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비게이션에 화성을 찍다 - 남유정
귀환 없는 화성 여행을 하려면
혼자 집을 지을 줄 알아야 한다 고독에 길들여진 사람이어야 한다 결딜 줄 알아야 한다
거친 바람을 열어보면 처음인 곳 한 번도 온 사람이 없는 곳 떠나간 사람도 없는 곳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없는 곳 그래서 귀신도 만날 수 없는 곳
발을 딛는 순간 공포가 자라겠지 고독이 무섭게 번식하겠지 적막이 견딜 수 없겠지
그래도 돌아오지 않을 거야
♧ 하뿔싸 - 洪海里 -치매행致梅行 · 183
내 팔을 끌어다 베개를 하든가 손을 꼭 잡고서야 아내는 잠이 듭니다 “손 놓고 자!” “아이, 싫어!” “나 도망갈까 봐 그래?” “응!”
어제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도우미가 아내를 길에 놓고 들어왔습니다 두 아들과 딸과 사위 경찰과 케어센터에서 찾아 나선 지 여덟 시간, 길이 가는지 내가 가는지도 모르는 채 목이 마른지 속이 타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허둥지둥 다급하게 헤매는 동안 왜 자꾸 나쁜 생각만 드는 것이었을까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눈에 띄어 순찰차를 타고 아내는 겨우, 겨우 집에 돌아왔습니다 무임승차로 여기저길 갔다 왔다 했는지 정류장에서 무작정 앉아 있었는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그래도 아내는 천하태평이었겠지요
엄마를 끌어안고 우는 딸애를 보며 아내는 태평스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긴긴 하루해가 저물었습니다
오늘 밤에는 내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여덟 시간 동안 돌아다닌 길을 따라 꿈속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 2016. 4. 30. 우리시회 三角山詩花祭를 올리는 날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행사에 불참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기원해 봅니다. -隱山
♧ 모슬포 소식 - 박호영
방어가 많이 잡히는 겨울이 되면 그는 늘 연락을 하곤 했다 그 동안 잘 있었냐고 아무 탈 없으면 됐다고 싱거운 안부를 전하는 그이지만 전화에 담긴 그의 목소리에서는 싱싱한 바다 냄새가 났다 나는 그때마다 한번 꼭 내려가겠노라고 모슬포 포구에서 한잔 하자고 건성으로 응답을 할 뿐 여러 해 그를 찾지 못했다 어느덧 그도 나도 해거름의 나이 나는 이제야 불현듯 깨닫는다 그가 나의 무심함을 탓하지 않고 잊지 않고 소식을 전한 것은 점점 살기 어려운 세상에 기죽지 말고 방어처럼 펄떡이며 살라는 간절한 당부였다는 것을
♧ 염화미소(拈華微笑) - 노연화
부소산 내소사 수행정진 스님 거처 마루 앞 댓돌에 돌이끼 하트 무늬 어느 스님 가슴에 몰래 숨긴 비밀이 하얗게 도드라져 꽃이 피었을까
쉿, 이건 비밀이오 내가 어여삐 내게만 알려준다며 일반인 출입금지 마당에 몰래 들여놓고 스님 한 분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는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절 뒷산 단풍이 유난히 붉어라 애기부처 같은 저 맑은 심안 댓돌에도 볏이 돋았으니 해탈이구나
♧ 오동꽃 - 이문희
나를 낳고 심었다는 오동나무 한 그루
아비와 어미의 애간장이 보라꽃으로 피었다
세간 들여 자식 시집 보내놓고 쌓이고 쌓인 그리움들을
오동나무 물관에다 차곡차곡 쟁여 놓은 것일까
아중저수지 옆구리에 끼여
수척해진 몰골을 하고 그렁그렁 저리 나를 굽어보신다
♧ 아내여, 걱정 마오 - 나영애
당신 두고 먼저 떠날까 사랑한다더니 그 마저 잃을까봐 걱정이오?
일에 빠져 살다가 낙이라면 김치 쪽에 술 한 잔 걸치는 것인데 그깟 용종 몇 개 뗐다고 술 타고 꽐꽐꽐 건너오는 우애를 안 받을 순 없잖소
머리카락 허연 녀석 홀로 빈방 지키는 서러운 이야기 술 한 잔에 섞지 않고 어찌 들으란 말이오
그 많던 사람들 떠나갔어도 빈자리 채워주며 칠십령 오늘까지 동반해온 내 친구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오 나 오래 살며 당신 곁을 지키리다 오늘 밤 딱 한 잔 어떻소?
♧ 회복실에서 - 도경희
잠 속에서 별안간 무의식이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다 큰 돌을 굴리듯 소리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얼마나 힘센 무의식인지 진정제도 듣지 않는
소낙비 막 지나간 햇살 퍼져 내리는 창가에 엄마, 내가 얌전히 있지 못해 말썽 부리면 일곱 살이라고 말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소년 봄 같은 눈을 떠서
선생님, 저 죽었어요? 여기가 천국이에요? 수수꽃다리 향기를 물고 와 잠시 머물던 회복실을 나서 팔랑팔랑 날아간다
♧ 애기똥풀 - 임채우 -북한산 일기ㆍ6
5월도 깊은데 산 어귀 남새밭 가생이에 노란 리본 애기똥풀 지천입니다. 온 산이 초록으로 물결치는데 모개모개 모여서 맥없이 흔들리는 게 넋 나가는 혼령들입니다. 거센 파도 아래 잠들지 못하는 어린 영혼이 저리 많으니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나요. 오호, 네 모습이 안쓰러워 가만히 어루만지면 그제야 사르르 눈 감으며 내 손끝에 노란 슬픔 묻어납니다. * '우리詩' 2017년 4월호(통권346호)에서 *사진 : 가파도 청보리 축제 첫날(4.8)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