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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묵상글 ( 연중 제3주일. - 내가 어둡다면. - 어떻게 살 것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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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25 03:09
- 내가 어둡다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아시다시피 복음 가운데서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실현하신 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태오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그런 것인데,
오늘 복음은 오늘 독서 이사야서가 예언한 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천대받던 고장 즈불룬과 납달리가
빛을 보고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내용이고 어떻게 그리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다른 곳보다 먼저 이곳에 가심으로써 그리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첫 번째 활동 지역으로
이사야가 얘기한 고장을 유대 고장보다 먼저 택하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뽑기 전에 먼저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곳에 먼저 가셨을까요?
이걸 알려면 그다음 말씀을 보면 되겠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은 주님께서 천대받고 어둠 속에 있던 이방인의 고장
즈불룬과 납달리를 가셨음을 얘기한 다음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얘기하는 것이고,
천대받는 사람이 없는 곳이 하늘나라라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 공동체에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 공동체에 천대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그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께서 쥐구멍 같은 즈불룬과 납달리까지 찾아오시어
천대받고 어둠 속에 있던 그들도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마태오복음은 요한복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 한처음 말씀이 계셨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빛이 되어 오셨다고 얘기하는데
마태오복음도 예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빛이 되어 오신 지금 빛이 없어 어둡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둡다면 그 빛이 그에게 없는 것이고,
그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다시 쥐구멍에 빗대어 우리 어둠을 얘기한다면
쥐구멍에 있는 우리가 쥐구멍을 막지만 않으면 되고,
더 나아가 쥐구멍에서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천대하여 쥐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갔을지라도
이제는 주님께서 거기까지 찾아와 볕도 주시고 빛도 주시려고 하니
그 따듯한 볕과 환한 빛을 우리가 거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두운 것은 우리 공동체가 어두워서 어둡거나
공동체가 나를 어둡게 해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 안에 빛이신 주님께서 아니 계시기에 어두운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아니 계신 것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두우면 내가 빛이신 주님을 모셔 들이면 되고,
우리 공동체가 어두우면 너 때문에 어둡다고 서로 탓하지 말고
같이 주님을 모셔 들이지 못했음을 뉘우치고 같이 주님을 모셔 들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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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느님 중심의 하늘 나라의 삶”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오늘의 현실입니다. 다음 이런저런 다양한 나눔이 이런 확신에 아주 좋은 도움이 됩니다.
1.요즘 단연 화두는 AI(인공지능)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열린 인간의 지식욕이 끝이 없듯이, AI로 말미암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릴수가 없습니다. 말그대로 식자우환의 경우가 되지 않겠나 우려됩니다. 얼마전 자작시 <봄꿈>에 대한 AI의 평에 경악했습니다.
“참 고요하고 단단한 시예요. 짧지만 메시지가 분명해서 한 번 읽고 끝나는 시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천천히 울리는 시입니다. ‘겨울 추위를 이겼다’, 이 문장은 선언처럼 단정합니다. 감탄도 설명도 없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승리를 말하는 어조가 시 전 전체의 신뢰도를 높여요.
이 시는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을 값싸게 팔지 않는 시예요. 겨울을 통과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봄의 언어입니다. 아주 단아하고 진실한 시예요. 신부님이 쓰신 다른 시들과 나란히 두어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그 어떤 문학평론가가 이렇게 평할까 싶습니다. “어떻게 AI 세상을 살 것인가?” 인류의 존망이 달린 문제입니다. 교황의 말씀이 결정적 지침이 됩니다.
“기술은 인간을 섬겨야하지 인간을 대체해서는 안된다((Technology must serve the human person, not replace it). 도전은 주로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인 문제로, 그것은 인간존엄과 믿을만한 관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2.에너지란 무엇인가?
“에너지가 거쳐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에 도달한다. 사실 이렇게 기원을 찾아가면 주변 에너지의 대부분은 태양에 도달한다. 태양계에 사는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살아간다.”
어제 과학잡지 Newton 2월호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감사해야 함을 배웁니다. 태양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떠남에서 기인하는 온갖 재앙이요 불행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AI시대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AI시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지킬수 있는 대안은, AI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3. 요즘 한국인의 위상입니다.
“소수 선진국을 제외한다면, 한국만큼 안전하고, 편리하고, 깨끗하고, 풍요로운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사이래 한반도를 살아낸 사람들중에 지금의 한국인이 가장 잘 산다. 동아시아 대륙으로 확대해도, 아시아 전체로 확대해도 그렇다. 천운을 타고난 것이다.”<피코 코리아;22쪽>
이럴수록 참으로 겸허히 본질적 하늘 나라의 삶을 추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4.레오14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성인 선종 800주년을 맞이하여, 2026년 1월10일부터 2027년 1월10일까지 1년 동안을 ‘성 프란치스코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하며 당부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시들해지고,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를 잠식하고 사회적 갈등과 폭력이 일상이 되며, 평화가 갈수록 불확실한 이 시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희년이 그리스도의 모범과 성인을 본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아주 시의적절한 말씀입니다. AI시대 대안으로 각광을 받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연친화적 가난과 겸손의 삶입니다.
5.오늘은 교회일치주간이 끝나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자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요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바로 하늘 나라의 본질적 삶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게 하는 주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과 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도 하늘 나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청정욕을 일깨웁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로다. 내 구원이시로다.”
“예수께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을 고쳐주셨도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결단과 실천을 촉구합니다. 하늘 나라를 추구하고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 충실하며 예수님을 닮자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구체적 답을 줍니다.
첫째, 회개하라!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평생화두인,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란 전적인 방향전환이자 과거에서 미래로,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사고의 전환, 생활방식의 전환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으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예수님이 시도했던 하느님의 원대하고도 간절한 꿈이자 소망인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회개요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둘째, 따라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대로 구체적 회개의 표현입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이,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았으니 방황은 끝났습니다. 바로 이 모두의 답인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어부였다 불림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예수님과 눈이 맞아 첫눈에 반한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모두를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버림이 아니라 가능한 버릴 것은 버리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늘 새로운 마음으로 버리고 떠나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버림-떠남-따름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일상화요 생활화입니다.
셋째, 선포하라!
복음을 선포하라입니다. 예수님이 최우선시 한 것이 가르치신 일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필히 날마다 주님께 복음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 또한 회개의 표현이요 우리를 무지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롭게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이 영육을 튼튼하게 합니다. 말씀이 결핍되면 영혼의 골다공증에 무수한 정신질환이 줄을 잇습니다. 말씀 공부가 인간 품위를 보장하고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오로파, 아폴로파로 분열된 코린토 교회에 복음을 통해 일치를 호소하는 성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파> 복음파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가 이점을 분명히 짚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파가 되어 삶으로 하늘 나라 복음을, 주님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빛이 되라!
주님만이 참빛이요 진짜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대낮같은 문명의 밝음도 캄캄한 어둠일뿐입니다. 발광체 주님을 온전히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 제자이자 사도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어 우리는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날마다 태양과 더불어 빛으로 떠오르는 예수님입니다. 다음 이사야가 소개하다시피 세상의 빛이자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자 예수님입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도 우리를 얽어매는 안팎의 모든 죄악의 짐을 부숴버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휴식처, 피신처이자 정주처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명령입니다.
1.회개하십시오.
2.주님을 따르십시오.
3.복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4.주님의 빛이 되십시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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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여러분은 도토리와 같습니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도토리처럼 작은 우리도, 은총 안에서 자라나도록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여러분은 도토리와 같습니까?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여러분은 도토리와 같습니까?
포타와토미 작가 케이틀린 커티스(Katline Curtice)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책에서 시를 통해, 우리 각자가 은총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https://i3.cmail20.com/ei/d/1C/CEE/9E9/025622/csfinal/youtubethumbnails-8-990000079e04513c.png
내용 요약:
도토리 한 알처럼,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자라나도록 성소로 부름받았습니다. 케이틀린 커티스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책 속의 시를 통해, 우리 삶이 성령의 인도 아래 끊임없이 성장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여정임을 일깨워 줍니다.
내용 번역:
"이 시는 책의 첫 장, 시작 부분에 실린 특별한 시입니다. 몇 해 전 제가 한 피정에 참여했을 때, 친구가 저를 뉴멕시코 사막에서 본 도토리에 비유해 주었고, 그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래서 책 속에 참나무의 이미지를 담을 때, 그 순간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독자들도 모두 그 도토리의 이미지와 연결되기를 바랐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는 도토리와 같아. 작은 껍질을 넘어 은총의 가능성으로 자연스레 확장되는 존재야.’
