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이승만, 1918년 10월경 美 선교사 섀록스 통해 함태영·송진우 등에게 국내에서 결정적인 對日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문… 김성수, 1918년 12월 ‘이승만의 밀사’와 만나
⊙ 3·1운동 후 여러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국무총리·대통령으로 추대
⊙ 1924년 하와이에서 대한인동지회 결성하면서 3·1운동의 비폭력 정신 계승 강조
⊙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1948년 제헌의회 개회사)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상륙한 후, 존 R.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보좌관인 조지 Z. 윌리엄스 해군 중령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렴했다. 선교사의 아들인 윌리엄스 중령은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를 만난 한국인들은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해 9월 14일 여운형(呂運亨)·박헌영(朴憲永) 등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주석으로 이승만을 옹립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 무렵 이승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부(國父)’였다. 그의 이름은 ‘신화(神話)’가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언제부터 그런 존재가 된 것일까? 일제(日帝) 말 그가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해방의 날이 멀지 않음을 알린 것도 ‘이승만 신화’ 형성에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그가 전혀 무명(無名)의 인물이었다면, 그의 방송이 울림이 있었을까?
해방을 맞기 26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민족지도자였다. 3·1운동 이후 수립된 한성정부를 비롯한 여러 임시정부는 그를 집정관총재·국무총리·대통령 등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3·1운동의 총아(寵兒)였다. 한편으로 그는 직간접적으로 3·1운동에 불을 지핀 사람이기도 했다.
이승만과 3·1운동의 관계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이 3·1운동 및 그 서곡이었다고 할 수 있는 2·8독립선언에 미친 영향.
둘째, 이승만이 3·1운동 후 수립된 한성정부·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서 집정관총재·국무총리 등으로 추대된 사실.
셋째, 3·1운동이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넷째,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3·1운동 정신과 한성정부의 법통 계승을 위한 이승만의 노력.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지명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
▲첫째, 1919년 3·1운동 이전 이승만이 기울이고 있던 파리강화(講和)회의 등 참석 노력이 국내 및 도쿄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2·8독립선언 및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또 한국으로 들어가는 선교사 등을 통해 국내 민족지도자들에게 ‘대일(對日)혁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1918년 11월 2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총회장 안창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속국(小弱屬國)동맹회의에 한인(韓人) 대표자 세 명을 파견하기로 했다. 대표자로는 이승만·민찬호(閔燦鎬)·정한경(鄭翰景), 세 사람을 지명했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윌슨이 프린스턴대학 총장 시절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 재학 시절 윌슨 총장의 가족모임에도 여러 번 참석했다. 윌슨 대통령 딸의 결혼식 때에는 공식적인 청첩장을 받았는데, 당시 하와이에서 청첩장을 받은 사람은 총독을 비롯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19년 1월26일자 《뉴욕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은 이렇게 보도했다.
< 파리에 있는 윌슨 대통령은 한 한국대표단으로부터 한국의 독립 요구를 고려해 줄 것을 청원하는 전보를 받았다. 대표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의 이름은 전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윌슨이 ‘올드 나소(Old Nassau·프린스턴대학의 별칭)’의 총장으로 재직할 때에 그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 박사였다. 이 박사는 지금 호놀룰루의 《국민보》의 주필이다.>
사실 각별한 사제(師弟)관계였다고 해서 이승만이 윌슨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思考)의 소산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해 열강(列强)의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던 윌슨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져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라는 것도 패전국(敗戰國)인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식민지·속방(屬邦)에나 적용되는 것이었다.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위임통치’ 청원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한국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와 백악관에 여권 발급을 호소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1919년 3월 2일 윌슨 대통령의 비서실장 조지프 튜멀티에게 편지를 보내 “대통령을 2~3분 만이라도 만나서 청원서를 직접 수교(手交)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읍소(泣訴)하다시피 했지만 거절당했다. 파리의 미국대표단은 3월 3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電文)에서 “한국의 병합은 이번 전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다. 회의가 한국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게 당시 미국의 공식 입장이었고, 냉엄한 현실이었다.
