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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추억으로살지
호랑이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해 온 친근한 동물이다.
선사시대부터 오랜 세월 동안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함께 공존해 왔는데 단군신화 속의 사람이 되고 싶었던 호랑이부터 시베리아 등지에 살아남아 있는 백두산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들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중 일부
위 그림 15번에 함정에 빠진 짐승이 있는데 얼룩 무늬로 보아 대형 고양이과 동물 같다. 또한 19번에는 우리에 갇힌 짐승이 보인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호랑이를 그림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사실은 울산 언양의 절벽에 새겨진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당시의 사냥 모습과 200 여점에 달하는 육지와 바다 동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선사인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일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함정유적이다.
함정(陷穽)
원시시대와 그뒤 한참까지 짐승 잡는 데 널리 쓰인 방법은 함정을 파는 것이었다.
오른 쪽 사진에서 보다시피 함정의 단면은 V자 혹은 Y자형태다. 또한 왼쪽 구멍 2개는 나무로 만든 창을 박았던 흔적 같다.
산돼지건 호랑이건 빠지는대로 날카로운 창이 아래부터 몸을 꿰뚫고 또 양쪽 벽이 V자 또는 Y자 형태로 꽉 조여 버리니,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슴 등 짐승들이 달아나는데 그림 중앙에는 호랑이같이 생긴 짐승이 쫓긴다.
말탄 무사들은 발에 등자(橙子)를 찼고, 위쪽 무사는 몸을 있는대로 뒤틀어 활로 사슴을 쏘는 멋드러진 배사(背射)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등자가 없이는 말 위에서 이런 동작을 취할 수가 없다)
보기에는 근사한 장면이나, 이렇게 하려면 몰이꾼이 필수다. 몰이꾼들이 원하는 장소에 짐승을 몰아 주어야 가능한 것이다.
↑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 있는 강무도다.
짐승 몰이를 하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전통적 짐승잡이는 함정을 이용하거나 대규모로 몰이꾼을 동원하여 잡는 것이었다. 호랑이도 그렇게 해서 잡았을 것이다.
- 화살 한대에 호랑이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다.
수호지(水滸誌)의 무송은 맨주먹으로 호랑이 골통을 부셔버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김동진 교수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 호랑이 잡은 뒤 포상은 첫번째 화살을 꽂은 사람, 그 두번째 세번 째, 창 제일 먼저 박은 사람, 그 두번째, 세번 째가 각각 달랐다고 한다.
이를 해석하면 저 멀리부터 호랑이를 포위하여 몰아 온 다음 제법 원거리에서 화살을 어지럽게 쏜다.
그래도 호랑이 가죽이 워낙 두꺼워 잘 박히지도 않고, 급소를 맞추기도 어렵고, 꽃쳐도 화살 몇 대에 죽지 않는다.
그렇지만 화살을 여러 대 맞으면 기운은 어지간히 떨어 질 테니, 그때 우 달려들어 창을 차례로 꼽아서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첫화살을 맞춘 사람, 첫창을 꼽은 사람 공이 제일 높았던 것이다.
- 조총(鳥銃)과 노도(弩刀)
임진왜란 때 조총이 들어오고 막바로 대량 보급된다. 연속극에는 으레 창을 쥐켜주나, 조선후기 군사들 기본 무장은 조총이었다.
임란(壬亂)에서 실제 전투경험을 가진 조선 포수의 실력은 꽤 소문이 났다.
광해군이 명나라의 종용으로 만주에 1만 군대를 출병시킬 때, 포수들이 주력인 조선군을 명나라 장수들이 탐을 내고 서로 데리고 가려고 다투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호랑이 사냥에는 조총을 든 포수(砲手)들이 활약한다.
18세기 정시응이란 사람이 노도(弩刀)라는 호랑이 잡는 신무기를 개발했다. 이 노도(弩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해오지 않으나, 노(弩)라는 이름으로 볼 때 반탄력을 이용한 기계장치 같다. 아무튼 호랑이를 아예 토막내 버릴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고 한다.
- 호피(虎皮)
조선시대 각 고을은 호랑이 가죽을 나라에 바쳐야만 했다. 호피(虎皮)가 귀해서가 아니었다.
