며 핏줄의 자연스런 당김을 인정했다.
삼형제의 재결합 싱글인 "Lonely days"는 미국 차트 3위, 후속곡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는 정상을 차지하는 등 비지스는 잠시 접었던 날개를 다시 활짝 폈다.
영국을 주무대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해나가던 깁 형제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으로 옮겨가 새 둥지를 틀었다.
영국의 달라진 음악 환경이 이유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레드 제플린(Led Zepplin)의 [Led Zepplin Ⅳ],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Paranoid] 등 헤비메탈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 앨범들이 잇달아 터져 나오면서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아지트로 탈바꿈했다.
또한 T. 렉스(T. Rex)와 데이빗 보위(David Bowie)로 대변되는 글램 록 센세이션도 직격탄을 날렸다.
때문에 서정적인 발라드를 강조하는 비지스의 사운드 메커니즘은 앰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출력 사운드로 인해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트리오는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적 지평을 한껏 넓혔다.
그들은 뉴욕의 클럽 등지('디스코의 메카' 스튜디오 54가 가장 유명하다)를 중심으로 흑인 펑크(Funk) 키드들에 의해 전해지던 디스코의 영향을 받았다.
1975년 앨범 [Main Course]와 이듬해 발표한 [Children Of The World]에 각각 수록되어 차트 1위에 우뚝 올라선 "Jive talkin'", "You should be dancing"이 웅변한다.
이를 계기로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맴돌았던 디스코는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기 시작했다.
게이 바(Bar), 흑인 클럽 같은 은둔지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과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 정점은 1977년 발표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 트랙이었다.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4,0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음반은 "Stayin' alive", "Night fever", "How deep is your love"의 연이은 정상 등극으로 지구촌에 디스코 열풍을 휘몰아치게 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주인공 토니 마네로로 분한 존 트레볼타의 흰 양복과 팔을 높이 쳐들고 언제라도 춤출 준비가 된 자세, 그리고 "Stayin' alive"에서 배리 깁의 가성(Faasetto)은 디스코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디스코의 충격파는 기성 아티스트들에게도 매우 컸다.
1978년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차트 1위 곡 "Do ya think I'm sexy"를 시발점으로,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Some girls", '고! 디스코(Go! Disco)'외치며 디스코에 투신한 블론디(Blondie)의 "Heart of glass", "Call me" 등 유명 뮤지션들도 디스코의 우산 아래로 해체 모여했다.
또한 전혀 디스코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메탈 그룹 키스(Kiss)도 1979년 앨범 [Dynasty]에 디스코 넘버 "I was made for loving you"를 집어넣으며 트렌드에 편승했다.
비지스가 막을 연 디스코는 그러나 비평가들로부터 “대량 소비시대의 저급한 통조림상품”이라며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멜로디를 배제하고 연속적 비트를 강조하는 디스코는 특유의 단순성과 간결함으로 '쉽게 만들고 쉽게 팔 수 있다'는 상업주의 전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삼형제 역시 '흑인 음악을 백인들이 판다'는 절대 진리(?)를 다시금 입증시키며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선풍적인 디스코 열기와 함께 비지스는 로버트 스틱우드의 바램대로 비틀즈를 능가하는 최고의 인기 밴드로 자리 매김 했다.
이와 동시에 그룹의 음악 컨덕터인 맏형 배리 깁은 자신의 작곡 실력도 만방에 떨쳤다.
첫 포문은 삼 형제의 동생인 앤디 깁(Andy Gibb)이 열었다.
앤디는 형의 도움을 받아 1977년 데뷔 싱글 "I just want to be your everything"을 포함하여, "(Love is) Thicker than water", "Shadow dancing"을 연달아 1위에 등극시키며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었다.(하지만 앤디는 갑작스런 인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1988년 3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뒤를 이어 사운드 트랙 [Saturday Night Fever]에 수록되어 있는 이본느 엘리만(Yvonne Elliman)의 "If I can't have you", 같은 해 영화 <Grease>에 삽입됐던 프랭키 밸리(Franky Valli)의 "Grease"가 정상을 차지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배리가 쓴 곡들은 차트에서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1980년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의 "Woman in love", 1982년 디온 워익(Dionne Warwick)의 "Heartbreaker",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함께 부른 "Islands in the stream", 그리고 1986년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의 "Chain reaction"같은 명곡들이 모두 배리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배리의 승승장구와는 다르게 음악 구심점을 잃어버린 비지스는 1980년대에 몇 장의 음반들을 발표하지만 그룹의 음악 본령을 찾지 못했다.