사실 이승만도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주 동포들은 소약속국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의 참가비용으로 순식간에 1만 달러 이상을 모아줄 만큼 두 회의에 거는 기대가 컸다. 이승만이 윌슨에게 직접 수교하고 싶어 했던 청원서, 즉 1918년 11월 25일 정한경·민찬호와 연명으로 작성한 청원서에서 ‘위임통치(Mandatory)’를 언급한 것도 어떻게 해서든 윌슨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이승만은 청원서에서 “평화회의에 참석한 연합국들로 하여금 한국을 현재의 일본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앞으로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조치를 취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합니다”라고 했다.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청원서에 언급하는 문제에 대해 자기를 파견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동의를 얻었다. 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청원서에서 “한국인은… 일본이 관리국의 일원이 되지 않는 조건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국제관리(International Supervision) 아래 놓이기를 바랄 것”이라고 했다.
후일 이 위임통치 문제는 두고두고 이승만의 발목을 잡았다. 신채호(申采浩)는 “이완용(李完用)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는 놈”이라면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비난했다. 아직까지도 ‘위임통치’ 건은 이승만을 비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이승만의 정적(政敵)이라고 할 수 있는 안창호나 김규식이 위임통치 제안에 동조하거나 흡사한 제안을 한 사실은 편리하게 망각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국내의 일본경찰도 이승만 주목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던 이승만의 노력은 이렇게 해서 좌절됐다. 하지만 그의 동향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국내와 일본 유학생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학생들의 반일(反日) 동향에 대해 언급한 일본경찰의 정보 보고(1918년 11월 30일)는 “최근 서울에서는 다가오는 파리강화회의에 약소국들도 동맹하여 참석하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이 참석하게 되어, 그 비용으로 황해도에 사는 어떤 부자는 이미 3만원을 조달했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1919년 2월5일자 평안남도 경찰 보고도 “관내 일부 한인 사이에서 재외한인 및 재일유학생 등과 함께 평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하려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이승만의 이름을 거론했다.
< 이승만은 신학 및 철학 박사의 학위를 가진 학자로서 미국인들로부터도 존경받고 있고, 특히 대통령 윌슨과는 친교가 있음. 연전에 대통령 딸의 혼인식에는 특별히 초대되어 참석한 관계도 있고, 반드시 대통령을 움직일 자신을 가졌음.>
약간의 과장과 착오는 있지만, 이는 이승만의 활동 내용이 국내에 상당히 널리 전파(傳播)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8독립선언 참여자들의 회고
‘한국인들 독립을 주장’이라는 기사가 실린 1918년 12월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위)와 ‘민족자결을 인정하라-소국예속국민동맹의 결의’라는 기사가 실린 1918년 12월18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 |
총독부의 무단(武斷)통치 아래 있던 국내의 지방에까지 전파되고 있던 소식을 국내보다는 한결 자유롭던 일본의 유학생들이 놓칠 리 없었다. 2·8독립선언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소설가 전영택(田榮澤)의 회고다.
< 이때에 고베(神戶)에서 영인(英人)의 손으로 발행되는 영자신문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지에 이승만 박사가 한국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간다는 기사가 조그맣게 기재된 것을 미션학교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에 있는 우리 학생들이 서양인 교수 집에서 발견하게 되매, 이 뉴스는 곧 비밀리에 유학생 중의 몇 사람에게 알려져 그들에게 큰 충동을 주었다.>
후일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백관수(白寬洙)도 비슷한 회고를 남겼다.