오늘 날 호랑이 가죽하면 대단하게 여기나, 우리 조상들은 별로였다. 호랑이 가죽 용도를 보면, 천한 수군(水軍)들이 노 저을 때 앉는 방석 또는 짐 실은 수레를 덮는 천막 용도 등이었다.
또 호조(戶曹) 창고에는 호랑이 가죽 만장이 넘게 쌓여 썩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왜 호랑이 가죽을 바치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 어릴 때 쥐 잡았다는 증거로 학교에서 쥐꼬리 내던 생각하면 된다.
호랑이를 잡았는지 어쨌는지 증빙을 내라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서 호랑이가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러
웬만한 고을은 가죽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다고 한 번 정한 공물의 세목이 바뀌지는 않았다.
이에 고을들은 돈을 거둬 북쪽 아직 호랑이가 살아 남은 곳에서 가죽을 살 수 밖에 없었으니, 이 또한 백성들에게 피해주는 일이 되어버렸다.
영조 10년엔 호랑이가 너무 많아 그 해에만 140명이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영조 27년엔 인왕산 호랑이가 경복궁 경내에 들어와 새끼를 놓아 기른 기록도 있다.
조선의 특수부대 착호군 혹은 착호갑사
착호갑사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착호와 갑사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명사이다. 조선시대에는 갑사라는 군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의흥위 소속으로 5위의 중심 병력을 이루는 정예부대였다.
원래는 한양을 방위하는 기간병이었지만,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의 수비를 담당하는 양계갑사와 호랑이를 잡는 착호갑사가 생겨났다.
그럼 이런 부대가 왜 생겼을까?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호환에 대한 기록이 700건이 넘고 영조대에는 1000건에 이른다고 한다.
여하튼 시민들뿐만 아니라 궁궐에도 호랑이가 새끼를 치고 다닐정도로 그 정도로 호랑이가 흔해서 그것들을 잡기 위해서 만든 부대가 바로 착호군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5가지 조건이 필요했다고 한다.
1.180보에서 1개 이상의 화살 맞추기
2.기사(말타고 활쏘기)는 2번 이상 맞추기
3.기창은 1번이상
4.달리기
5.양손에 30킬로씩 들고 100보이상 걷기등.
일반적으로 힘쎈 장정들을 지방에서 절도사가 선발하였다고 한다. 지원자가 없을때는 힘좋은 장정들을 징집했는데 이때는 이것이 지금의 로또와 같이 부귀영화를 누릴수있는 것이어서 강제 징집에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한 특채도 존재하여 호랑이 2마리 이상을 창과 활로 잡은자에 한해서 특채선발했다는데 그렇게 잡은 사람이 있다는것이 더 신기할 정도다.
호랑이를 잡을때 2가지 방법을 사용했는데 하나는 타위라고 해서 소음공해로 호장이를 잡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함정으로 미끼를 사용해서 개나 동물을 묶은뒤 쇠뇌나 덫을 이용했다고 한다.
호랑이사냥꾼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狩獵圖)’.
조선시대 호랑이 잡던 사냥꾼들은 국가위기 땐 최정예 부대원으로 선발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에 서술된 각종 관련 기록들 >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호랑이 관련 기사는 모두 635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사람이나 집짐승이 잡혀 먹힌 내용이다. 그만큼 호랑이의 폐해가 그칠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민간에 호랑이가 먹고 남은 시신을 모아서 장례를 치르는 호식장(虎食葬)이 퍼졌고, 그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피해를 다시 입지 않기 위한 범굿이 생긴 것도 이러한 사정과 연관이 깊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 잡는 임무를 맡은 440명의 정규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따로 편성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들의 포상과 승진에 대한 규정도 두었다. 제일 먼저 활을 쏘거나 창으로 찔러서 다섯 마리 이상을 잡으면 두 계급 올려주고, 한 해 열 마리를 더 잡은 고을의 원은 품계를 돋구어준 것이다. 호랑이 사냥에 국가가 나섰던 셈이다.
태종 때는 호랑이가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와서 근정전 근처에서 어슬렁거렸고, 경상도에서는 서너 달 사이에 수백 명을 물었다.(조선왕조실록)
승정원에 진지하기를 "지금도 중국에서 기우할때 호랑이 머리를 용이 사는 못에 넣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옛 글에도 있으니 담그는 것이 어떠한가?" (세종 13년 5월 16일, 세종 대왕 실록)
세조 때는 궁궐 뒤의 백악산(오늘날의 북악산)에도 나타났다.
