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6(목). 팔여/탐라회 지리산 뱀사골 일원 추계 원유 안내
※1. 조건-(1) 가는 길 및 오는 길 2시간 총 승차 4시간 이내, (2) 전체 관광 탐방 코스가 하차 후 5분 내외 도보 가능, (3) 역사, 유적 및 드라이브 경승 양호, (4) 호연지기(浩然之氣). 삼재지기(三才之氣) 호조건
※2. 가는 길-지하철 대공원역 출발⇢앞산터널⇢화원옥포 IC一대구광주고속도 주행⇢지리산 IC 진출⇢황산대첩비 기타 도착-[대공원역에서 128KM, 1시간58분}
※3. 오는 길-달궁휴게소 식당⇢정령치⇢육모정 계곡(춘향묘)⇢남원 IC⇢대구광주고속도로⇢지리산휴게소대구방향⇢화원옥포IC⇢대공원역[뱀사골에서 157KM,2시간03분]
(1) 황산대첩비-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정감록십승지지)-[대공원역에서 128Km,1시간58분]. 1577년(선조10) 세움. 높이 4.25m. 1380년(우왕 6)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기념비. 일제시 일본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았었는데 1957년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 중건. 고려 말 왜구가 개경 가까운 강화도와 예성강까지 나타났고, 1375년(우왕 1) 대대적으로 침입하자 최무선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토벌했는데 화약을 써서 적함선 모두를 불태워 대승. 이 전투에서 왜구는 배를 잃어 바다로 갈 수 없자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으로 들어 잔인한 약탈 살상을 자행. 이에 이성계를 최고지휘관 삼아 정벌, 왜구가 상주·선산·성주 등을 노략질하고 지리산 사근내역(함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 때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으로 나아가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악전고투하여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왜구의 말 1,600여 필과 많은 무기를 노획, 이를 황산대첩이라 함[인월(引月)지명전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남응운이 전액, 박광옥이 세움.
(2) 송흥록, 박초월 생가-대첩비 옆. 남원 운봉 화수리(비전마을)은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 국창(國唱) 박초월(朴初月)이 살았던 동네로 10여 가구 주민을 이주시키고 그 시대의 초가 형태로 2000년 7월 복원.
(가). 송흥록은 조선 후기 순조·헌종대 판소리 명창. 송광록의 형, 판소리 진양장단 창시자 김성옥의 처남.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8세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아버지 송첨지에게 〈춘향가〉를 배우기 시작. 그의 아버지는 명창 권삼득의 수행 고수였는데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어릴 때부터 소리를 가르쳤다.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글을 배우면서 그의 도움으로 소리 공부에 전념. 입산 5년 소리를 터득했고 10년만에 득음대성. 하산하기 전날 밤, 망령의 옛무덤에서 귀곡성(鬼哭聲)을 꿈에 배웠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상에 나와 처음 대구 선화당에서 '옥중가'를 불렀는데 그 때 만난 명기 맹열과의 일화로 유명. 1858년 봄 의정부좌찬성 김병기가 불러 서울에 와 철종 앞에서 소리를 했으며,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이후 명성이 전국에 알려져 헌종의 총애를 받던 명창 모흥갑으로부터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적벽가〉·〈변강쇠타령〉이었고, 특기는 〈춘향가〉의 '옥중가'였는데 귀곡성으로 유명하다. 그의 창법과 더늠은 박만순에게 전해졌다.
(나). 박초월은 본명 삼순(三順). 아호 미산(眉山). 전남 순천에서 나고 전북 남원 운봉에서 성장. 김정문(金正文)·송만갑(宋萬甲)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임방울(林芳蔚)·정광수(丁珖秀)에게도 배웠다. 타고난 좋은 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전주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음반회사들과 계약 「흥보가」·「심청가」·「춘향가」 등을 취입.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 명창들과 창극운동에 참여. 광복 후 여성국극동지사(女性國劇同志社)를 창단, 1955년에 현재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신인 양성.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로 지정,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인데, 조순애(曺順愛)·한농선(韓弄仙)·성우향(成又香)·남해성(南海星)·조통달(趙通達)·전정민(全貞珉)·김봉례(金鳳禮) 등이 그의 소리를 계승하였고, 이 중 조통달·남해성·전정민·김봉례 등은 그의 후계를 담당하였다.