< 12월 1일 왜국 고베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저팬 애드버타이저》지는 수행으로 우리에게 중대한 보도를 하였으니, 그것은 곧 “미주에 교거(僑居)하는 한인 중에 이승만·안창호·정한경 3씨가 한국민족대표로 한국 독립을 제소코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학생계는 아연 긴장되어 암암리에 서로 장래의 행동을 위하여 동지가 모이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으며, 각교 각급의 동창들은 막연하나마 아무것이나 하여야 된다고 하며 그저 있을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래 학생의 회합인 학우회의 조직체밖에 없는 유학생계는 그대로 반개월을 허송하여 동원 15일을 당하였다. 이날에도 우리에게 중대한 소식이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 기재되었으니, 그것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교거하는 한인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 거액을 모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유학생계는 더욱 긴장되었다.>
김도연(金度演) 초대 재무부 장관, 변희용(卞熙鎔) 전 성균관대 총장, 최승만(崔承萬) 전 인하공대 학장 등도 비슷한 회고를 남겼다고 한다. 《이승만과 김구》의 저자 손세일(孫世一) 전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승만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들의 회고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저팬 애드버타이저》나 《도쿄아사히신문》이 아닌 《오사카(大阪)아사히신문》에 미주 한인들의 소약속국동맹회의 참석 관련 기사들이 실린 적은 있지만, ‘이승만’ 이름 석 자가 언급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 神話’의 작용
2·8독립선언 주역들이 1920년 3월 26일 도쿄형무소에서 출감한 뒤 찍은 기념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인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 장영규(앞줄 맨 오른쪽), 최승만(그 왼쪽), 강종섭(뒷줄 가운데) 등.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로라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런 회고를 남긴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도쿄 유학생들은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이승만’ 이름 석 자를 연상하고, 그것을 평생 ‘사실(Fact)’로 기억했다는 것은 그때 이미 강고한 ‘이승만 신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1912년 미국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본에 들러 도쿄 조선YMCA 주최로 가마쿠라(鎌倉)에서 열린 학생춘령회 행사를 열성적으로 지도하는 한편, 유학생들을 상대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 바 있다. 이때 일본에서는 조소앙(趙素昻)·송진우(宋鎭禹)·이광수(李光洙)·안재홍(安在鴻)·신익희(申翼熙)·최린(崔麟)·김병로(金炳魯)·현상윤(玄相允)·이인(李仁)·전영택 등 후일 이름을 떨치게 되는 쟁쟁한 인물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구한말(舊韓末) 독립협회 시절부터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이겨내면서 눈부신 활동을 펼쳐왔고,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이승만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승만이 다녀간 후 이들은 7개로 나누어져 있던 유학생 친목단체를 합쳐 도쿄조선인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를 결성했다. 이 학우회가 2·8독립선언을 주동하게 된다.
1919년 2·8독립선언을 앞두고 있을 무렵, 도쿄유학생들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하는 《태평양잡지》를 밀반입해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김도연 초대 재무부 장관의 회고에 의하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여운홍(呂運弘·여운형의 동생)은 도쿄에 들러 2·8독립선언을 준비 중이던 이종근(李琮根)에게 이승만 등 미주독립운동가들의 동향을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1919년 2월 8일 도쿄유학생 600여 명은 조선YMCA에 모여 조선 독립을 선포했다(당시 재일유학생은 총 769명, 도쿄유학생은 642명이었다). 최팔용(崔八鎔)이 개회를 선언한 후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눈길에 맨발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1912년 이래 도쿄유학생 사회에 강렬하게 남은 이승만의 기억이 미주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 소약속국동맹회의 등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과 어우러져 그들로 하여금 형극(荊棘)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이다.
중앙학교-천도교-기독교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모색한 김성수(오른쪽)와 송진우. |
2·8독립선언의 주동자들은 거사에 앞서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들여보냈다. 송계백은 와세다대 대학 선배인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을 찾아가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를 전했다. 현상윤은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마침 그때 송진우를 찾아온 최남선(崔南善)에게 이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다. 현상윤은 자신의 은사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천도교(天道敎) 핵심 가운데 한 명인 최린은 교주(敎主) 손병희(孫秉熙)에게 보고했다. 손병희는 “어린아이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 하니, 우리로서 어떻게 보기만 할 수 있느냐”면서 천도교를 동원한 독립운동을 결심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3·1운동의 양대 주축(主軸)은 천도교와 기독교였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이 중앙학교의 송진우·현상윤 등 김성수(金性洙) 계열 인사들이었다. 기독교의 중심 인물인 이승훈(李昇薰) 장로는 1919년 2월 11일 상경, 김성수 집에서 김성수·송진우·현상윤 등으로부터 천도교의 계획을 전해 듣고 기독교계의 합류를 결단했다. 한편 김성수·송진우 등은 민족대표 33인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는 민족대표 33인이 잡혀간 후 사후 대책을 담당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성수·송진우·현상윤 등이 송계백으로부터 2·8독립선언 계획을 듣고 바로 행동에 들어간 것은 그들도 나름 민족운동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승만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권오기 편저)에 의하면,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 이승만이 밀사를 보내왔다.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상황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 바란다”는 밀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김성수·송진우·현상윤, 세 사람은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거족적 민족운동 방안을 논의하던 끝에 천도교를 움직이기로 하고, 최린의 제자인 현상윤을 최린과 접촉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밀사
이 책에는 ‘밀사’가 누구였는지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유영익(柳永益)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쓴 《이승만의 삶과 꿈》을 보면 눈길을 끄는 얘기가 나온다. 이승만이 1918년 10월경 하와이를 방문하고 있던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프레드 섀록스 박사를 통해 국내 지도자인 함태영(咸台永)·양전백(梁甸伯)·송진우 등에게 알려 국내에서 결정적인 대일(對日)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문했다는 내용이다.