중종대에는 임금이 인왕산과 백악산의 호랑이 퇴치를 위해 직접 나서려고 할 정도로 수도의 호랑이 피해가 많았다(28년(1533) 4월). “호랑이 치고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는 없다”는 속담은 이에서 나왔다.
선조는 4년(1571) 8월에 경기도에 호랑이의 피해가 많으므로, 군사를 일으켜서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사졸들이 여염에 들어가서 끼친 민폐가 호랑이 보다 더 심했다고 전한다.
같은 해 10월 27일에도 경기도 고양 일대에 출몰해서 집짐승 4백 마리를 물어 죽였다. 이를 계기로 호랑이 사냥을 크게 벌여서 많이 잡았다. 인조 때는 호랑이떼가 평안북도 의주성에 줄몰하여 사람과 집짐승에게 해를 끼쳤다.
숙종 때도 6,7년 사이에 강원도 주민 3백여 명이 물려죽었으며, 이 때문에 파발(擺撥)이 끊기는 외에 사람의 통행마저 두절되었다.
영조도 12년(1736) 3월에 경기도 일대의 능에 숨어서 해코지를 일삼는 호랑이를 퇴치하라는 영을 내렸다. 호랑이 머리를 통해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포획을 위해 갑사를 보냈다. (영조 실록)
정조는 20년(1796) 11월에 군영에서 응봉(鷹峰) 일대에 출몰하는 호랑이를 잡으려 하자 “호랑이는 제 살 곳이 없어 나타나는데다가, 지금은 엄동설한이므로 폐단이 클 것이니 나서지 말라”고 하였다.
헌종 9년(1843) 9월에도 경모궁(景慕宮) 뒤뜰에 호랑이가 들어와서 영문(營門)에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고종 2년(1865) 10월 4일에는 남산에서 호랑이를 잡았으며, 세 해 뒤의 9월 20일에는 북악에서 세 마리와 수마동(水磨洞, 지금의 종로구 세검정)에서 두 마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20년(1883) 1월 2일에 인왕산에서 표범 새끼를 잡았다.
호랑이가 인가 근처에서 산양 따위를 잡으면 먼저 내장을 꺼내 먹은 다음, 다시 먹으려고 덤불 속으로 끌고 가서 숨겨둔다. 그리고 먹이를 지키기 위해 멀리 가지 않는다. 이를 이용해서 사냥꾼은 발자국이나 핏자국을 따라가서 총으로 쏘아 잡았다.
인왕산 호랑이 으르르르, 남산의 꾀꼬리 꾀꼴꾀꼴.” 조선시대 한양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리던 민요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역사 속 서울엔 야생동물들이 꽤 많이 살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힘센 동물은 호랑이였다. 먹이사슬 최종 포식자인 호랑이는 서울 곳곳에서 국가 제사에 쓸 가축부터 사람까지 잡아먹었다. 연구자들은 조선시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비율이 지금의 교통사고 사망률보다 높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중종은 호랑이가 자꾸 서울에 나타나자 지방에서 호랑이 잘 잡기로 유명한 사람을 데려오기도 했다.
한국교원대 김동진(역사교육) 박사는 “조선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잡으면 당상관 벼슬을 줬던 나라”였다고 말했다. 호랑이를 많이 잡은 수령은 특진시키고 호환이 일어난 고을의 수령은 파직하는 법까지 있었다.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도 있었다.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은 조선인을 만나면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 이야기를 꼭 물었다. 최남선은 조선을 호랑이 이야기가 많은 나라라는 뜻에서 ‘호담국’이라 불렀다.
