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시간) 엉국 일간 텔레그래프 기사를 요약한다. 사실 굉장히 긴 분량의 기사인데 형제의 성장과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동생이 왜 동성애에 빠지게 됐는지, 또 형 스티브가 어떻게 진실을 규명하기에 이르렀는지 등이 너무 자세하고 구체적이어서 생략했음을 알려드린다.
1988년 12월 9일(현지시간) 저녁 호주 시드니 항만에는 폭풍우가 몰아쳤다. 밤새 비가 쏟아졌고, 시 전체가 정전이 됐다. 다음날 새벽 태양이 떠올랐고, 폭풍우는 물러났다.
오전 9시쯤 브라이언 벗슨과 친구 폴 패터슨, 폴의 13세 아들 스티븐이 시드니 북쪽으로 20분 거리 맨리의 외곽 해변 쪽 노스헤드 절벽 아래에서 낚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노스헤드 절벽은 바다로부터 무려 14층 높이였는데 스티븐의 눈에 시신 한 구가 띄었다.
시신은 바위들을 옆으로 보고 누워 있었다. 갈매기들이 시체를 쪼고 있었고, 잔해들이 사방에 튀어 있었다. 스티븐이 "시체다" 소리를 질렀다.
브라이언과 폴은 미심쩍어했다. 둘은 "동물같은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스티븐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거벗은 젊은 남성 시신이었다.
법의학자 조한 두플로는 두개골이 산산조각났다고 했다. 몇 년 뒤 그는 다큐멘터리 시리즈 'Never Let Him Go'를 통해 "내겐 루틴처럼 늘 있는 사건이었다. 처음부터 자살 사건으로 접근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직이었던 스물네 살의 트로이 하디 순경도 마찬가지로 성급히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스티븐을 따라 다른 경찰관 셋, 응급구조의와 함께 해변에 도착하니 오전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헬리콥터로 시신을 맨리 병원으로 후송하고, 브라이언과 두 경관은 그 남자가 떨어졌음 직한 장소를 찾으러 갔다.
주차장으로 올라가 벼랑 끝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옷가지가 쌓여 있었다. 다툰 흔적도 뚜렷이 없었고, 자살하기 전 남기는 유서도 없었다. 푸른색 바지와 긴 소매 셔츠가 곱게 개여 있었고, 녹색 속옷과 아디다스 운동화 한 켤레가 있었다. 옷가지 옆에는 학생증을 비롯한 몇 안되는 물품들이 있었는데 학생증에는 320km 떨어진 캔버라의 주소와 함께 스콧 존슨이란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캔버라 경찰이 그 주소로 급파됐는데 다우너 외곽의 벽돌집이었다. 집 주인은 마이클 눈으로 음악학자였으며, 경찰에 스콧 존슨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얘기했다. 나중에 눈은 존슨과 사귀는 남자친구였음이 드러났다. 스콧 존슨은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자였으며 당시 시드니에 있는 캔버라 대학과 맥커리 대학을 오가며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주검으로 발견되기 며칠 전, 시드니에 있는 눈의 부모 집에서 지낸 것으로 확인됐다.
마이클 눈이 차를 몰아 밤새 운전해 다음날 아침 맨리 경찰서에 당도했다. 하디 경사의 신문을 받고 스콧의 주검을 확인하고 난 뒤 그는 참사 소식을 알리러 부모 집으로 갔다. 하디 경사는 보고서에 ‘NFA’(더 이상 액션이 없음)라고 기재했다.
순경과 법의학자, 그리고 이듬해 3월 초빙된 부검의는 똑같이, 스물일곱 살 스콧 존슨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요량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 거의 30년이 걸렸다.
지난달의 어느 아침 스티브 존슨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택 3층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서류 더미, 사진들이 넘칠 만큼 있는 하얀 상자, 세상을 등진 동생 스콧이 띄운 편지들, 그가 쓴 수학 낙서들이 있었다.
스티브는 이제 예순다섯 살이 됐다. 세 자녀의 아버지로 곧 할아버지가 된다.
그는 정규직 일자리만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기술적으로는 전혀 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공동 창업한 테크 기업을 1996년 AOL에 매각, 1억 달러를 받았다. 현재 인공지능(AI) 기업 노터블 시스템즈의 최고경영자(CEO)이며, 노스이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선임연구원이며, 주 직업도 있다. 그 일은 그가 팀 스콧이라 부르는 소그룹과 더불어 정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다.