이승만이 거론한 세 사람 중 양전백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서울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전신)에서 일하던 섀록스는 평북 선천에서 미동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던 양전백과 교분이 있었다. 송진우는 중앙학교 측 인사 중 하나로 3·1운동 모의에 깊이 관여했다. 함태영도 민족대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이 체포됐을 때 사후 대책을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함태영은 구한말(舊韓末) 한성재판소 판사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 등 독립협회 관계자들에게 온정적인 판결을 내린, 이승만의 국내 지지세력 중 하나였다. 후일 이승만 정권 시절 제3대 부통령을 지냈다.
김성수를 찾아온 ‘이승만의 밀사’가 혹시 섀록스나 그와 관련된 인물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승만은 송진우 등 중앙학교 계열 인사들을 통해 3·1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함태영·양전백 등 기독교계 인사들도 이승만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이런 추론(推論)에 대해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흥미로운 얘기”라면서도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승만의 부탁을 받은 섀록스가 양전백과 함태영에게 그 뜻을 전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이 국내에서 일대 국민적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그의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워싱턴DC에 있는 그가 국내 운동에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임시정부에서 행정수반 이상으로 추대돼
한성정부의 수립을 알리는 국민대회 선포문. ‘집정관총재 이승만’의 이름이 보인다. |
▲둘째,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수립된 여러 개의 임시정부에서 행정수반 내지 국가원수로 추대되었다. 이는 당시 이승만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해방 후 이승만이 ‘국부’로 존숭받게 되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임시정부’가 속속 수립됐다.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 정부(1919년 3월 21일), 조선민국 임시정부(4월 9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4월 11일), 신한민국 임시정부(4월 17일), 한성정부(4월 23일) 등이 그것이다.
이 정부들이 모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3·1운동을 전후해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독립운동가가 만든 ‘페이퍼 거버먼트(Paper Government·종이정부)’라고 함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페이퍼 거버먼트’라 해도 여기에 이름이 오른 이들은 당시 국내외 각처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그만큼 성가(聲價)를 인정받고 있는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대한국민의회 정부(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에서는 국무경(혹은 국무총리), 조선민국 임시정부(정도령[正都領] 손병희)에서는 부도령(副都領) 겸 내각총무경(국무총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대통령은 없음), 신한민국 임시정부(집정관 이동휘)에서는 국무총리,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로 이름을 올렸다.
손병희는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필두(筆頭)로 명성이 높았고, 박영효(朴泳孝)는 그 실체와 관계없이 구한말부터의 활동과 경력 덕분에 국가적 원로(元老)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은 44세로 이역 땅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일개 망명객이었다. 그가 3·1운동 이후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생겨난 임시정부에서 행정수반급 이상으로 추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 연구가인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 손세일 전 국회의원 등은 ① 독립협회 활동과 투옥 및 투쟁 경력 ② 미국 프린스턴대학 박사라는 후광 ③ 민족자결주의의 주창자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의 교분 ④ 카리스마 ⑤ 재미교포 사회에서의 명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금조달 능력 등을 그 이유로 꼽는다. 특히 3·1운동 직후에는 ‘민족자결주의의 주창자인 윌슨 대통령과의 교분’이 크게 작용했다.
한성임시정부
각지에 설립된 임시정부들 가운데 그래도 나름 실체나 명분을 갖춘 것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성정부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만주·러시아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법을 제정한 후, 선거에 의해 각료들을 선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때 여운형은 처음에는 “정부로 하면 주권·국토·인민이 필요한데, 우리가 조직하려고 하는 독립운동기관에는 이것이 없다”는 이유에서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오늘날 일각에서 내세우는 ‘1919년 건국설’과 관련해 흥미로운 주장이다.