조선의 속담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라는 게 있다. 조선에선 힘센 남자를 ‘인왕산 호랑이’라 불렀다. 인왕산 서쪽 자락의 무악재는 호랑이 출몰 명소였다. 행인들은 10명씩 모여 꽹과리를 치며 군사들의 호위 아래 겨우 고개를 넘었다. 서울에서 야생 호랑이가 출몰한 곳은 인왕산 골짜기만은 아니었다. 호랑이는 멀게는 수락산, 가깝게는 4대문 안에서도 어슬렁거렸다. 『조선왕조실록』은 남산·도봉산·수락산·북악산 등 서울을 두른 산부터 4대문 밖 청량리·제기동·아현동, 이화여대 뒷산, 숙명여대 근처 청파동에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서울의 호랑이 출몰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있다. 공양왕은 서울로 잠시 수도를 옮겼다가 호랑이 피해가 너무 커 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엔 호랑이가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내려와 대궐까지 들어왔다. 호랑이가 높은 성벽과 굳센 성문을 어떻게 넘었는지는 당시에도 의문이었다. 호랑이는 대궐을 지키는 병사를 물어가기도 했고 삼청동, 종묘와 사직단, 창덕궁 소나무숲, 경복궁 후원에도 나타났다.
실록에서 호랑이가 처음 서울에 등장한 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해다. 실록은 “호랑이가 서울에 들어오니 흥국리 사람이 (활로) 쏘아 죽였다”고 쓰고 있다. 태종 때는 호랑이가 밤을 틈타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다. 세종은 가뭄이 들면 한강물에 호랑이 머리를 담가 비를 기원했다. 별명이 ‘큰 호랑이’였던 세조는 직접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세조 13년. 북악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제보가 들어오자 세조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북악산에 올랐다. 호랑이는 낭떠러지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세조는 활을 쏴 그 호랑이를 직접 잡았다.
연산군은 대성전에 호랑이를 가둬 놓고는 벽에 뚫은 구멍으로 활을 쏘곤 했다. 중종 땐 성문 근처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해 군사를 풀어 잡고 보니 사향 노루 두 마리였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중종 이후 잠잠하던 호랑이는 임진왜란 후 다시 출몰했다. 선조 때는 호랑이가 창덕궁에서 새끼를 낳았다. 선조는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다”라며 군사들이 “부지런히 찾지 않고 말만 꾸며 책임만 모면하려고 한다”며 화를 냈다. 인조 때는 인왕산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었다. 호랑이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건 영조 때다. 실록은 영조 28년엔 서울에서 “호랑이가 마구 돌아다녔다”고 썼다. 영조는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신하들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깊은 산골도 아닌 서울에 정말로 호랑이가 살았을까. “인구가 늘고 평지가 개간되면서 깊은 산으로 쫓겨간 것일 뿐 호랑이가 원래 산을 좋아하는 동물은 아닙니다.” 10년 넘게 한국 호랑이를 연구한 서울대 이항(수의학) 교수는 “오히려 펑퍼짐한 산과 넓은 들판, 큰 강이 흐르는 서울은 호랑이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 김동진 박사 역시 비슷한 지적을 했다. “한국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는 물이 많은 저습지였다. 서울이 딱 그렇다.” 그는 “저습지가 개간되면서 후기엔 호랑이가 살 곳을 잃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한국 호랑이는 아무르 호랑이로 분류된다. 아무르 호랑이는 일주일에 사슴·멧돼지 같은 큰 짐승 한 마리를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런 호랑이가 서울에 살았다는 건 호랑이의 먹이인 초식동물 역시 서울 근교에 많이 서식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 4대문 밖은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의 경북 상주시 인구(10만 명)와 비슷한 작은 도시였다. 울창한 숲과 높지 않은 산, 큰 강은 초식동물들의 안식처였고 표범과 호랑이 같은 포식자들을 불러 모았다. 세종은 겨울이면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도성 근처 숲에서 노루와 사슴을 사냥하게 했다.
성종은 청계산에서 노루·사슴·멧돼지·토끼 등 25마리를 잡아 종묘에 바쳤다. 지금도 청계산엔 멧돼지와 너구리가 산다. 성종은 지금의 독립문 근처에서 여우 사냥을 구경하기도 했다. 표범은 성벽을 넘어 지금의 안국동까지 내려왔다. 조선시대 동대문 밖 숲은 태종이 자주 가던 매 사냥터였다. 태종은 매 사냥으로 잡은 고니를 태조 이성계와 정종에게 선물했다. 세종 역시 서대문 밖에서 자주 매사냥을 구경하곤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민속연구과장은 “노루·삵·멧돼지 같은 작은 동물은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랑이나 표범은 워낙 큰 동물이고 가끔 사람을 해치다 보니 실록에 기록했지만 작은 동물은 당시엔 너무 흔했다”는 것이다.
