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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이경희
관심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백년의 사랑’ (上)
1968년 6월 15일 밤.
술에 취한 중년의 사내가 서울 마포구 구수동 언덕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버스 두 대가 엇갈려 다가왔다. 언덕을 넘던 버스 기사는 반대편 버스가 올려 쏘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셔 행인을 보지 못했다. 육중한 버스는 그대로 사내의 뒤통수를 쳤다.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풀은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지만, ‘풀이 눕는다’를 쓴 시인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반백 년도 못 채우고 떠난 김수영(1921~1968) 시인의 최후였다.
그가 산 시간보다 죽은 뒤의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 김수영이 시에서 ‘여편네’라 멸칭하고 때론 ‘아내·처’라 썼던 뮤즈, 1927년생 김현경 여사는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본다. 경기도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서 여전히 김수영 시인의 기억을 안고 홀로 사는 그를 만났다.
혼자 살기엔 넓다 싶은 50평대 집이지만 곳곳에 책이 들어차 빈 공간은 많지 않았다. 거실 테이블엔 최근까지도 펼쳐본 듯 김수영 전집이 놓여 있었다.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를 인터뷰하러 오신다길래 내가 김수영 시인 여편네라는 건 아실 텐데, 우리 나이로 98세라는 것도 알고 오시는 건가? 다시 전화해서 내 나이를 알려드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그는 최근 1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앓느라 체중이 10㎏은 빠졌다고 했다. 3주 전 바지를 갈아입다 넘어져 갈비뼈와 척추에도 금이 갔다고 한다. 여전히 통증이 있다면서도 지팡이 없이 걸어 나와 손님을 맞았고,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응대했다. 보청기를 양쪽에 끼고 있었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그에게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100년의 사랑 이야기를.
우리 김 시인하고의 사랑은 좀 이색적이지. 그 양반이 정말 깊은 사랑을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각자의 첫사랑에서 시작됐다.
처절하게 실패한 김수영의 첫사랑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1921년 11월 27일, 김수영은 태어났다. 양반은 아니었으나 구한말을 거치며 상당한 재산을 모은 지주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첫째와 둘째 형은 태어나자마자 숨졌다. 최하림(1939~2010) 시인이 쓴 『김수영 평전』에 따르면 사실상 장손인 그에게 집안 어른들이 기대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저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해주는 것.
김수영은 첫돌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으나 타고나길 허약했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반 때 장질부사에 폐렴·뇌수막염까지 겹쳐 운신하지 못했다. 내내 전교 1등을 할 만큼 영특했지만 긴 병 앞에 약이 없었다. 1935년, 남들보다 2년 늦게 치른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선린상업학교 전수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주경야독하며 은행이나 국책회사 취직을 꿈꾸는 동급생들 틈에서 김수영은 영어와 문학, 미술에 심취했다. 그리고 시를 썼다.
그즈음 가세도 급격히 기울었다. 1931년 작고한 조부와 달리 부친은 이재에 어두웠다. 재산 대신 빚만 불렸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동원체제를 갖추는 통에 형편은 더 쪼들렸다. 김수영네는 집과 살림살이를 헐값에 팔아가며 버텼다.
가족들은 김수영이 취직해 집안을 다시 일으키길 바랐다. 그러나 불가침의 존재였던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사람은 없었다. 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1년 앞서 동경으로 간 첫사랑 고인숙을 찾아서다.
“김 시인은 그때 동경여자전문대학에 다니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 애인이 만나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굉장히 애를 썼어요.”