한성정부는 식민지 조선 땅의 수도(首都)인 한성 땅에서 ‘13도 대표자’의 이름으로 수립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한 사람은 독립운동가 이규갑(李奎甲), 대한제국 시대에 판사·검사를 지낸 홍면희(洪冕熹·일명 홍진[洪震]·임시정부 국무령 역임)였다. 이들의 배후에는 이상재·신흥우(申興雨)·오기선(吳基善) 등 YMCA 계열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4월 2일 인천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4월 23일 서울 종로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 수립을 공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청년·학생 5명이 4월 23일 서울 보신각 주변에서 “국민대회” “공화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동했지만, 이내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같은 달 말 서울 시내에는 <국민대회취지서> <선포문> 등이 살포됐다. 하지만 당초 계획한 대규모 시위는 일으키지 못했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대한공화국 대통령’ ‘대한민국 집정관총재’ 이승만을 알리는 홍보엽서. |
이승만은 1919년 3월 1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하와이총회장 이종관을 통해 3·1운동 소식을 접했다. 안창호 등에게 3·1운동 소식을 알린 사람은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파견되어 있던 독립운동가 현순(玄楯) 목사였다. 현순은 3월 29일과 4월 4일에는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이승만이 국무경 겸 외무경으로 추대됐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여기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란, ‘노령(露領)정부’로 알려진 대한국민의회 정부를 말한다.
이 전보를 받은 후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국무경 겸 외무경’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4월 7일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AP통신 기자와 만나 “이번 독립운동에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국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한국을 동양의 첫 번째 기독교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이승만의 지론(持論)이기도 했지만, 미국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사찰문건에도 이승만의 이러한 활동이 나타나 있다.
4월 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제1차 한인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렸다. 이 대회는 그해 2월 13일 이승만이 서재필에게 제안해서 이루어졌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이 있은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독립혁명 당시의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회의를 연 것은 모두 미국인들에 대한 호소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행사는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열린 가장 큰 민족운동 행사였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토마시 마사리크, 아일랜드의 에이먼 데 벌레라 등이 벌인 운동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 행사에는 윤병구·민찬호·정한경·임병직(林炳稷·외무장관 역임)·조병옥(趙炳玉·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역임)·장기영(張基永·체신부 장관 역임)·유일한(柳一韓·유한양행 창업자) 등 15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
이 대회 참가자들은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를 채택해, 한국의 독립을 다시 한 번 호소했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한성정부 관련 문건들을 밀반출해 이승만에게 전달한 신흥우. |
필라델피아 한인대회가 열리고 있던 4월 16일, 이승만은 상하이에 있는 현순에게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Premier)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 5월 29일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에게서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선출됐다는 전보를 받았다. 6월 25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명의의 신임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선포문> <민국법령초집> <직원성명록> 등 임시정부 관련 문건들을 받았다.
이에 앞선 6월 14일,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윌슨 대통령을 비롯해 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 등 열강(列强)의 정부 수반들에게 ‘완전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한국에 섰다’고 통보했다. 6월 18일에는 일본 천황에게 주한 일본인들의 철퇴(撤退)와 새로운 한일(韓日)관계 수립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비슷한 시기인 5월 28일,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배재학당 시절 이래의 오랜 동지인 신흥우를 만났다. 신흥우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한 한성정부 관련 문건들, 즉 <국민대회취지서> <선포문>, 그리고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등을 가지고 왔다. 이 문건들은 신흥우의 부탁을 받은 미국인 선교사 S. A. 벡 부부가 딸의 인형 속에 감추어서 밀반출한 것이다.
신흥우가 출국한 것은 한성정부 수립 선포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22일이었다. 신흥우와 이승만은 4월 23일 국민대회가 사실상 무산된 것은 알지 못했다. 이승만은 ‘13도 대표자’들에 의해 수립된 한성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확신했다. 아마 ‘대통령(President)’으로 번역할 수 있는 ‘집정관총재’라는 직함도 이승만의 마음에 꼭 들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일체의 내정과 일체의 외교”를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집정관총재 이하 각료들에게 위임한다고 규정한 한성정부의 임시약법(臨時約法·임시헌법) 규정을 내세워 워싱턴에 외교기관인 구미(歐美)위원부를 설립했다. 이후 이승만은 평생토록 ‘한성정부’의 법통(法統)을 강조했다.
임시정부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실체가 있는 것은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내세워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사칭(詐稱)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결국 안창호를 중심으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성정부의 통합이 추진됐다. 그해 9월 두 정부가 통합됐다. 정부의 법통과 인적 구성은 한성정부의 것을 따르되, 국호(國號)와 정부 소재지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것을 따르기로 했다. 정부 수반의 명칭은 이승만의 고집에 따라 ‘대통령’으로 하기로 했다.