정조 이후 서울에서 호랑이가 출몰한 기록은 거의 사라진다. 조선 정부의 꾸준한 호랑이 사냥과 농지 개간으로 먹이가 줄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이 지나면 호랑이 서식지를 대부분 늑대가 차지한다.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줄면서 늑대가 그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실록에선 고종 때인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가 마지막 기록이다. 그러나 호랑이가 서울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연세대를 세운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는 견문록에서 자신이 조선에 온 1888년 이후에도 서울에서 호랑이를 봤다고 썼다.
↑ 임진왜란때 제일 먼저 조선에 침략한 일본 장수 '가토 가요미사'
가토는 조선에 침략한 왜장들을 시켜서 조선 호랑이를 마구잡이로 포획하였다. 예로부터 조선 호랑이가 귀한 약용으로 쓰여왔음을 익히 간파한 일본 수장 '토요토미'는 조선 호랑이의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등을 조선으로부터 보급받아 보약으로 먹었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침략한 왜장 가토 가요마사와 왜장들이 조선 호랑이를 무차별하게 죽이는 장면을 그린 맹호도이다.
조선 시대의 호랑이 사냥법
김속시(金束時)는 여진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 그의 아비를 따라 왔었는데 무예가 뛰어나고 자뭇 경사(競射)에 밝았다. 집이 경기도 가평(加平) 산골에 있어 날마다 사냥을 일삼았다.
그는 호랑이 잡는 요령을 애기하기를 “평생에 호랑이를 쏜 일은 그 수효를 셀 수 없다. 옛날에 세조께서 온양(溫陽)에 머무르셨는데, 어느 날 한 선비가 와서 아뢰기를 ‘열여섯 살쯤 된 여자가 어젯밤에 안방에 있다가 마침 창문이 열려서 호랑이가 물어갔사오니 성상께서는 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하여 세조께서 장수들에게 명하시어 잡으라 하셨는데, 역시 나를 따라가게 하셨다.
그 여자의 집에 도착하여 상황을 물어보고 산 중턱에 이르니 붉은 적삼이 반쯤 찢어져서 나무 끝에 걸려있고 또 몇 걸음 가니 시체가 산골짜기 시냇가에 있었는데 반은 이미 먹혀 있었다. 조금 있다가 나무 사이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다보니 호랑이가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분함을 못참아 말을 달려 나아가한 살로 맞힉 물러나다가 말이 소나무 가지에 걸려 쓰러지니 호랑이가 달려들어 내 팔을 끌어당겨 물기에 호랑이와 함께 싸우는데 사냥하는 관리가 와서 쏘아 죽여 마침내 위험을 면하였다. 옷을 벗어보니 팔에 상처난 자리가 있었다” 하였다.
선사시대의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부터 고구려 고분벽화나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까지 여러 유적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엔 호랑이를 소재로 한 민화가 대량 제작됐다.
조선에서 호랑이 그림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는 문인화가 고운이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고운의 ‘백액대호’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호랑이 그림의 정형을 성립한 이는 단원 김홍도로, 그가 호랑이를 그리고 표암 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린 ‘송하맹호도’와 수월 임희지가 대나무를 친 ‘죽하맹호도’는 후세의 표준이 됐다. 이 관장은 “중국의 호랑이 그림이 형태보다 의미를 중시한 데 비해, 조선 호랑이 그림은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민화도 독특한 전통을 형성했다. 진짜 호랑이 가죽을 펼쳐놓은 듯 그린 호피도는 중국이나 일본에선 찾을 수 없다.
↑ 1900년대초 무악재를 넘는 짐꾼들의 모습.
고려시대 한산군(서울)에서는 군수가 호랑이로 인해 3번이나 바뀌고 호랑이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를 잡는 특수부대인 착호갑사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호랑이가 많긴 많았다.
호랑이는 서울에서도 주로 인왕산에 많았다고 한다. 경복궁의 오른쪽에 있는 웅장한 바위산이 발자국을 남기기 싫어하는 호랑이에게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왕산이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경복궁)의 오른쪽을 감싸고도는 이른바, 우백호자리라는 점이다.