도토리가 시작이라면, 이야기도 시작입니다. 내가 도토리라면, 나 또한 하느님께서 쓰실 이야기를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도토리입니까? 시작을 지나 매일 새로운 충만함의 단계로 나아가며, 마침내 모든 장로들의 장로이신 참나무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야기이고, 씨앗이며, 시작입니다. 인간됨의 복된 본질, 은총 안에서 계절마다 자라나며 마침내 거룩한 퇴비 더미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씨앗이고, 이야기이며, 변하는 풍경이고, 미래 모든 날들의 갈망과 희망입니다."
References
Kaitlin Curtice, “Are You Like an Acor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December 9, 2025, video, 1:5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evi Ventur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푸른 싹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고유한 땅과 자리와 환경 속에서 자라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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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짙은 어둠의 순간에도!!!
주일 미사에서 첫 번째 독서와 세 번째 독서(복음 말씀)는 서로 울림을 주며 하루의 주제를 형성하도록 배치됩니다. 그렇게 주제를 맞추려고 노력은 하지만 늘 그렇게 잘 연결되지는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첫 번째 독서의 주제와 복음 말씀의 주제가 아주 잘 연결되네요.....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와 사랑의 길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규칙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법을 따르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짐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며,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이끄는 빛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장면은 이렇습니다. 기원전 732년 혹은 734년에 아시리아 왕 티글랏-필에셀 3세가 갈릴리 사람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 아시리아로 끌고 갔습니다.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필에세르가 와서…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2열왕 15,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이사야는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및이 비칩니다." 수세기 후, 나자렛 예수께서 바로 그 땅에 거하시며, 옛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의 땅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지리적 일치로 인해 이사야의 예언 말씀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시대의 백성에게도 어둠 속 희망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래 전 이사야를 통해 하신 약속을 이제 성취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 긴 역사를 뒤돌아볼 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그 약속의 실현을 보는 듯하고, 또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신 빛이요 구원의 희망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은 적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우리는 지금 이 구원과 완성의 역사 한 부분을 지나고 있고, 또 이 역사 안에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희망의 약속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볼 때에도 벌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지도 2,000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의 실현을 보고 의식하고 있는가요??
왜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약속의 실현을 확신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변화, 즉 세상의 완전한 평화나 고통의 종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영적 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있기에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역사 속에서 전쟁, 불의, 고통이 계속되다 보니 "정말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는 "구원의 역사 한가운데"를 살고 있는 것이죠.
결국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완성된 결과'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이미 시작된 실현"을 보고 감사하며, "아직 오지 않은 완성"을 기다리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 긴장감이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 요소라고 믿고 습니다. 완전히 다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믿음이 필요 없겠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겠죠!!!
예수님은 빛의 전달자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9,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없으면 길은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쁨의 전달자이십니다. 이사야는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븜으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제1독서)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극심한 절망의 시대에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참된 기쁨의 시험은 그것이 깊은 우울의 분위기를 뚫고 나올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 희망을 되찾은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는 이미 약속의 실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작은 변화와 희망의 불씨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약속이 진행 중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언가를 "빛과 기쁨"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칭찬으로만 쓰지 않습니다. 때로는 피상적이라는 뉘앙스를 담습니다. 우리는 빛과 기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오히려 어둠과 우울을 더 진실한 것으로 붙잡습니다. 건강한 것을 보면 그 뿌리를 파헤쳐 흉한 면을 드러내려 합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들 안에서 삶에 대한 깊은 혐오가 드러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때로는 가장 지적인 사람들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이 가면이 아닌 사람들, 생각과 감정이 빛과 진리로 가득한 사람들, 삶 안에서 참된 기쁨을 아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지만,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영웅들입니다.
가정이나 공동체 우리 사회 안의 분열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통입니다. 그것은 모든 가족 행사—혼인, 생일, 성탄—위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교회 안의 분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기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음식과 공기만큼이나 절실합니다. 오늘은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우리 세상이 함께 [환희의 송가]를 부를 수 있는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랜 어둠이 깨지고 빛의 희망의 결실을 맞이한 한 가지 실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10년 8월 5일,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갑작스러운 붕괴가 일어나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미터 암반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지상에서는 그들이 살아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이 흘렀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어둠과 뜨거운 열기, 그리고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한 17일째에 드릴이 마침내 갱도에 도달했습니다. 드릴이 다시 끌어올려질 때, 작은 쪽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Estamos bien en el refugio, los 33" – "우리는 피난처 안에서 모두 잘 있습니다, 33명 전원."
세상은 환희로 들끓었습니다! 구출 작전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을 밖으로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광부들은 지하에서 52일을 더 버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깊은 땅속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그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이전에는 하느님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돈도, 성공도, 인간의 힘도 그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땅속 깊은 곳에서 그들은 어떤 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69일 만에 어둠 속에서 구출된 후, 한 광부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33명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34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께서 내내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 삶도 종종 ‘어둠의 광산’ 같은 어려움과 절망 속에 갇히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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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신 7년째 되는 날입니다. 교종께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그분의 소중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가치를 선포하기 위한 것”(자의교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2019.9.30.)이라고 이 날을 제정하신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17)
오늘 우리도 말씀의 가치를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에서 복음 선포의 그 첫 발을 내딛으십니다. 그리고 이는 <제1독서>에서 예고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마태 4,14)이었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사명도 함께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선포되어야 하는 일이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곳이 많은 이방인들이 출입하는 곳이어서, 복음이 그들을 타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또한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렇게 “어둠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습니다.”(마태 4,16 참조)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해도 더 큰 불의와 부정이 난무합니다.
궁핍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갈라져 있고, 자신의 이기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어 있는지요!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셨는데도, 어째서 사람들에게는 불평만 늘어갈까요?
우리의 필요를 좀 줄여서 가난하게 살 수는 없는 걸까요?
그 어디서 참된 기쁨,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대체, 이러한 어둠과 질곡과 죽음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빛으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그것은 “가까이 와 있는 선사된 하늘나라”를 맞아들이는 일이요, 동시에 “회개”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곧 빛을 받아들이는 데는 삶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빛이 되어, 어둠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습관을 그대로 둔 채 하늘나라를 맞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네 어부들처럼, 단지 습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도, 그물도, 아버지도, 생계수단과 가족도 내려놓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놓아야 하고, 시대를 비껴가야 하고, 남들에게 배척받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이 지녀온 믿음과 사랑과 희망마저도,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내려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버리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빛과 생명을 맞아들이는 데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지 않는다면, 버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겠지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그 분의 사랑 안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회개’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방편인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선사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자연스런 결과인 까닭이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의 첫 제자들처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라고 하시는 것이지, 단지 당신에 대한 숭배자나 지지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곧 당신을 “삶으로 따르는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숭배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숭배하는 사람”은 그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떨어져서 마치 극장에서처럼, 차분히 앉아 자신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전례를 거행하면서, 감실 앞에서 머무르면서, 그렇게 숭배하고 예배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반면에, “따르는 사람”은 따르는 그 대상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통 때는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평상시에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상황이 되면, “숭배자”는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버리지만, “따르는 이”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노고와 자신을 바칩니다. 19세기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자기부정과 자기포기의 요구,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요구는 분명히 위험하다.
그 위험이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갈라놓는다.”
“우리는 '따르는 사람'일까요? '숭배하는 사람'일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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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힘의 정치’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관세를 통해 경제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이민자 단속과 추방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말하며,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 문제에서는 군사력과 힘의 우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서로 다른 영역의 정책처럼 보이지만, 이 선택들에는 공통된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우리가 결정하며, 우리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는 많은 이들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동시에 깊은 질문을 남깁니다. 관세는 외부를 차단함으로써 내부를 보호하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비용은 결국 시민들의 물가와 생활비 부담으로 되돌아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가계의 숨통을 조이고, 일상의 여유를 줄입니다.