나중에 이화여대 화학과 교수가 되는 고광호가 고인숙의 오빠다. 김수영은 막역지우인 고광호에게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 조르고, 동경여전의 기숙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숙은 매몰차게 외면했다. 고인숙이 김수영을 버린 이유는 알 수 없다. 학벌도 집안도 기울어진 김수영과의 만남을 고인숙의 부친이 반대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김수영은 첫사랑 고인숙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김수영 산문 ‘낙타과음’ 부분(1953.12)
두 아저씨를 모시고 문학을 하다
김수영은 일본에서 이종구(1921~2004)의 하숙방에 얹혀살았다. 이종구는 선린상업 2년 선배로 김수영과 나이는 같았다. 부친의 뜻을 꺾지 못해 상업학교에 진학한 터라 상업에 뜻이 없고 영어와 문학에 심취한 김수영과 죽이 잘 맞았다. 이종구는 후에 건국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며 셰익스피어 전문가이자 번역가·수필가로 이름을 날린다.
경기고 출신 사업가였던 김현경의 아버지는 첩을 둘 뒀다. 그 중 한 명의 동생이 이종구였다.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수양어머니’의 집을 드나들던 김현경을 이종구는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했고, 김현경은 그를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다. 이종구는 실연한 김수영에게 서울에 가면 김현경을 소개해주마, 자랑하듯 얘기했다.
김현경이 진명여학교 2학년이던 1942년 5월의 어느 날. 학교를 땡땡이치고 나왔다. 일본인 교사가 가르치는 공민 시간이 유난히 짜증스러워서였다. 효자동 종점 부근을 걷다 나란히 걸어오던 이종구·김수영과 마주쳤다. 둘은 학비를 조달하러 잠시 귀국한 터였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첫 대면이었다.
그날 이후 김현경은 김수영도 ‘아저씨’라 불렀다. 편지도 주고받았다. 김수영이 보내준 존 러스킨의 연설문집 『깨와 백합』 일본어판을 읽고 감상문을 답장으로 보냈더니 잘 썼다고 칭찬하는 편지가 현해탄을 건너 날아오기도 했다.
“이종구·김수영과 문학 전집을 같이 읽고 토의를 했어요. 두 아저씨를 모시고 문학을 한 거죠. 그러니까 문학 동지 같은 거지, 그땐 이성으로 안 봤거든.”
1944년은 전쟁으로 미쳐 날뛰던 일제의 징용과 징집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일본여대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가지 못했다. 공무원이 되면 정신대(일본군 강제위안부)를 피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원 시험을 보고 국민학교 선생을 했어요. 집안이 넉넉한데도 자급자족을 했지.”
경기도 이천 부발국민학교 2학년 담임으로 부임한 첫 수업시간. 교과서를 펼치자 제일 앞 장에 일본 국기와 일본 문자인 히라가나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니혼진데스(日本人です)!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일본말이 아니라 우리말과 한자이며, 세 나라의 땅이 각기 다르고 국기가 다르 듯 그곳에 사는 사람도 다르다고 가르쳤다. 그 순간 아이들의 눈이 번쩍했다. 매일같이 일본말만 해야 한다고 교육받던 아이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나 보다. 현장학습이라는 이름 아래 야외 수업을 나가서도 일본어 대신 우리말로 수업을 했고, 창씨개명을 한 아이들에게는 일본 이름이 아닌 한국 이름을 불러주었다.’
-김현경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 p.18
이 용감한 초임 선생에게 소집장이 날아왔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을 감시했다. 김현경은 ‘요시찰(要視察)’ 대상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분류됐다. 경찰은 만주에서 온 김수영의 편지, 함흥에서 오는 이종구의 편지 내용을 문제 삼았다. 김현경은 문학을 논한 것이지 사상이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경찰이 그걸 이해할 리 없었다.
경찰의 감시와 소집이 점점 심해지자 김현경의 부친은 트럭을 보내 딸을 서울로 데려온다. 학교와 경찰에는 결혼한다는 핑계를 댔다. 이듬해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1945년 8월 15일. 눈물겨운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방정국은 이내 좌우 이념 충돌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
김현경의 주변엔 걸출한 인물이 많았다. ‘조선의 천재 작곡가’라 불린 김순남(1917~미상)은 그의 6촌 오빠였다. 김순남은 월북하는 바람에 남한에선 흔적이 지워지다시피 했다가 1988년 해금됐다. 김순남의 서울 돈암동 집은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아지트였다. 시인 임화(1908~1953)와 그의 둘째 부인이자 소설가인 지하련(1912~1960), 소설가 오장환(1918~미상), 소설가 김남천(1911~1953) 등이 드나들었다. 김현경도 그 집에서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렸다.