우백호를 뜻하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득시글했다니 신기하다. 당연히 호랑이로 인한 피해도 빈번했다. 그래서 지금은 동심을 자극하는 민담인 <해님달님>도 당시에는 다르게 들릴 수 있었다 호랑이가 장사를 파하고 고갯길을 넘는 어머니를 해친 뒤 피 맛을 잊지 못하고 민가를 습격해 아이들까지 공격했다는 슬픈 시대상을 반영한 스릴러물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09년 12월 12일자 프랑스 신문 '르 쁘띠 주르날'에 보도된 호환도.
두 마리의 한국 호랑이가 집안에 침입하여 사람을 해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당시 호랑이에 의한 피해도는 현재의 교통사고 발생률보다 높았다.
한반도에 서식했던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 종으로, 덩치가 매우 크고 사나웠다.
예로부터 크코 사나운 맹수를 산의 주인이라 부르며 숭배하던 일본은 조선의 민족 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 사냥꾼들을 대거 불러들여 호랑이를 사냥했다.
호랑이는 본래 먹이 사슬의 최정점이라 개체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 시대에만 800마리의 호랑이가 사냥을 당했고, 한반도의 호랑이는 완전히 멸종했다.
현재 중국쪽에 한반도 호랑이들의 후예들이 있는 것으로 보고 복원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
루스벨트 그 무엇이랴
호랑이여 오라
호랑이 덤벼라 표범 덤벼라 늑대도 곰도 덤벼라
안 나오면 쏘겠다 오연발로
호랑이여 오라
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
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한 달 동안 호랑이 사냥을 동행 취재하게 된 기자는 아마도 흥분했던 것 같다. 한 기자가 지은 ‘정호군가’라는 노래는 1917년 11월10일 일본 도쿄역을 출발해 같은 해 12월10일 다시 도쿄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에서 한국 호랑이를 사냥한 원정대의 분위기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그 속내까지도 드러냈다
사냥 행사를 주관한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탄광회사와 선박회사를 소유한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원개발과 해운으로 떼돈을 본 사람이었다.
↑ 경성 남대문역에서 원정대를 취재하러 모인 기자들
사냥대는 24명의 사냥꾼과 약 150명의 몰이꾼으로 구성됐고 매일신보사, 중앙신문, 경성일보, 규슈일보사, 야마토신문 등에서 기자 19명이 동행 취재했다. 사냥꾼은 8개 반으로 나눠 백두산 등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 파견한 뒤 사냥물을 한 곳에 모았다. 요즘 많이 하는 팸 투어처럼 언론을 통한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 엿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3명을 뺀 사냥꾼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냥꾼이 모두 동원됐는데, 호랑이 100마리를 쏘아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로 꼽히던 강용근, 강용근과 함께 조선왕실이 공인한 엽사로 하루에 꿩 106마리를 잡은 기록을 갖는 이윤회 등이 포함됐다. 다른 포수가 화승총을 쓰던 시절이었지만 이 둘은 엽총을 사용했다.
사냥 행사를 주관한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탄광회사와 선박회사를 소유한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원개발과 해운으로 떼돈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이 행사에 “칠, 팔만 원의 큰돈”을 들였다. 당시 쌀 한 석에 15원 정도였으니 거금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3억원쯤 된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쌀 수탈로 쌀값이 폭등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던 3·1 운동 직전의 피폐한 상황이었다.
야마모토는 이 행사의 취지를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매일신보> 1917년 11월3일치)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은 이 책의 해제에서 이렇게 밝혔다.
겉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짐승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의 동기는 개인의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의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복합적인 것이었다.”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종종 식민지에서 맹수사냥을 벌이곤 했다. 20세기 초부터 조선 땅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커밋 루스벨트를 비롯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 등이 호랑이 사냥을 하러 왔다. 이들이 직접 사냥총을 쥐었다면 야마모토는 사냥꾼과 몰이꾼을 고용하고 자신은 지휘만 하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 원산에 집결한 조선인 11명. 두번째열 왼쪽에서 네번째 사람이 조선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 강용근이다. 또한 그 옆에서 하얀 두건을 두른 이가 백운학이다.