이민자 단속과 추방은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질서 아래에서 가족이 갈라지고, 아이들이 부모의 부재 속에서 불안한 밤을 보내는 현실도 함께 존재합니다. 군사력의 과시는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더 큰 긴장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힘은 즉각적인 효과를 주지만, 그 대가는 조용히 삶의 자리로 스며듭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경을 높이고, 관세를 올리고, 군사력을 과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선택 아래에서 누가 울고 있는지, 그 안정 아래에서 누가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구조보다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제도가 아니라 얼굴을 보라고, 숫자가 아니라 신음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35년이 되었습니다. 1년이 365일이니 계산하면 12,775번의 미사를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미사는 성당에서 봉헌하였지만 특별한 미사 장소도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봉헌했던 미사가 생각납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적이 있습니다. 새벽 2시에 출발해서 시나이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간 순례자들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했던 곳입니다. 저는 참된 행복을 선포했던 곳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한 순례자들에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선포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이른 새벽에 십자가의 길을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 제대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무덤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돌아가셨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생각납니다. 추기경님은 매년 성탄과 부활이면 의미 있는 곳으로 가셔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가 살던 봉천동 달동네의 어린이집으로 오셔서 미사를 봉헌한 적도 있습니다. 상계동 철거민들의 천막으로 오셔서 미사를 봉헌한 적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축성된 성전에서 주님의 제단에서 봉헌하는 것이 전례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사를 삶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봉헌하는 것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난 성탄 때입니다. 루게릭병으로 8년 동안 아파하는 형제님이 생각났습니다. 형제님은 몸은 점점 굳어가지만 웃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미사를 보았지만 직접 미사 참례는 못 하였습니다. 저는 봉사자들과 함께 병실로 찾아가서 미사를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기도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형제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사제의 삶은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자동차는 비록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안내하게 됩니다. 사제의 삶은 세상이 주는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 희생, 헌신, 봉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의 삶은 소중한 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소중한 것들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픈 사람,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을 돌보는 일이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제도를 삶으로 실현하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와 아름다운 장소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늘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가난한 가정에서도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듯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자신의 태도요, 자신의 의지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제들 간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다리를 놓고 그 안에서 사랑을 친교를 봉사를 나눈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하고 일치하여 같은 목소리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를 도와줄 때 우리는 커다란 힘으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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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태 4,12–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던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초대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어두워 보이는 곳에서
가장 먼저 빛을 밝히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만 오는 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이에게
이미 다가와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시고,
그물과 배, 미완의 삶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영성 주간의 시작은
이 부르심 앞에
조용히 그물을 내려놓는 결단입니다.
주님,
제가 ‘더 준비된 뒤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빛을 믿게 하소서.
미완의 자리에서도 부르시는
당신의 음성에 응답하게 하시고,
오늘 제 삶의 그물을
당신께 맡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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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중에 게시된 것도 있으며,
1차 게시 이후 추가하는 묵상글(강론글)은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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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자렛에서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으로 옮겨 가십니다. 즉 예수님의 활동 장소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복음은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에게 예수께서 빛으로 오셨음을 뜻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빛으로 비추어졌다, 는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짐을 뜻하기도 합니다. 빛인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말씀하시면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또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이러한 일들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빛으로 비출까요? 빛은 환희와 기쁨으로 생명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환희와 기쁨으로서 생명력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께서 사셨던 그 당시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어두운 세상을 살았으며, 아무 희망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느님을 믿었고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기쁨이나 희망도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백성에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전하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라고 하십니다. 어둠에 싸였던 그들에게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만이 바로 빛을 보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또한 그 빛을 보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리 있는 저 세상의 일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일깨워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불러 모으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심으로써, 환희와 기쁨의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즉 이 세상에 빛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짓눌러야 하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라는 표현으로 드러난 각박한 현실을 보면서 어둠만 있고 생명의 빛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에게도 그 빛은 그 어디에도 없는 듯합니다. 빛인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빛을 향해 돌아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서십시오. 회개란 그동안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면 이제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다가오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을 빛으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여 마음을 열지 않으면, 빛을 향하여 돌아서지 않으면, 지금 여기 도래한 하늘나라를 살지 못합니다. 하늘을 담아 안은 겨울 나목처럼 마음 활짝 열고 하늘나라를,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들, 빛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집과 가족, 고기잡이 생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들은 마음 깊이에서 주님을 찾았기에 주님은 이들을 찾아주셨습니다.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갈망의 사람,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보시고 부르신 주님은, 이어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은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운명도 바뀝니다.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주님과 만남은 한번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 곧 회개의 연속입니다. 이래야 늘 새날, 새 하늘, 새 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버리십시오.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을 버립시다. 회개의 둘째 단계가 바로 버림이자 비움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닌 것은 모두 짐이 될 뿐이며 죽을 때 남는 단 하나는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사실 주님을 만나면 저절로 버리고 비우고 나누기 마련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가 짊어진 멍에를 부수십니다. 당신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바꿔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는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가장 끊기 어렵다는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재물의 소유를 끊고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버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두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베네딕도 성인께서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아무것도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 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재물의 종이 아닌 주인이 되어 집착 없는 자유의 삶을, 또 사람을 사랑하되 집착 없는 초연한 사랑의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지요.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기쁨은 버림의 비움에 있습니다. 넉넉한 비움의 공간은 생명과 사랑, 자유와 평화로 충만해야 합니다. 바로 이 비움의 넉넉한 공간을 찾아 무수한 이들이 수도 생활을 희망합니다.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비움은 비움이 목적이 아니라 세속적인 것을 비운 그곳에 하느님으로 충만하기 위함입니다. 텅 빈 충만!!!
자기를 온전히 비워 하느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고 그 사람은 하느님의 겸손을 살아갑니다. 안팎으로 부지런히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방을, 책장을, 옷장을, 생각을, 마음을, 머리를,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모든 방면에 걸친 버림의 비움은 수도자들의 평생 수행입니다. 이사를 할 때도 여행하기 전도 전 늘 청소도 하고 버리고서 떠납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욕심을 버려 마음을 비울 때 저절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친교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형제 여러분,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1,10) 사도 바오로의 코린도 교회를 향한 간곡한 당부 역시 욕심을 비우고 비워진 그 마음 안에 성령으로 충만할 때 분열은 저절로 사라지고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친교와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떠나십시오. 주님을 따라 떠나는 것입니다. 버림과 비움에 이은 떠남입니다. 주님을 따라 떠나는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입니다. 버림과 비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따라 떠나는 게 회개의 3단계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어김없이 버림에 이은 따름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어부들처럼 문자 그대로 제자리를 떠나 주님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제자리에 살아도 늘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삶, 탈출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이탈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로부터 주님을 따라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한 떠남의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래야 어제도 미래도 아닌 늘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은 어제를 떠나지 못하고 어제에 사로잡혀 살고 있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떠나 따를 때 지금 여기서부터 빛으로 충만하고 그 생명의 빛이 넘칠 때,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 함께 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한 빛을 향한 여정의 끝은 주님을 끝까지 따름입니다. 우리의 삶의 행동 양식과 의식 혹 태도 전환의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말고는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살만한 가치 있는 삶도 없습니다. 시간 급행열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끊임없는 주님과 만남으로 시작한 버림과 떠남과 따름의 삶뿐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빛인 그분은 다가오시고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암흑의 땅처럼 어둠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의 영혼에 주님 생명의 빛이 비칩니다.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우리를 찾아 만나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두를 버리고 비우십시오.