(3) 지리산지구전적기념비(智異山地區戰跡記念碑)-[대첩비에서 20Km, 28분]. 뱀사골 탐방안내소 자리에 과거엔 지리산지구전적기념관과 전적비가 있었다. 1979년 11월 국방부가 세운 것으로 연건평 475㎡, 소장품 396점, 지상 2층이었으나 노후로 철거되고 탐방안내소로 되면서 현재 지리산전적기념비와 이승만대통령 친필 '충혼'이라는 글씨를 새긴 비석이 남아있다. 기념관은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 이후 지리산 무장공비와 빨치산 소탕을 위해 벌인 공비토벌 전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었고, 기념비는 토벌 작전 중 전사한 6,333주의 영령 추모를 위한 것이다. 본래 광한루 경내에 있었으나 1987년 6월 옮겨졌다. 현재 안내소 전시실에는 빨치산들의 생활용품, 무기류·작전도·기록화·모형물·사진 소량이 전시되어 있다.
(4) 중식-뱀사골 달궁계곡 달궁휴게소 식당-[지리산전적기념비에서 5.2Km, 7분]-[063-626-3435/산약초백숙/토종닭백숙/토종닭매운탕/흑돼지김치전골]-4인 50,000원-60,000원
(5) 지리산 달궁계곡-전북 남원시 산내면 달궁마을. 지리산 전북 쪽 대표 계곡. 달궁마을에서 동북쪽 반선으로 빠지는 계곡. 특히 반선, 달궁 사이 5km 계곡은 짜임새 있고 호젓해서 걷기 길로 인기 높다. 하늘을 가리는 무성한 원시림은 사람 손길이 닿지 아니한 심산 계곡미를 한껏 뽐내고 있다. 노고단 입구 성삼재 지나 천은사 가는 길 및 정령치 넘어 남원, 함양으로 가는 관광로가 포장, 개설되어 있다.
(6) 지리산 정령치-전북 남원 주천면과 산내면 경계 고개-[달궁계곡에서 9Km, 18분]. 정령치는 마한 왕이 진한, 변한의 침략을 막고자 정장군(鄭將軍)을 보내어 지키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함. 정상에 오르면 눈앞에 유순하게 흘러내리는 만복대가 다가오고, 운봉평야가 내려보이는가 하면 꾸불꾸불 포장된 정령치 도로도 보인다. 반야봉의 큰 덩치가 시야에 잡혀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 게 시원하다. 반야봉을 정면에서 볼 수 있고 지리산 주능선 일 백 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부근에 11구의 불상을 새긴 마애여래 불상군이 있다. 정령치의 북쪽 고리봉은 행글라이딩의 적지로 알려져 행글라이더들이 많이 찾으며 휴게소가 있다.
(7) 지리산 육모정 계곡과 춘향묘-전북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정령치에서 12Km,24분]. 남원 주천면 호경리. 「춘향전」 주인공 춘향의 묘. 남원시에는 「춘향전」 연관 유적이 많은데, 이도령과 성춘향이 노닐었던 광한루와 월매집, 그리고 춘향의 영정을 모신 춘향사와 춘향이 살았던 집, 그리고 춘향의 묘가 있다. 대구광주 고속도로 남원나들목 삼거리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구례 방향으로 잠시 달리면 육모정 교차로가 나온다. 교차로를 빠져 주천 방향으로 60번 지방도를 타면 주천 지나 지리산국립공원 매표소 못미쳐에 그 묘가 있다. 춘향묘(春香墓)는 1962년 ‘서옥녀지묘’라 새긴 지석이 발견되어 이후 묘역을 단장한 것인데, 높은 축대 위에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묘소 앞에 ‘만고열녀춘향지묘(萬古烈女春香之墓)’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묘 앞에 풍치절경의 육모정 계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