당시 조선의 포수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사격 실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구식 단발 엽총으로 호랑이 같은 큰 맹수를 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급소를 단번에 맞춰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조선시대부터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를 따로 두어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도 작용했다. 이들이 정호군의 핵심을 이뤘지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에 급급했지 일제에 이용당한다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멈칫거림도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 함흥에서의 사냥 원정대 환영식
원정대는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총독을 만나는 등 일제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지역 행정당국과 유지가 주최한 성대한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 북청 성문밖의 환영식
일본인 대부호의 엽기적인 사냥 이벤트는 큰 구경거리여서 조선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해마다 사람 200명 이상, 가축 7000마리 이상이 호랑이 등 맹수의 피해를 입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언론의 호의적이 보도가 이어졌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아 이들의 여망에 부응하려고 경쟁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 사냥터로 떠나는 원정대
↑ 포수 강용근과 흰옷을 입은 이윤회가 숙소를 방문해 사냥한 산양을 내려놓고 야마모토와 기념촬영을 했다.
포수 백운학은 함경북도 성진에 상륙한 뒤 남운령에서 열흘 만에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고 다른 세 명의 사냥꾼과 함께 산 정상의 목을 지키자 몰이꾼 10여 명이 산 밑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산허리 숲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왔고, 백운학이 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세 발을 연달아 쏘아 잡았다.
↑ 호랑이를 잡은 백운학과 그의 반에 속한 포수들. 상으로 받은 술잔을 든 이가 백운학이다.
다른 포수 최순원도 호랑이를 잡았다. 그는 함경남도 죽암동에서 이틀 만에 상수리나무 숲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멀리서 쏘았으나 총에 맞은 호랑이가 바위굴에 숨어들었다. 그는 돌을 굴려 굴 입구를 막고 석공과 인부를 고용해 굴 옆에 구멍을 뚫은 뒤 사격을 해 호랑이를 죽였다.
총을 맞고 굴에 뛰어든 지 일주일 만에 호랑이가 잡힌 것이다. 야마모토는 최순원의 무용담에 감동해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 선물로 주었다.
↑ 호랑이를 잡은 최순원(오른쪽)이 야마모토와 기념 촬영을 했다.
함경도 일대에서 잡은 호랑이, 표범, 곰, 노루, 산양 등을 기차에 산더미처럼 쌓은 기차가 12월3일 경성에 도착했다. 신문이 매일처럼 사냥 소식을 보도했기 때문에 이들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폭죽이 터지고 조선 음악대의 떠들썩한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카이젤 수염을 한 야마모토는 가슴을 펴고 환영 나온 장관들과 사진을 찍었다.”
전라남도 능주 천태산에서는 일본인 포수 곤도가 이틀 만에 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 호랑이 굴을 발견했고 이곳에 숨어있던 몸길이 2.85m의 거대한 표범을 쏘았다.
↑ 전남 능주에서 잡은 대형 표범과 사냥꾼들. 붕대를 감은 사람은 포획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다.
12월6일 사냥 원정대는 남대문 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기차 화물칸을 가득 채운 포획물은 호랑이 2마리, 표범 2마리, 반달가슴곰 1마리, 멧돼지 3마리, 산양 5마리, 승냥이 1마리, 노루 9마리, 기러기·청둥오리·꿩 다수였다.
↑ 여관 마당에 포획물을 쌓아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사냥감을 그저 가져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2월7일 경성에서는 조선호텔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주빈으로 경성의 명사 120명을 초대해 호랑이 등 포획물의 시식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호랑이 고기를 채소와 함께 양주를 넣어 익힌 요리 등을 맛나게 먹었다. 이 사냥이 정치적 퍼포먼스임을 보여준 대목이다.
호랑이 시식연 참석자들은 방명록에 서명을 했는데, 이 책에 언론인들의 서명이 실려 있다. 사냥 행사를 취재한 기자들의 서명 가운데 한국 이름이 하나 눈에 띈다. 정호군을 따라다니며 <매일신보>에 그 여정을 상세히 기사로 쓴 심천풍(18980~1946)이 그이다
↑ 호랑이 고기 시식연의 언론인 방명록.
오른쪽에 한국 이름 심천풍이 보인다.