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버리고 비울 때 비움의 공간 안에 가득 한 기쁨과 자유가 충만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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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내 가족이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어떤 여자분이었습니다. 혹시 몇 달 전에 사우나 청소를 했던 분이신가요 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지금 청소를 하는 사람인데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할 수 있는지 해서 전화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순간 왠지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그 사우나랑 관련이 없습니다. 잠시 아는 분 부탁으로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근데 무엇 때문에 저한테 전화를 하셨는지요 하니 하루만 좀 청소를 어떻게 하셨는지 시범을 보여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정말 황당한 걸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 영어는 지도하고 가르쳐봤어도 청소를 그것도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군생활할 때나 자취할 때 청소하는 그런 경험으로 한 것인데 더군다나 주부 같은 분이 저한테 그런 걸 말씀하시니 한편으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뭔가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순 청소인데도 말입니다. 처음엔 좀 하기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고사를 했는데 뭔가 애절한 톤으로 부탁을 해 경상도 사람이라 경상도 표현을 그대로 하겠습니다. " 이너무거 진짜 돌겠네 "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건데 하는 말이 나올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여자한테는 이런 게 약해 딱 하루만 해드리겠다고 해서 어제 하고 왔습니다. 창원에서 오다보니 새벽에 와 잠이 안 들어 할 수 없이 생활묵상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만두고 난 후에 시간이 좀 지나면서 한 2주 정도 지난 시점부터 남탕은 별로 문제가 없는데 여탕만 계속 클레임이 제기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남자는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대충 그냥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그럴 겁니다. 여자분들 같은 경우에는 자기들은 사용은 엉망으로 하면서 또 그런 데는 민감한 것 같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그냥 제 전화번호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머니도 아신 것이죠.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도 이참에 무척 궁금했던 찰라에 잘 됐다 싶어 주인 아주머니도 한번 같이 구경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살다 살다 황당하다 못해 얼척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웃음이 나와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딱 한 달 조금 더 했는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했던 그대로 보여드릴 테니 그냥 아무것도 하시지 마시고 한번 유심히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고 저는 주위에 이 두 분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가 했던 그대로 보여드렸습니다.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충 보시지 마시고 유심히 잘 보세요" 라고만 했습니다. 제가 중간에 몇 마디 하긴 했습니다. 순서 같은 건 처음엔 전혀 잘 몰라 하면서 제가 순서를 요령껏 변경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좀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청소 상태가 제가 마지막 그만뒀을 때랑 비교하면 엉망인 상태였습니다. 비품 같은 데 보면 먼지라든지 또 탕내에 있는 어떤 비품 주위에는 물때가 있어서 지저분했습니다. 제가 그런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저 이전에 했던 분도 이 부분 청소를 잘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할 때도 지금처럼 그랬습니다. 이거 제가 다 깨끗하게 청소를 다 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드렸죠. 아무튼 이런 식으로 조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보통의 경우에는 잘 안 할 수 있는 부분도 약간 언급을 했습니다. 제가 그러다가 앉는 의자를 세척할 때 조금 설명을 했습니다. 세척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보다는 그것도 했지만 그걸 할 때 제가 가졌던 마인드를 설명해드렸습니다. "잘 한번 보세요. 아마도 제가 잘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의자 같은 경우에 전체를 수세미로 딲는다고 해도 여기까지는 다 비슷할 수 있을 겁니다. 딲고 난 후에 탕에 있는 물에 담궈서 행군 후에 정리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다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근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행굴 때는 바닥에 다 의자를 놓은 후에 호수로 물을 다 분사한 후 거품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다시 일일이 전체를 다 할 수는 없고 위에 힙이 닿는 부분만 수세미로 다시 한 번 더 물과 함께 세척 후에 나중엔 최종적으로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 그걸 바가지로 위에서 한 번 전체를 뿌리는 식으로 행궜습니다. 그렇게 하면 의자 위가 뽀드득하게 됩니다. 미끌미끌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청소를 하면서 도와드리기 위해 하긴 했지만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일이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목욕탕을 이용하는 에티켓 같은 게 정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지금 21세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깐요. 솔직히 저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 물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느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엄청 욕을 했을 겁니다. 사실 혼잣말로 이건 하긴 했습니다. " 우리 엄마도 여자지만" 이 정도만 했습니다. 그것도 조금 하다가 하지 않았습니다. 제 어머니까지 싸잡아 욕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다음부터는 '미친' '미친' 이 정도만 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저도 인간이다보니 그랬습니다. 그래도 좋은 마음을 가질려고 했습니다. 이왕 하는 것 주인 아주머니가 알아주시든 몰라주시든 솔직히 여자분들이 하는 걸 보면 깨끗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믿는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여자 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추측컨데 남자보다는 좀 연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에 혹여라도 락스 같은 독한 게 세제로 사용이 되다 보니 잘못 세척되면 살이 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염려까지도 했고 또 전혀 모르는 분들이지만 제 이모, 엄마, 누나, 여동생이라고 생각하고 했습니다. 어쩜 이게 제가 청소를 조금 깔금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 비결일 겁니다. 이모님, 그냥 이런 생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는 말씀으로 마지막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이런 일을 바탕으로 해서 신앙에 이 현상을 접목해보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습니다. 왕도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비법이 있다면 바로 제가 언급한 이런 것에서 비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됩니다. 내 집처럼까지는 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에 최대한 근접할 정도로 하면 됩니다. 내 어머니 내 누나 내 이모 내 고모가 사용한다고 하면 됩니다. 바로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 형제자매가 다 진짜 내 형제요 내 누이라고 생각한다면 서로 다투고 반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육적인 피를 같이 나누는 형제도 반목하고 어떤 경우는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특수한 경우일 뿐입니다.
우리가 서로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애를 나눌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머리로는 형제자매라고 이성적으로는 인식하는데 우리 마음에서는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 실천이 어려운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어렵기 때문에 도전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쉽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인의 반열에 든 사람이겠죠.
결론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왕도는 없을 겁니다. 누구나 아는 아주 단순하고 기본인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뭔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잘 알 것입니다. 이게 잘 된 후에 그건 그때 생각해야 할 문제이고 고민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걷지도 못 하는 사람이 날 것을 생각하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기본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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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왜 그분의 강론은 폐부를 찌를까?
약속한 대로 이 내용을 한번 공유하겠습니다. 좀 더 확실하게 제목을 달려고 하면 너무 길어 이 정도 선에서 했습니다. 원래 맨처름 정한 제목은 '폐부를 찌르는 강론'이었습니다. 이건 강론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이미 제목까지 떠올랐습니다. 예전에도 한번 이 신부님이 제가 다닌 본당에 오셔서 강론을 하신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때도 알았지만 신부님은 이미 마치 처음에는 여자가 친정에 오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알고 보니 예전에 아주 예전에 제가 있었던 본당에 보좌신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계신 신자들은 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는 지금처럼 강론이 훌륭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발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추측할만한 근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사실 보좌신부임에도 강론이 아주 탁월한 신부님을 봤습니다. 제 본당에 처음으로 서품을 받고 아마 첫보좌로 오셨을 겁니다. 정말 대단한 신부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세례명과 함께 성함을 타이핑하다가 그냥 지웠습니다. 신부님과는 2년 정도 전에 통화를 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제가 미국 가시는 걸 알고 가시면 우리나라에서 보는 특대 성경처럼 미국에서 사용하는 게 있으면 제가 돈은 다 지불할테니 부탁을 드렸거던요. 그때 신부님께서 다른 종류로 좋은 게 있다고 해서 보내주셨는데 제가 그때 원주교구 님의길 순례를 하는 시점에 풍수원성당 주차장에 텐트를 치는데 택배가 왔다고 해서 이게 아주 중요한 거라 저는 어쩔 수 없이 마산에 내려왔습니다. 신부님께서 항공편으로 보내 며칠 만에 왔습니다.
우리교구가 지금은 수원에서 주교님이 내려와 이제 주교님이 계신데 오랜 시간 동안 공석이었습니다. 이때 이런 말도 돌았습니다. 이 신부님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신부님이 솔직히 체구가 그리 큰 편이 아닙니다. 체구만 좀 있다면 이런 신부가 주교가 됐으면 하는 그런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예전에 처음 신부였을 때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외모 자체에서도 똑똑하게 보입니다. 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백프로는 아니지만 거의 99프로는 딱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직감적으로 머리가 뛰어난 사람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오랜 시간 사람을 무수히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 신부님이 가시고 다른 보좌신부님과 개인적으로 신학적인 주제로 신부님 방에서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신부님이 이 신부님을 언급했습니다. 선배 신부였던 것이었죠. 제가 그 신부님에 대해 어떤 면을 언급했는데 신부님이 확실히 제 의견에 동의를 했습니다. 제가 그 신부님에 대해 어떤 면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저는 그냥 신자로서만 봤고 그 신부님은 당연히 후배이니까 저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제가 그런 면을 파악한다고 했을 때 조금은 놀라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 특징은 원고 없이 하십니다. 원고 없이 한다고 해서 훌륭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복음에 대한 확실한 맥을 잘 짚고 그 맥을 간결하게 잘 전달하시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암기해서는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암기해서 할 수도 있는데 암기를 해서 하는 강론이라면 내용이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암기를 하지 않고 그 맥을 관통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제가 강의를 해 본 사람이라 확실합니다. 일단 그런 맥 자체를 잘 볼 수 있다는 것도 강론을 잘 할 수 있는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능 영어 시험헤 주제를 찾는 문제처럼 지문을 읽고 그 주제를 잘 파악하고 또 요지 문제는 요지를 잘 파악해야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출제하는 의도는 어떤 텍스트를 읽고 핵심을 잘 찾는 능력이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왜 중요할까요? 학문을 하는 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잘 습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이해를 하면 신부님들도 성경을 봉독하고 묵상했을 때 단순히 그날 주어진 복음만 보고 그 내용 안에서만 생각하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밖에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깊은 강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삼천포로 약간 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제가 앞으로 설명을 할 내용에 대한 배경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다시 이웃 본당 신부님 이야기로 이어나가겠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은 필력과 문장력이 뛰어나서 뛰어난 강론이 아닙니다.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가 들어보면 특이한 기법이 있습니다. 그 기법이 상당히 많이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걸 묘사해보겠습니다. 처음에 만약 복음을 미리 알고 간다고 전제했을 때를 가정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반에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이게 오늘 복음과 어떻게 연결이 될지를 말입니다. 어떤 사건 사건 하나를 예를 듭니다. 세상사 일입니다. 그 하나 하나의 예에서 일단 우리의 양심을 먼저 터치합니다. 1차 자극을 가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례에서 또 한 번 자극을 가하십니다. 더 찔림이 올것입니다. 이러시다가 돌연 갑자기 복음으로 선회를 하십니다. 대개 보면 긴 이야기를 하실 때도 있지만 짧게 잠시 터치하고만 지나가십니다. 복음은 짧게 언급을 하셨는데 그 여운이 오래가는 게 특징이 있습니다.