이후 깁형제들은 1989년 [One], 1991년 [High Civilization], 1993년 [Size Isn't Everything]을 내놓으며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이어 4년 후 발매한 작품 [Still Waters]가 미국에서 플래티넘을 차지하고 싱글 "Alone"이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트리오는 기사회생했다.
1997년 라스 베가스에서 가진 라이브 콘서트의 실황 앨범인 [One Night Only]는 5백만장 이상이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들은 전세계를 돌며 'One Night Only'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2001년 비지스는 앨범 [This Is where I Came In]을 발표하였다.
앨범 [This Is where I Came In]은 타이틀이 암시하듯 자신들의 음악 원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1960년대 사운드로 회귀한 것이다.
하지만 원숙함과 노련함이 더해져 세련되게 꾸며졌다.
부드러운 팝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던 전작 [Still Waters]와는 상당한 음악적 차이를 보였다.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 깊은 첫 싱글 "This is where I came in", 비틀즈식 흥겨움이 물씬 풍기는 "She keeps on coming"에서 잘 나타난다.
트리오의 데뷔작 [The Bee Gee's 1st]와 맥을 같이한다.
배리는 “우리는 실제로 1960년대 후반에 했던 녹음 방식으로 돌아갔다.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있는 무대로 말이다. 우리는 라이브의 느낌을 원했다.”며 뿌리 찾기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오프닝 곡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라이브 연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프로그래밍 음악에 반대하여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회귀하는 것이다”라며 컴퓨터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음악을 하는 요즘 현실을 꼬집었다.
깁형제들은 또한 함께 곡을 만들고 녹음했던 이전까지의 작업패턴에서 벗어나 '따로 또 같이'를 지향했다.
각자 몇 소절씩 부분 완성한 것을 녹음실에 모여 하나의 곡으로 탄생시키고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곡마다 느낌이 다양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2003년 12월 비지스는 갑작스런 모리스 깁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룹의 이름인 'Bee Gees'를 그대로 고수하겠다고 발표했던 남은 두 형제는, 얼마 후 'Bee Gees'라는 이름은 세 형제가 함께 있을때 의미가 있음을 말하며 그룹명 'Bee Gees'를 쓰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앨범 [This Is where I Came In]는 그룹으로서 마지막 앨범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리스의 죽음이 있고 얼마 후 로빈 깁의 솔로 앨범 [Magnet]이 발표되었다.
두형제와 게스트들로 꾸며진 모리스를 추모하는 콘서트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고, 그 후 배리 깁과 로빈 깁은 독립적으로 다른 아티스트들과 레코딩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로빈깁은 2004년 후반부터 독일, 러시아 그리고 아시아를 돌며 솔로 투어를 가졌다.
이 투어의 일환으로 2005년 8월 31일 우리나라에서도 비지스 결성 47년 만에 처음으로 내한공연이 열렸는데,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모리스 깁과 성대 결절로 작곡과 프로듀싱에만 전념하고 있던 배리 깁이 없이 로빈 깁만이 무대에 올라 전성기때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2006년 2월 모리스의 죽음이후 처음으로 배리 깁과 로빈 깁은 자선 콘서트에서 다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비지스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단상은 형제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와 주옥같은 멜로디이다.
그들은 각종 음악 장르가 활개치는 소리의 진열장 속에서도 이런 강점을 밑거름으로 서정의 속살을 드러내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왔다.
그들이 40년 넘게 다양하게 펼쳐냈던 로큰롤, 소프트 팝, 리듬 앤 블루스, 디스코 속에도 항상 트리오 특유의 화음과 선율이 생동감 있게 흐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룹 또한 이 점을 잘 알기에 그들은 묵묵히 전진하고 진화했다.
그게 바로 깁형제들에게 주어진 음악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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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소에도 즐겨듣던 이 노래를 이곳에서 들으니 역시 마이클잭슨을 떠올리게 하네요.
음..울 아부지가 넘 좋아라하시는 비지스..이 분들의 곡도 참 좋아요.
아빠의 기타반주소리에 익숙하던 이 곡..너무 궁금해서 들어봤던 기억이..ㅎㅎ
어쩜 가사와 멜로디가 이리 좋을 수 있죠?..^^
헤라님~ 감사해요..^^;; 늘 수고가 많으세용!
감기 조심하셔요~
헤라님 덕분에 아티스트들에 대헤 제대로 알게 되네요. 팝을 처음 좋아하면서 주로 잔잔한 음악들을 들었는데요. 이노래도 그 중 한곡으로 엄청시리 좋아했죠. 지금까지도요...., 근데 요즘에는 이노래 들으면 마이클 생각이 더 나요.
헤라님 매번 좋은 정보, 사진,동영상, 음악 올려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마이클잭슨의 모습과 그의 흔적을 느낄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