그의 본명은 심우섭으로 <상록수>를 쓴 작가 심훈의 맏형으로 나중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 일본 도쿄 제국 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시식회
호랑이 시식회’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12월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는 체신 대신, 농상무 대신, 추밀원 고문관, 육군대장 등 정·재계 요인 200여명이 모여 일본에는 없는 이 신기한 고기맛을 보면서 대일본제국의 힘을 만끽했다. 당시 연회의 메뉴판에는 요리 순서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1. 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푹 익힘, 토마토케첩으로 마리네 함)
2. 영흥 기러기 수프
3. 부산 도미 양주 찜(국물과 함께)
4. 북청 산양 볶음(야채 곁들임)
5. 고원 멧돼지 구이(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곁들임)
6. 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7. 과일, 커피
그러나 호랑이 원정대 이야기는 시식회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범보전기금은 한국 호랑이의 실체를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해 한국 호랑이의 표본을 추적하던 중 야마모토 원정대가 잡아 내용물을 먹은 호랑이의 표본과 조우하게 된다.
야마모토는 호랑이를 비롯한 포획물의 표본을 만들어 자신의 모교인 교토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잘 보관돼 있는 것이다. 표본관을 들른 이항 교수는 ‘조선산’이란 표지가 선명한 호랑이, 표범, 반달가슴곰, 승냥이, 산양, 멧돼지의 표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일본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관의 호랑이. 원장대가 포획한 개체이다.
↑ 일본 도시샤 표본관의 조선 표범 표본
고향에서 이제 맥이 끊긴 호랑이, 표범, 승냥이를 머나먼 땅에서 만난 것은 감상적인 일이었지만, 실질적인 의미도 있다. 이항 교수 등 한국범보전기금 전문가들은 해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멸절된 동물 중 포획한 사람, 장소와 시기, 과정 등 표본과 관련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현재까지 이 도시샤 고등학교의 표본들이 유일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마 멸절된 동물에 관한 기록과 표본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정호군 대장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덕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 와서 호랑이를 사냥해 기록과 표본으로 남겨준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리를 씁쓸하게 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잡은 호랑이 위에 걸터앉아 기념 사진을 찍은 사냥꾼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호랑이와 일본 경찰
↑ 1921년 경주에서 잡힌 마지막 호랑이.
동네에서 다 잡아 놓으니까 일본 순사들이 우 몰려가서 사진 찍으며 폼 잡은 것이었다.
(1924년 강원도에서 마지막으로 잡았다는 설도 있다.)
"조선의 호랑이들은 시베리아의 대호와 크기도 거의 비슷하고 습성도 같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탓인지 털은 더 짧다. 작고 좁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산에도 호랑이가 살고있을 정도로 호랑이가 많다. 그러므로 자연히 호랑이 포수가 많은데, 이 나라의 사냥꾼들은 놀랍게도 관통력과 유효 사정거리가 60야드에 불과하며 당장 박물관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믿어질법한 16세기 구식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사냥한다.
나는 조선의 숙련된 호랑이 포수들이 호랑이가 20야드 가까이 와도 미동도 하지않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자연히 이들의 화승총 숙련도는 내가 아는 유럽의 어느 총기전문가보다도 뛰어난데, 만약 이들에게 최신식 라이플을 쥐어준다면 어느 누구라도 조선의 포수들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러시아의 유명한 사냥꾼「조지 양코프스키」
이 호랑이가 조선 호랑이다.(KBS 자료)
멧돼지를 사냥한 조선 호랑이
아직까지도 태백산에는 조선 호랑이가 기거한 토굴이 남아 있다.
호식총
호랑이 사체를 발견하면 죽은 호랑이를 화장하여 호랑이 뼈를 돌로 쌓아서 묻어준 것이며 지금도 태백산에는 호식총 140여개가 있다.
편집하면서 꼭 넣고 싶었던 움짤
"일이 점점 커지네~" 에고 팔 아포....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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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추억으로살지
첫댓글 호랑이만 불쌍하지.. 좆본인들ㅗ
와...기록이 이렇게 많은 호랑이 다 어디간거죠...
왜놈새끼들 다 죽어버려....
산이 많아서 범도 많았나봐 우리 할아버지도 이북 출신이신데 어릴 때 산에서 범이랑 마주쳤다고 하셨어
흑흑 우리나라 수호해주던 호랑이랑 표범 늑대 삽살개등등 다 돌려놔 쪽본새기들아!!!
근데 만약에 아직 호랑이가 있다면.. 현재 지금엔 어떤 삶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