“어느 날 임화 시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수입 양복지로 만든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었는데, 눈에 띄었지.”
배인철은 중앙고보를 거쳐 니혼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1945년 해방 후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중 영어 교사, 해양대에서 영어 교수로 근무했다. 보성전문학교 시절 럭비선수로 출전해 전 일본 대회를 석권한 배인복(1911~1997)의 동생이라기에 김현경은 더욱 호감을 느꼈다. 배인철의 형 배인복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두고 무역업을 하며 독립지사들의 자금을 댄 ‘상인독립군'이었다.(경인일보, 2019.10.10)
임화의 집에서 나오는 길, 배인철은 김현경에게 서울역까지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김현경은 그러마, 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역까지 갔는데, 인천 가는 차가 끊어졌어요. ‘영등포에 가면 뭐가 있을까?’ 하곤 영등포를 또 갔어. 그런데 영등포에도 차편이 없는 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걸어서 인천까지 갔어. 걷는 동안 문학과 예술, 사랑 이야기를 했죠. 그때만 해도 배인철이 문학을 안 했거든요.”
인천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배인철은 김현경에게 한옥으로 된 여관방을 잡아주고, 자신은 집으로 갔다. 이튿날 새벽같이 김현경을 찾아와 다시 서울로 데려다줬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둘은 그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다.
“배인철은 아주 대단한 휴머니스트였어요.”
그는 “아름다움은 모든 것에 앞선다”고 말하던, 눈물 많은 로맨티시스트였다. 길 가다 헐벗은 이를 보면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주곤 했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947년 5월 10일 저녁. 김현경과 배인철은 남산 장충단공원을 산책하며 여느 때처럼 데이트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총성이 울렸다.
머리에 총을 맞은 배인철은 즉사했다. 김현경은 옆구리 관통상을 입었다.
김현경은 첫사랑을 눈앞에서 잃고, 그 자신도 총을 맞은 피해자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손가락질했다.
“그때는 사랑이 범죄였어요…”
김현경의 첫사랑, 배인철 시인
남산의 총격 사건을 다룬 '독립신문' 1947년 5월 13일자 기사. "이화여대 2학년생 김현경양과 남산 뒷산을 통행중 돌연 3발의 총을 맞아 배씨는 즉사하고 김양은 부상을 입었다. 배씨는 민주건국을 위하여 반동과 싸워왔고 때로는 테러들의 납치 ·구타까지 당한 젊은 시인으로서 장래가 촉망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배인철(1920~1947)은 해방 이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흑인 병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흑인 노예의 역사에 천착했다.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흑인이나 일제와 미국에 굴욕을 겪는 조선 민족이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배인철이 남긴 시는 1947년 1월 1일 독립신보에 실린 ‘노예해안’을 비롯, ‘흑인녀’ ‘인종선-흑인 존슨에게’ ‘흑인부대’ ‘쪼 루이스에게’ 등 5편뿐이고, 테러로 짧은 청춘을 마쳤기에 시를 쓴 기간도 반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흑인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뉴기니, 하와이, 필리핀
누구를 위하여 돌아다니며
짓밟힌 몸이냐
이 땅에서도 우리의 누이를
낯선 이토(異土)에서
원수에게 꺾인 꽃들이
해방이 되었다는 고향에
다시금 창살 없는 우리함(*檻)에
-배인철 ‘흑인녀' 부분
*檻: 난간 함. 난간, 짐승을 가두는 우리, 덫·함정.
※‘백년의 사랑’ 다음 이야기는 6월 14일(금) 발행됩니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P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