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움직인다” 혁명적 이론에 교회는 “신성 모독”이라며 비난
코페르니쿠스 사후 브루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 펼쳐
결국 교황청 종교 재판 넘겨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그 자체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비교해서 더 정확한 천문학적 모델이라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당시에 보기에는 다소 복잡하고 기술적인 여러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별과 행성 위치의 계산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또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당시의 상식적인 직관과도 일치한다는 큰 이점을 지녔습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지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에서 사용된 대원과 주전원 등의 개념이 그대로 쓰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복잡한 모델인데다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주장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도 받아들여지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주장하던 지동설의 내용은 그가 살던 당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천동설을 반박하는 내용으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혁명적인 이론이 교회 당국에 의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성직자인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를 모두 집필한 후에도 계속해서 출판을 망설였습니다. 당시 뇌졸중으로 고생하던 그는 결국 1543년 책이 출판된 지 한 달 뒤에 선종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가 교회 당국의 박해를 피해서 일부러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자신의 저서를 출판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생존 당시에 이미 개신교 측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근거를 내세워) 지동설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하게 됩니다. 단적인 예로,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 인물로서 독일과 폴란드 일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그의 책이 출판되기 전인 1539년에 그의 지동설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듣고서는 이렇게 힐난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늘이나 궁창, 태양, 달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걸 보여주려 애쓰는 이 시건방진 점성술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집어 놓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여호수아는 지구가 아니라 (움직이는) 태양이 멈추어 서도록 명령했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언급한 여호수아기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아모리족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으로 넘겨주시던 날, 여호수아가 주님께 아뢰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달아, 아얄론 골짜기 위에 그대로 서 있어라.” 그러자 백성이 원수들에게 복수할 때까지 해가 그대로 서 있고 달이 멈추어 있었다. 이 사실은 야사르의 책에 쓰여 있지 않은가? 해는 거의 온종일 하늘 한가운데에 멈추어서, 지려고 서두르지 않았다.”(여호 10,12-13)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 인물인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1497~1560)도 역시 1549년에 코헬렛의 말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지구)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1,4-5)를 강조하면서 지동설이 성경에 반하는 주장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마르틴 루터와 멜랑히톤이 성경을 언급하면서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하는 내용은 토마스 쿤의 저서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에 언급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가톨릭교회는 그의 사후에도 저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로마가 아니라 당시 가톨릭의 변방 국가인 폴란드에서 책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교회 당국에서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천문학자들이 보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기존의 천동설과 비교할 때 더 낫다고 볼만한 장점이 없었던 탓에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선종한 지 2년 뒤인 1545년에 역사적인 트리엔트공의회가 열리지만, 그 공의회에서도 코페르니쿠스나 지동설이 언급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종 후 50여 년이 지나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등 종교적으로 위험한 여러 주장들을 하면서 결국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부)에 의해 종교 재판을 받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검사성성에서는 브루노의 여러 주장들 중 특별히 우주에 대한 그의 관점이 태양 중심적이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코페르니쿠스의 관점 역시도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참고로, 브루노의 우주론은 우주의 크기가 무한하며, 태양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빛과 열을 방출하는 수많은 별들(stars) 중의 하나라는 관점입니다. 그는 특히 지구(행성, planet)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빛과 열을 받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무한우주론 및 태양중심설은 오늘날의 관점으로서는 크게 이상할 것이 없으나, 유한우주론 및 지구중심설의 관점에 갇혀있던 당시의 교회 관점과는 심각한 대립을 낳게 되었습니다. 브루노의 우주론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서로 태양 중심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했으나, 코페르니쿠스 역시도 유한한 우주를 받아들였었다는 점에서는 두 이론에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의 교회가 교회 분열로 인한 심각한 갈등과 모든 교령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anathema sit)로 시작되는 트리엔트공의회 특유의 엄격성으로 인해 교의와 성경 해석 모두에서 대단히 경직된 분위기였음을 감안해볼 때 검사성성의 그러한 의심은 한편으로는 당연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직된 교회의 상황 안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통해 당시의 우주관을 흔들었던 인물이 바로 갈릴레오였던 것입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