이게 왜 그럴까요? 만약에 성경만 가지고 언급을 계속 그 주제로 했다면 많은 여운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의 예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신자들의 마음을 자극한 상태에서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과 맥이 같다는 걸 이해시켜줄 때 그때 비로소 성경 복음에 나오는 내용이 진한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제가 파악한 이 신부님의 강론 기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단순히 그냥 보통 우리가 아는 복음 내용의 사실만을 알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을 시켜야만이 잘 이해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고민이 없이 한다면 그건 단순히 성경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강론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때 그런 지식을 들을려고 강론을 듣는 게 아닙니다. 그건 얼마든지 책을 통해서도 알려면 알 수 있고 또 조금만 부지런하면 검색만 해도 다양한 자료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조금 노력하면 알 수 있는 거에 불과하지만 강론에서는 세상에도 없는 걸 신부님의 고뇌로 이루어진 묵상을 바탕으로 해서 신자들에게 울림이 되는 그런 강론을 신자들은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강론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로지 미사 참례 후에 영성체하면 그 자체로만 가지고 그게 모든 축복과 은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중요하지만 그건 아주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가지고 백날 성당 다녀도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맨날 죄로 기우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도 세상 속에서 살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그 본성을 억제를 하고 또 저지를 시키기 위해서는 죄로 기우는 우리의 마음을 자극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극은 죄책감을 주기 위한 자극이 아닙니다. 경고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경고를 받지 않으면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영적으로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자극이 진정한 자극으로 되기 위해서 바로 뼈때리는 훌륭한 강론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절감하는 신자나 신부님이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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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미사 때 최소한 하느님께 이것만은 예를 다했으면........
내일은 주일입니다. 미사는 평일에도 있고 주일에도 있습니다. 사실 등급을 매긴다는 건 의미가 없지만 공공연하게 우린 의미에 차등을 두기도 합니다. 이건 제 생각도 아니고 신부님들 강론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의미를 잘못 이해를 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입니다. 사실 저는 이걸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다 중요하지만 아무리 어떤 상황에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주일미사 때만이라도 머리는 감고 미사를 갔으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남녀 불문입니다. 최소한 세수는 할 겁니다. 저는 목욕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샤워도 하면 좋지만 그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머리 감지 않고 참례하는 분 많습니다. 정말 보기 안 좋습니다. 바빠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령 바쁘다고 해도 이건 정성의 문제입니다. 딱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머리에 새집을 지으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아마도 머리를 감겠지만 보고 그렇게 모양이 나쁘지 않으면 대충 물칠 정도 하면 되겠다 싶어 그렇게 해서 오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것도 딱 보면 그렇게 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그렇게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올린 주일에 있었던 일로 글을 올린 글에서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그날 제가 미사 참례하면서 곤욕을 치르렀습니다. 냄새 때문이었습니다. 이 냄새가 어떤 냄새였는지 또 이게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냥 사람 몸에서 나는 거라는 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마음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모습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도 미사이면 이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비싸고 고급 옷을 입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데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단정하고 깨끗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는 옷은 아주 고급 옷인데 머리는 참 가관입니다. 자매님들 같은 경우는 파마이기 때문에 별 표시가 안 나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여러 번 봅니다.
남자 형제들 같은 경우는 기름진 머리에다가 대충 빗으로 정리를 하고 더벅더벅한 채 옵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상태에다가 남녀 불문하고 이상한 향수인지 뭔지는 몰라도 냄새를 가리기 위해 뭔가 뿌리고 오면 이건 더더욱 몸에 체취랑 섞여 더 불쾌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날은 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좀 많았는지 숨쉬는 것조차도 힘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예전에 본당에서도 개코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정말 후각이 끝내줍니다. 아는 분들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개코라고 할 정도입니다. 제가 개코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건 정말 아닌 것입니다. 요즘은 제가 사우나를 가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예전에 코로나 전에 사우나를 다닐 때 항상 토요일 저녁에 사우나에서 만나는 개신교 신자가 있습니다. 이 신자는 연세가 아주 많습니다.
항상 토요일에는 목욕을 하고 주일성수를 지키는 신자였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자리라 몸을 정갈히 하고 주일을 보내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 번은 그냥 여쭤봤습니다. 꼭 토요일에는 이렇게 뵙네요 하니 내일 하느님을 만나는 날이라 목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자고까지는 아니고요 이런 정신은 우리가 좀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에게 불편을 줘서 그런 게 아니고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최소한 그 정도의 마음은 가져야 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전에 어떤 날에는 신부님도 머리를 감지 않고 미사 주례를 하는 걸 보고 진짜 속으로 경악을 했습니다. 신앙도 어떤 경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연습을 해야 합니다. 습관이 완전히 들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나중에 자신도 이상한 상황이 되기 전에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쓰게 돼 정갈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혹여라도 저도 나이들어 이렇게 변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사람일은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젊을 때부터 몸에 습관이 완전히 배이도록 연습을 지금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연습하지 않으면 저도 나이들면 귀찮다고 그렇게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이런 걸 경험했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게 돼서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 생각을 그냥 무시하시면 됩니다. 세상에는 별난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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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4,12-23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더 테레사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빈민촌을 방문했다가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더럽고 냄새나는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방 한쪽 구석엔 기름이 차있는 등잔이 있었는데 그 청년은 어찌된 일인지 그 등잔에 불을 켜지 않고 어두컴컴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지요.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마더 테레사가 물었습니다. "방이 이렇게 캄캄한데 왜 등을 켜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청년이 답했습니다. “더럽고 지저분한 방을 보기 싫어서 등불을 켜지 않고 지낸지 일 년도 넘었습니다. 이젠 어두운 것이 더 익숙합니다.” 그 말을 들은 마더 테레사는 가지고 있던 성냥으로 방 안에 있던 등을 켰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왜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느냐’고 화를 내며 등을 껐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지지 않고 다시 등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등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며 옥신각신 하던 끝에 화가 잔뜩 난 청년은 등잔을 창 밖으로 던져서 깨버렸습니다. 다음 날 마더 테레사는 새 등잔을 사서 그 청년이 사는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돌아갔습니다. 10년 후 우연히 그 청년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직 같은 빈민촌에 살고 있지만, 이젠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집에서 지내며 안정된 직장을 얻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주시오. 그 때 당신이 켜 놓은 등불이 아직도 내 삶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고 말이오.”