그가 얘기해 온 지 36년이 됐다. 지난해에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면 이제 그는 'A Thousand Miles From Care'란 책을 쓰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도 작업이 진행 중인데 그는 벤 스틸러의 프로덕션 파트너였던 니콜라스 웨인스탁이 제작하고 있는 데 흥분하고 있다.어떤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지 궁리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상황이 달라졌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살인자를 잡고 싶어 인터뷰를 했지만 이제는 진범이 교도소에 있다. 세 갈래 조사, 성공적인 경찰 팀들, 함정 수사, 200만 달러가 그것을 이끌어냈는데 모두 스티브가 밀어붙인 일이었다.
2020년에 스콧 화이트란 남성이 체포됐다. 2022년 스콧 존슨을 살해했다고 유죄를 인정했다. 징역 12년형이 선고됐지만, 그 판결은 나중에 파기 환송됐고 지난해 그는 과실치사 혐의를 유죄로 인정, 형량은 9년으로 줄었다. 그는 오는 2026년에야 가석방 자격을 얻는다.
그는 스콧 존슨을 호텔 바에서 만나 절벽꼭대기까지 걸어갔다. 언쟁 중에 그는 주먹을 휘둘렀는데 스콧이 뒤로 물러서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됐다.
스티브는 그날 일어났던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다. 그는 형량에 실망했다. 너무 짧다는 데 동의했지만 그 역시 평화를 찾게 됐다. 가장 커다란 그의 슬픔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 범인이 단죄 받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 끝난 건가? 이제 그는 그만 둘 수 있고, 부를 누리며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젖는다. ‘내 상황을 봐라. 스콧이 죽은 지 36년이 됐다. 그리고 경찰은 날 이 지경으로 밀어넣었다. 몇 가지 점에서 경찰이 이 일이 벌어지게 했다. 내 생각에 일어날 필요가 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아직 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스콧 존슨의 죽음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부모 그랜트 존슨과 바버라 게이트게이의 별거로 시작됐다. 둘은 1956년 샌타모니카의 한 극장에서 만났다. 그랜트는 스물네 살의 잘 생긴 팝콘 판매원이었으며 바버라는 열일곱 살의 고교생이었다. 이듬해 바버라는 임신해 큰딸 테리를 낳았고 18개월 뒤 스티브가, 1961년 11월 27일 스콧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유목민처럼 살았다. 로스앤젤레스 근처 17개 집을 전전했다. 그랜트는 ‘심오한 지식인’ 같았지만 스티브가 얘기하듯 자녀들에 ‘무심했다’. 그는 엄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면 우리 입을 비누로 씻었다. 한두 번은 바를 거의 통째로 먹어 치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는 13년 뒤 파경을 맞았고 그랜트는 다른 가정을 꾸렸다. 스티브는 아빠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바버라는 살아가기 위해 지방 신문을 둘둘 말아 비닐봉지 안에 넣는 허드렛일을 했다. 자녀들도 힘을 보태 주당 5000부를 말았다. 스티브는 ‘시커먼 손으로 지칠대로 지쳐 학교에 가곤 했다.’ ‘엄마는 종일 그 일을 했다’고 회상했다. 가족은 이렇게 해서 한 달에 40 달러를 벌었다.
스티브는 신문을 말아 새벽 3시에 배달하기 시작했고 스콧도 따라 나서곤 했다. 개들을 쫓기 위해 암모니아를 채운 물총을 쏘기도 했다. 그들은 테리까지 어울려 집에서 늘 합창을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스콧과 나는 청교도 모습을 더 띠게 됐다.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뻐끔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우리는 나쁜 행동으로 해석하는 모든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아이들이 요즘 찐따(nerd)라고 낙인찍는 아이들이었다.
책에서 스티브는 너무 동생 일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가족이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 아이들, 심지어 로즈마리와 함께 지적했는데 스콧에 관한 대화들은 내가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집착하며 덜 고통스러운 슬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우려 때문에 침묵으로 이어지곤 한다.’
텔레그래프 기자는 36년 동안 싸움에 쏟아부은 스티브의 슬픔은 현재 어떤 단계냐고 물었는데 잠시 얼어붙은 듯하더니 ‘잘 알듯이 난 결코 물어본 적이 없었다. 자 보자’라고 말한 뒤 의자 뒤에 묻히듯 앉아 ‘동생이 항상 나와 함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은총을 받은 똑똑한 남성이었다. 때때로 난 그가 살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는 이제 예순세 살이 됐을 것이다.
그는 헤아릴 새도 없이 곧바로 답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자녀들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많은 성취를 이뤘을 것이다. (해서) 스콧 화이트는 그저 스물일곱 살짜리를 죽인 것이 아니다. 그는 80~90년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었던 누군가를 죽였다. 그리고 동생의 죽음을 밝혀내려고 일했던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내게 주어졌으며 내가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일종의 미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