임시정부의 내분
1921년 1월 1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신년하례회. 둘째 줄 가운데에 대통령 이승만(원 안), 그 왼쪽으로 이동휘, 이시영, 신규식 등의 모습이 보인다. |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후에도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의 대립, 인사와 재정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 서북파(西北派)와 기호파(畿湖派)의 대립,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책동 등으로 영일(寧日)이 없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920년 12월 상하이로 들어갔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중국인들의 관(棺)을 운송하는 화물선을 타고 밀항(密航)한 것이다. 상하이 독립운동계는 “임시대통령 각하, 상해에 오시도다”라며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에게 기대한 것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을 진작시킬 ‘대정(大政) 방안’, 특히 무장투쟁 방안과 ‘자금’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이 잇따라 정부를 탈퇴했다. 1921년 2~9월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임시의정원을 무시하고 장회(場外)에서 임시정부의 개조 혹은 창조(재설립)를 논의한 것이다. 안창호·김규식·박은식(朴殷植)·원세훈(元世勳)·김창숙(金昌淑) 등이 이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그해 5월 16일 국무총리 서리 신규식(申圭植),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군무총장 노백린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 ‘기호파 내각’을 출범시킨 후, 상하이를 떠났다.
1925년 3월 18일,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임시의정원을 장악한 흥사단계(안창호파)와 고려공산당계(여운형파)의 합작에 의한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이로써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자 ‘탄핵으로 쫓겨난 첫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때의 탄핵은 탄핵사유, 임시의정원 의결 정족수 등에서 문제가 많은 위헌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은 “정식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반포할 때까지 이를 적용함”이라고 한 한성정부약법(임시헌법)을 근거로 임시의정원의 탄핵 결정에 저항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그로서는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3·1운동 결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만세 이후로 우리 형제에게 생기가 났어!”
▲셋째, 3·1운동은 이승만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은 1923년 5월 7일 미국으로 유학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 들른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張德秀)와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만세 이후로 우리 형제에게 생기가 났어! 그 생기야. 그 생기가 싹이지. 눈 속을 뚫고라도 필경 새싹은 꽃이 피지. 나는 그것을 믿소.”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군축회의(1921년)의 좌절, 임시정부의 표류와 탄핵, 그리고 1930년대 초 겪은 사업의 파산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해방하는 날까지 20여 년을 버텨낸 힘은 거기서 나왔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3·1운동의 정신을 자신의 독립운동 이념으로 이어받았다. 이는 1924년 11월 17일 결성된 하와이 내 이승만의 친위(親衛) 조직인 대한인동지회 정강(政綱)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의 독립선언서에 공포된바 공약 3장을 실시할지니, 3·1정신을 발휘하야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야 비폭력인 희생적 행동으로 우리의 대업을 성취하자.”
이승만은 그가 간행하던 《태평양잡지》 1925년 8월호에 실린 ‘비폭력을 비평’이라는 논설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민국 원년(元年) 독립운동으로 볼지라도 그 운동이 세계를 놀랠 만한 역사를 이루었고, 그 결과로 인연하야 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신문·잡지가 국중(國中)에 얼마나 생겼으며, 인민의 단결력이 얼마나 공고하여졌느뇨. 이것을 보아도 정의·인도의 능력이 폭탄·폭약보다 더욱 강한 것을 가히 알지라. 대저 동지회의 목적과 정신은 전혀 우리 독립선언서에 발표한 바를 실시하기로 결심함이니….”
이승만은 원래 암살이나 폭탄테러 같은 의열(義烈)투쟁에 비판적이었지만, 3·1운동 이후에는 3·1운동 당시 천명한 비폭력 평화운동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論據)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국회의장 이승만, ‘한성정부 계승’ 강조
▲넷째, 3·1운동과 한성정부의 법통에 대한 이승만의 기억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국회의장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야 모인 것입니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 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인연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海內), 해외(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야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입니다.”
그해 7월 17일 공포된 대한민국의 첫 헌법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3·1운동에서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까지 29년이 걸렸다.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디게 해준 힘은 이승만의 말처럼 3·1운동으로 생겨난 생기와 싹, 그리고 ‘눈 속을 뚫고라도 필경 새싹은 꽃이 핀다’는 믿음이었다.⊙
월간조선 2019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