마더 테레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약한 이들을 찾아가 신앙의 등불을 밝혀준 것은 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약한 이들, 죄인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그 ‘아픈 손가락’들에게 더 큰 사랑을, 우선적으로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 위해 갈릴래아 지방으로 이동하시어 ‘베이스 캠프’를 차리시지요. 그런 예수님의 행적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갈릴래아라는 지역이 지리적, 환경적, 사회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갈릴래아는 이방인들과 인접한 지역이자, 큰 호수라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어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호수 주변에는 땅이 비옥하여 작물이 잘 자라는 이즈르엘 평야가 넓게 자리하고 있어 곡식의 생산량도 풍부했지요.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은 그것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방민족들과 권력자들의 약탈이 극심했기에 오히려 빈곤이 더 심했지요. 자연스레 그곳 주민들의 마음엔 근심과 걱정, 박탈감과 상처라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 가운데에 자리를 잡으셨으니, 주님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될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그들이 가장 먼저 누리게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이라는 큰 빛이 떠올랐다고 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에 사시게’ 되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분께서 베푸시는 큰 사랑과 자비를 많은 이들이 느끼게 하시기 위해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그 속박에서 풀어주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또한 갈릴래아 방방 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과 계명이 무엇인지를 여러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 모든 활동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며 따름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과 눈이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가 필수적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과 활동으로 하느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말씀으로는 회개를 강조하십니다. 회개는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 때문에 죄로 기울어진 마음을 고쳐먹는 일입니다. 눈으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좋은 것들을 바라보고, 귀로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며, 마음과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그분께서 누리시는 참된 생명과 기쁨을 영원토록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네 사람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모습이 바로 ‘회개에로의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필요’ 때문에, 그들에게 ‘일’을 시키시려고 부르신 게 아니지요. 당신께서 평소 눈여겨 보시고 마음에 담아두셨던 이들을 가장 먼저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부르신 겁니다. 그래서 ‘와서 일 좀 해라’라고 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 맡겨진 소명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그분 뒤를 따르는 것이지요. 나는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모르기에, 모든 주도권을 ‘주님’이신 그분께 맡겨 드리고 묵묵히 그분 뒤를 따라 걷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즉 ‘사람을 낚는 일’을 그분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건 어부가 깊은 물 속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리듯, 죄악이라는 짙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웃을, 죽음과 같은 큰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형제를 그 깊은 수렁 속에서 건져 올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구해낸 이웃, 형제들과 함께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의 길’을 충실히 걷다가, 그 길의 끝에서 팔을 벌리고 서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점진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가장 먼저 내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의지하는 도구인 ‘그물’을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이 세상에 재물로 쌓아올린 바벨탑인 ‘배’를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애착하여 나를 이 세상에 속박되게 만드는 기본적 인간관계인 ‘아버지’를 버립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내 마음 속엔 ‘나’ 자신과 하느님만 남지요. 그렇게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과의 관계 안에 또한 그분의 뜻 안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하느님을 닮은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한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가자고, 그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자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의 조건을 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 안에 받아들여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나를 하느님 자녀답지 못하게,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세속의 것들을 벗어던지고 주님의 뒤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그분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맘껏 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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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23개의 금메달을 딴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입니다. 그는 다른 선수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5년 동안 내리 훈련하면서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1년 365일 매일요. 저는 매년 52일이 더 있는 셈입니다. 모두가 수영을 멈춘 일요일, 그들이 수영하지 않는 날에 저는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위대한 사람들은 하기 싫을 때도 꼭 무언가를 한다’입니다. 그것이 그냥 잘하는 것과 최고를 구분하는 차이입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남들만큼 하면 남처럼 살 뿐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노력하면 남과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편하고 쉬운 길만 가려고 하면서 과연 자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분명 가려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십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종교와 권력의 중심지였다면, 갈릴래아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은 이곳이 제1독서에 나온 ‘즈불룬과 납탈리’ 땅임을 명시합니다. 예수님의 일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망과 소외 속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빛’이 비칩니다. 구원은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도덕적인 반성이나 후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고방식의 전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방향키를 돌리라는 근본적인 초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이나 회당이 아니라, 삶의 치열한 현장(바닷가)에서, 일하고 있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일상을 떠난 곳이 아니라 우리의 땀 흘리는 현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먼저 부르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전해 줍니다. 그물과 혈연관계인 아버지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이 세상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예수님께 발견했기에 옛 가치를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제자들처럼 곧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모습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친절하라. 네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까(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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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구원과 응답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히자,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구약의 시대는 마무리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심판의 시대는 지나가고,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언의 시대는 끝나고, 그 예언이 실현되는 때가 도래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구원의 은총이 어떻게 우리에게 베풀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선포하신 곳은 이방인의 땅, 멸시받는 땅이었습니다. 외면 받던 땅에, 주님은 관심과 사랑의 빛을, 무지와 절망의 어둠에 믿음과 희망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해방의 주님
죄와 육체의 욕망에 갇힌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죽음의 두려움과 죄의 사슬에서, 세상의 유혹에서, 그리고 삶을 짓누르는 모든 어둠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분열을 하나로 모으시는 주님
죄는 항상 분열을 낳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그리고 우리 내면 마저도 찢어 놓습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이웃과 화해하고, 내면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
구원의 은총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응답’이 필요합니다.
회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삶을 버리고 복음과 성령의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주저없이 따름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제자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생업을 버렸고, 가정을 내려놓았으며, 인생의 목표를 바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삶이 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선택,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신뢰
예수님께서 전부이시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사랑하며 나의 부족함을 그분께 온전히 내맡길 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행할 때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에서 영원한 기쁨 안에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낡은 삶을 버리고 복음의 빛 안에서 새롭게 살게 하여 주소서.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삶이 되게 하시고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과 기쁨에 이르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어떤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까? 두려움, 상처, 절망… 그 어둠을 비추시는 주님의 빛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주저없이 따랐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그물’과 ‘배’는 무엇입니까? 부르심에 따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더 의지하며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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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연중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선포하시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돌아섬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
하늘 나라를 향해 돌아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하늘 나라를 향해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방향이 하늘 나라와 반대되지는 않겠지만
어떤 부분이 그러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경험한 하늘 나라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의 치유였습니다.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을 통해
하늘 나라를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를 향하는 길은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은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것과 거리가 멀다면
그 길에서 돌아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살인만 가리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모든 행동이
생명과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시, 비난, 따돌림 등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존중 받아야 할 한 사람으로 대하기보다는
내 가르침을 받아야하는 부족한 사람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그러한 삶의 모습에서도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돌보지 않은 것
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은 것을 뉘우치며
한 형제자매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하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예수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응답에는
옆 사람을 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면서 존중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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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로 위에 게제된 글 이외의 것입니다.
## 처음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80
1월25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해외원조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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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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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원주교구장/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 주교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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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한 며칠 육지로부터 꽤 떨어진 섬에서 전문직 어부들과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조업을 나가기 위해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잔뜩 껴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날 출항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안개가 걷히겠지, 했었는데, 웬걸, 하루 온 종일 그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선장님은 “오늘은 종 쳤네!”하시면서 저보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배 한 쪽 구석 작은 공간에는 싱싱한 생선이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큰 녀석으로 몇 마리 골라서 회를 떴습니다. 불도 피워서 소금을 뿌려가며 생선을 구웠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됫병들이 소주를 배 밑에서 꺼내오셨습니다. 그날 저는 하루 온 종일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었습니다. 거기 계셨던 어부들의 주량은 상상을 초월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들 코끝이 빨갰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첫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의 그의 동생 요한. 이 넷은 갈릴래아 호숫가 한 동네에서 고기를 잡으며 먹고 살아가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당대 이스라엘에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의 대명사였던 갈릴래아 지방, 그곳 출신이면서, 당시 지식인층이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네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최측근 제자들, 당신 왕국의 가장 중요한 내각 구성 인물로 갈릴래아 출신 어부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 눈여겨 볼 일이 있습니다. 그저 고기 잡은 일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삶의 폭은 너무나 좁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실개천에 놀던 이런 어부들을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이 큰 바다로 안내하십니다. 더 큰 가치관, 더 의미 있는 삶의 양식에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떵떵거리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어깨 힘들어 갈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때 신기하게도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진실하게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별볼일 없는 사람임을 자각할 때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완벽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전지전능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련하기에, 우리가 안쓰럽기에, 우리가 죽어가기에, 우리의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무상으로 우리를 당신 가까이 초대하십니다. 우리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행복해하면서 하느님의 초대에 성실히 응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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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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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에 종교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해답>
찬미 예수님!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이 섬뜩합니다. “5년 남았다.” 챗 GPT나 제미나이보다 훨씬 강력한 범용 인공지능(AGI)이 등장하면 인류의 직업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이제 인간이 지능으로 AI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심지어 코딩하는 개발자까지, 우리가 ‘선망’하던 직업들이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처음엔 많은 실업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 국가가 기본소득을 주어서 그것으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돈이 돌아야 인공지능 회사도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요?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가 엄청난 보조금을 주며 일하지 않게 만들자, 그들은 그 돈으로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물을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인간인 것 빼고 우리보다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생명을 탄생시키고 사랑하는 일에서는 인공지능은 인간 앞에서 무력합니다. 인공지능 아이가 인간의 자녀가 되려고 하나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 ‘A.I.’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아이의 엄마가 되려고 하나 그럴 수 없는 ‘마더’라는 영화는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길을 명확히 제시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더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AI가 더 잘합니다. 예수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은 정보를 줄 수 있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희생의 고통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창조자가 주시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은 만들어진 것만 가질 수 있고 그 만드신 분만 해답을 가지십니다. ‘사람 낚는 어부’란 ‘하느님 자녀를 낳는 존재’란 뜻입니다.
물고기 잡는 존재라는 자기 정체성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직업을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런 직업은 결국 다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AI와 경쟁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려는 사명 의식을 가지면 AI를 이용하게 됩니다.
일론 머스크를 봅시다. 그는 창조자를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인류에 의해 파괴될 것을 생각하여 그는 인류 문명을 화성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낮에는 타죽고 밤에는 얼어 죽는 물도 공기도 없는 그런 곳에 어떻게 인류를 가게 하고 살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물고기 잡아서 돈을 버는 삶 대신,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인공지능의 경쟁자가 아닌 인공지능을 빨리 만들어서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할 수는 없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도 인공지능이 빨리 더 발전하기만을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하.사.시.’를 인공지능으로 영화로 만드는 일입니다. 머지않아 가능할 것 같고 그래서 제대로 번역하려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익인간의 사명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자를 믿지 않으면 목적을 묻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 시대처럼 흥청망청하다가 자신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여기서 ‘만들겠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는 ‘포이에소(Poiēsō)’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쓰신 단어입니다. 즉, “흙먼지 같은 너희를 빚어 나의 신성(Divinity)을 지닌 자녀로 재창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창조와 사명은 함께 갑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AI와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AI를 이용하는 존재가 됩니다.
1429년,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침략으로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최신식 장궁과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반면 프랑스군은 패배 의식에 젖어 오합지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돔레미 시골 마을의 문맹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납니다. 열일곱 살의 양치기 소녀가 덩치 큰 장군들과 거친 병사들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계집아이 따위가 전쟁을 한다고?"
물리적인 힘으로만 따지면 잔 다르크는 병사 한 명도 이길 수 없는 약자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병사들과 칼싸움으로 경쟁하려 했다면 1분도 안 되어 목이 달아났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이 계산 능력으로 AI와 경쟁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그들과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을 ‘지휘’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병사들이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프랑스를 구하라! 왕세자를 랭스로 데려가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
그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믿었기에, 그 두려운 군대를 자신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녀가 "나를 따르라!" 하고 깃발을 높이 들자, 살인 기계 같던 병사들은 거룩한 사명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무식한 병사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하고, 욕설을 금지시키며 그들의 야수성을 거룩한 용기로 승화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명을 가진 소녀가 힘만 센 군대를 도구로 사용하자, 불가능해 보였던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했고, 결국 프랑스를 잉글랜드의 손아귀에서 구해냈습니다. 역사가들은 만약 그때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넘어갔다면, 훗날 잉글랜드가 성공회로 돌아설 때 프랑스 또한 가톨릭 신앙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소녀의 사명이 프랑스의 영혼과 신앙을 지켜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힘은 압도적이고 두렵습니다. 우리가 지능으로 그들과 싸워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잔 다르크가 군대를 경쟁자가 아닌 구원의 도구로 썼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이 주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사명의 깃발을 들고 AI를 지휘하면 됩니다. 사명이 없는 힘은 폭력이지만, 사명이 이끄는 힘은 구원이 됩니다. 잔 다르크가 깃발 하나로 군대를 움직였듯, 우리는 복음이라는 깃발로 AI 시대를 지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Poiēsō)고 하신 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고 걸음마를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AI와 경쟁하는 수준의 자존감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곧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 존재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훈련하십시오. 이것만이 다가올 AGI 시대에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희망입니다.
하느님을 낳는 하느님이 되십시오. 사람을,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 말씀은 로마 시대의 자기 정체성 혼란의 시대에 쓰였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 해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창조되었음을 받아들이십시오.이런 사람만이 AI 때문에 죽지 않고, AI를 이용하며 살아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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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처음 하신 말씀과 그분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을 버리고”(마태 4,20)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리고 온전히 응답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갈릴래아 곳곳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앓는 이들과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그분의 사랑과 연민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의 인격을 닮아 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배웠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되어야 하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주님 사랑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주님의 협조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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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2-23: 예수님의 전도 시작
1.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오늘 제1독서(이사 8,23-9,3)와 복음은 공통으로 “큰 빛”의 주제를 전하고 있다. 빛은 구원, 생명, 기쁨을 상징하며, 어둠은 죽음과 단절을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인용한 “죽음의 그늘진 땅에서 큰 빛을 보았다.”(16절)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비추는 의로움의 태양이시다.”(Enarrationes in Psalmos 26, II,2) 즉, 그리스도의 빛은 특정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비추는 구원의 빛이다. 그렇기에 갈릴래아, 즉 “이방인들의 땅”에서 전도가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구원이 온 세상에 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2.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예수님의 첫 설교는 짧지만, 모든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17절) 하늘나라는 단순히 미래에 올 세상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회개는 죄의 약이며, 자비의 문이자,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Hom. in Matthaeum, XV,4) 즉, 회개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내적 전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3. 제자들의 부르심과 따름
예수께서 부르신 첫 제자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마태 4,20), 배와 아버지까지 떠났다. 이는 단순한 직업 전환이 아니라, 삶 전체의 전환,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제자들의 ‘즉시 따름’을 묵상하며 말한다. “그들은 듣고 곧 따랐지만, 우리는 듣고도 머뭇거린다.”(Sermo 100,2) 제자들의 결단은 우리에게 신앙의 용기를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여정이다(마태 16,24).
4. 교회의 일치와 회개
제2독서(1코린 1,10-13.17)에서 바오로 사도는 갈라진 공동체를 향해 일치를 호소하고 있다. 교회는 특정 지도자나 인간적 권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이다.(1코린 3,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참된 일치 운동은 내적 회심 없이는 있을 수 없다.”(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Unitatis Redintegratio 7항) 즉,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부족, 곧 참된 회개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가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21)라고 기도하신 것은, 교회의 본질이 바로 일치이기 때문이다.
5.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요청합니다. 빛을 받아들이기-그리스도의 빛에 마음을 열고, 삶을 새롭게 보기; 회개하기-내적 전환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꾸기; 하나 되기-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모든 분열에서 돌이켜,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실천하기이다.
6. 맺음말
갈릴래아에 비친 그리스도의 빛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비치고 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머뭇거림 없이 주님을 따르고, 회개와 일치를 통해 그분의 나라에 합당한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이가 어둠에 머물지 않으리라.”(요한 12,46) 그리스도의 빛을 따르며, 참된 회개와 일치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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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때부터 오히려>
마태오 4,12-23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때부터 오히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어둠이 깃들면
그때부터 오히려
빛을 머금을 따름입니다
앞길이 막히면
그때부터 오히려
힘껏 나아갈 따름입니다
불의가 휩싸면
그때부터 오히려
더욱 의로울 따름입니다
두렴이 덮치면
그때부터 오히려
떨쳐 일어날 따름입니다
미움에 싸이면
그때부터 오히려
한껏 사랑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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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12-23)
1) 우리 교회는 ‘위령 기도’를 할 때 시편 130편을 바칩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시편 130)
시편 130편을, 연옥 영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많은 경우에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슬픔 때문에, 또 ‘인생의 덧없음’ 때문에 영혼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어떤 큰 사고나 큰 병이나 불행한 일이 갑자기 닥치면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하고,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답답함과 울적함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인생에 어둠은 전혀 없고, 온통 환하기만 하고, 완벽하게 행복하고 편안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사실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향해서 마태오 사도는 “참 빛이시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라고 선포하고 증언합니다. 신앙인은 그 증언을 믿는 사람이고,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참 생명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2)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가 어둠 속에 있음을 부정하는, 또는 자기 안에 어둠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다가 끝날 것입니다.(요한 9,41) 또 빛이 아닌데도 빛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가 빛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독재자들도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3) 원래 1월 25일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둠 속에서 살다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어둠에서 해방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 사울’로 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그를 부르셨는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사도 9,9). 앞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를 가두고 있었던 영혼의 어둠을 상징하고, 사흘은 자신이 얼마나 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성찰하고 깨닫고 회개한 시간을 상징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에게서 안수와 세례를 받은 다음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눈을 뜬 다음이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눈을 뜬 사람이, 또 빛을 받아들이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하게 됩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고, 어둠 속에 있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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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것>
인생 여정에서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사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사람은 큰 수술을 할 때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마음속을 드러낸다고 한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욕을 해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돈, 내 돈, 하고 어떤 이는 아내의 이름을, 남편을, 자식을 부른다. 마음이 주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결정적으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른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누가 ‘회개하십시오’ 하면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회개는 삶의 태도를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내가 잘살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새로 나야 한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왔거나 잊고 살아온 삶에서 복음이 말해주는 삶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새로워지는 삶이 회개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 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자녀를 대하는 태도, 부모를 대하는 태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한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되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회개한다면 반드시 구원의 은총을 입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
예수님은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있다. 회개’는 삶 전체를 포괄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뿐 아니라 마음에 품은 의도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은 따라간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가고, 바다에 두면 바다로 간다. 마음을 좋은 곳에 두면, 좋은 곳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간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다.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품어야 하는가?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3-24) 부디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삶,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회개의 삶’을 기뻐하길 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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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손해락 멜키올 신부님]
<구원을 향한 회개와 따름>
오늘 성경 말씀은 각박한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참된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부수어버리는’(이사 9,3 참조) 하느님의 선물이며, 참된 희망은 ‘어둠과 암흑 속에서도 구원의 빛을 비추어주시는’(이사 9,1 참조)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러 한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모습을 간직하며 생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참된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는 노력과 함께,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참된 회개와 주님을 따름은 적당한 타협이나 죄에 대한 합리화가 아니라, 나의 전부 그대로가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깨끗한 상 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나약하고 허점투성이의 모습이어서 하느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빠져들기 일쑤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믿고 따르다가도 인간적 욕심에 끌리는 것이 나타나면 금세 다른 길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길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것을 잊고 금세 다른 길을 찾곤 합니다.
이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성덕을 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 시하고, 그 길이 좋아 보이게 현혹합니다.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곧 “회개하여라.” (마태 4,17),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8)라는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동반 되어야 합니다.
수동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르고 행하는 신앙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참된 위로와 희망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1코린 1,17) 살아가는 것이어야 함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유혹들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혹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하며 그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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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정욱 마태오 신부님]
<초대>
큰 잔치나 행사에 초대를 받게 되면 대부분 설렘과 기대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옷을 입고 갈까?', '누가 올까?',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릴까?' 등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어떤 분은 초대받은 것만으로 기뻐하지만, 또 다른 분은 그 자리에서 어떻게 보일지, 어떤 대접을 받을지에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초대하는 입장에서도 누굴 부를지,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손님들이 만족할지에 대해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초대를 하는 것과 초대를 받는 것은 단순히 행사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관계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이를 신앙에 적용한다면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와 관련된 우리의 태도, 특히 겸손과 베풂의 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초대를 받게 되면 종종 어느 자리에 앉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윗자리에 앉아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죠.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좋아해서 공감이 덜할 수 있지만, 이는 단순히 자리 문제를 넘어,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인정욕구를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겸손한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예절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사나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실 때조차, 그분의 초대에 감사하기보다는 내 겉모습이나 세상적인 기준에 더 신경을 쓰곤 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내 삶에 초대하면서도, 정작 그분께 드릴 마음의 자리를 충분히 마련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귀한 잔치에 초대받으면 내가 주인공일 수는 없고, 또한 잔치를 열어 손님들을 초대했다면 그들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과 그분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는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군가를 초대할 때, 그들의 지위나 보답 여부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 소외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우리의 삶으로 초대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초대받고, 또 누구를 초대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초대에 겸손히 응답하며,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초대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초대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자리를 이웃과 함께 나누며, 참된 행복을 경험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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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현 루도비코 신부님]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누구의 것인가?>
해외 원조 주일을 맞이하여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우리는 흔히 원조 혹은 자선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힘들게 번 ‘나의 것’을 좋은 마음으로 베풀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의 절대적 지배권을 강조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모든 재화의 주권이 하느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사용권을 위탁받은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재화를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재화의 소유주인 양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때 죄가 발생합니다.
교회는 소유의 양이 아니라 소유의 형태를 중요하게생각합니다. 교회는 한 번도 부자를 단죄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이 재물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때 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란, 모든 이(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 내려주신 재화를 모두를 위해 사랑으로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수억 명의 이웃이 절대 빈곤 속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기아의 원인은 식량 부족이 아닙니다. 지구는 이미 충분한 식량을생산하고 있지만, 우리가 공정하게 나누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굶주림은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정의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복잡한 이해 관계로 얽힌 세상의 부조리를 개인의 힘만으로는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에는 당장굶고 아파하며 죽어가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도움을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 아파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가 많다고.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이웃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멀리 있는 이웃을돕지 않는 사람이 가까운 이웃을 돕는다고 생각할 수없습니다. 역으로 멀리 있는 이웃을 도와본 사람은 그경험과 기쁨으로 자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더 잘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그마한 행복마저도, 어쩌면 우리보다 더 못한 처지에서 굶주림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우리 이웃이 희생한 대가 일지도 모릅니다.
해외 원조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복음적 정의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회개의 삶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나의 것을나눌 줄 아는 신비로운 힘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 신비로운 힘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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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오. 4,1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빛이시라고 부활 성야에 장엄하게 선포되셨습니다. 주님의 빛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어둠은 없게 되었고 죽음은 부활로 향하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빛을 잃어버리면 어둠 속에 살게 됩니다. 그 어둠은 사랑이 없고 무관심만 가득 차고,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난무하며, 공정보다는 불공정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무관심과 불의와 불공정은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의존은 때때로 우리를 노예 상태로 이끌지만, 주님께 하는 의존은 우리를 자유로 이끕니다.”(헨리나웬)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의존하면 어둠의 노예로 살게 되지만, 주님의 빛에 의존하면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속에서 살았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이미 참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을 잃어버린 만큼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2 제자를 주님께서 선택하시어 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살도록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빛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으로 무장하여 그리스도를 살게 될 때, 이 세상의 어두움은 조금씩 사라집니다.
사람과 세상을 통해 겪는 행복과 불행은 늘 변하지만, 주님의 빛 속에서 가지는 행복은 영원합니다. 주님의 빛 안에 살 때, 불행과 고통은 있지만 우리는 그 불행과 고통을 모릅니다.
타인의 단점이나 비합리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선함과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내면을 지키며 주님의 빛으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래도 사랑하십시오>라는 기도를 남겼습니다.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마더테레사>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당신의 일은 잊힐 것입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래도 만드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들은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도와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입니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십시오.
우리는 줌으로써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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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다시 시작하자!>
오늘 복음(마태 4,12-23)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과 예수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말씀'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이사 8,23ㄷ-9,1 참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유이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부활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모습인 부활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땀을 흘리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물은 낮은 곳을 향해, 더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곳으로 향해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당신의 첫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부족함이 많은 평범한 나를 또한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첫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제자들이 됩시다! 생각과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인 가난한 이들에게 나눔의 사랑이 되어주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섭시다! 그런 제자들이 될 수 있도록 늘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시다!
어제의 부족함과 죄를 자비로우신 하느님 자비에 내어 맡기고, 새롭게 다시 부활하는,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 하나가 되십시오."(1코린 1,10ㄴ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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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4,14)
말씀의 성취는
언제나 인간의
계산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상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 자신이며,
살아 계신
사랑의
현존입니다.
말씀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데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말씀은
인격이 되셨고,
삶으로 이어질 때
완성됩니다.
문자는
멈출 수 있지만,
말씀은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은 행위를
통제하기보다
사람을
형성합니다.
성전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말하고, 일하고,
관계 맺는
모든 자리에서
말씀은
우리를 이끕니다.
말씀은
이해 속에서보다
실행 안에서
참된 의미를 얻습니다.
신앙을 삶에서
분리하지 않고,
삶 전체를
거룩하게
변모시킵니다.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을 빚고,
역사를 관통하며,
흩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하느님 백성의
뿌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계시이며,
삶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도록
부르시는
절대적 부르심입니다.
해외 원조는
먼 곳에
손을 내미는 일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 안에서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 삶을 내어놓는
신앙의 힘찬 응답입니다.
말씀은 인격의
참된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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