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국민작가 미하일 엔데의 '모모 이야기'라면 다들 아실 것이다. 저가 존경하는 독일의 환타지 작가 미하일 엔데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모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죠. 어떤 책에는 미카일 엔데로 적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국식 표현이죠. 본인의 이름은 모국어로 불러주는 것이 예의인데,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알파벳이면 미국식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작, 미국식으로 읽자면 미카엘 엔드가 맞는 말인데도 말이죠.
어느 마을, 오래된 원형 극장에 한 여자 아이가 나타나 여기서 살고자 한다. 모모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되찾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난해도 풍요롭게 살아가는 이 마을에 어느 날 회색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시간 저축 은행으로부터 왔다는 이 사람들은 실은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뺏아가려는 시간도둑들이었다. 시간을 절약해서 시간 저축 은행에 예치해두면 이자가 이자를 낳아서 인생의 몇 십배나 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람들은 여유가 없는 생활에 쫓기게 된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인생의 의미도 잃어버리게 된다. 모모는 도둑 맞은 시간을 사람들이 되찾을 수 있도록 예지의 상징인 불가사의한 존재,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회색의 남자들과의 결사적인 싸움을 벌인다.
일해도 일해도 어째서 여유롭지 않은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는 반대로 갈수록 마음 속에 퍼지는 공허감.....미하일 엔데의 모모는 시간의 진정한 의미, 여유롭게 사는 것의 중요함을 강력하게 호소하여 세계의 많은 독자를 매료시켰다.
판타지 소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동화의 세계에서 공상적인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판타지에 의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일종의 예언적 능력에 의해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거기서 새로운 기준을 얻을 수 있다.
소설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마치 판타지 소설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과 같다. 저는 이것을 설명할 때 항상 이런 비유를 합니다. 제 3의 섹타. 현실도 아니고 상상과 허구도 아닌 그 어느 지점. 그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어쩌면 무당이 자신의 신과 만나는 그곳일지도. 작가의 현실과 경험, 지식과 도덕,상상력,세계관,인문학적 의식 등이 콜로이드 상태로 존재하는 곳. 우주로 치면 모든 것을 빨아들여 다시 새로운 것으로 탄생 시키는 블랙홀 같은 곳. 세상의 모든 쓰레기를 새로운 물질로 재탄생 시키는 재활용 공장 같은 곳.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시간관념과 육체와 정신의 구분도 모호한 곳. 그곳에는 모든 것이 원형질의 형태로 녹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손가락을 통해서 소설이 탄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소설은 판타지입니다. 판타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소설이 아닙니다. 시가 아닙니다. 단지, 저 같은 삼류 소설가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 집착하여 금진항 이야기 같은 너절한 것들을 써대서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독자들이 작가가 쓰는 부분이 바로 제 3 섹타라는 것만 이해한다면 그 소설이 사실이냐 아니냐라는 강박관념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모모이야기]에는 숨겨진 엄청난 비밀이 있습니다. 모모는 틀림없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시간 대신에 돈을 이야기 한 겁니다. 미하일 엔데는 유명한 지역화폐 운동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이 이토록 일에 쫒기며 사는 원인을 은행을 매개로 한 화폐제도에 있다고 본겁니다. 은행에 돈을 맡기고 그러면 이자가 늘어나고 그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로 먹고 살고, 그것이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시작은 은행의 부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는 성장을 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업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끊임없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겁니다.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 지역화폐입니다. 지역화폐론의 기본 골자는 화폐노화론입니다. 화폐를 주고 상품을 샀는데, 상품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는데 화폐의 가치는 이자가 붙어 늘어납니다. 모든 자본주의 문제점이 여기 숨어 있는 겁니다.
이자가 없는 지역 발행 화폐,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 그러면 사람들은 화폐를 본래의 시장의 매개물로 밖에 쓰지 않게 되고 지역 경제는 활성화 됩니다. 화폐가 더이상 부의 상징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저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주장하는 것이 지역 공동체이죠. 그 중심의 경제 시스템이 바로 지역화폐입니다. [모모]라는 판타지에는 이렇듯 상상력을 동원한 사회개혁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작가 미하일 엔데의 제 3 섹터에서 창조된 겁니다.
작가의 또는 모든 사람들의 창조적인 공간, 제 3 섹터. 이것만이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셈이죠.
저는, 그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지역화폐는 여기서 일단락하고, 다시 시간과 노동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모모이야기] 에서의 시간은 느린 시간입니다. 미래에 저당잡히지 않은 현재의 시간, 그 시간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저당 잡힌 시간에 의해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열심히 또는 지독하게 돈을 벌어 또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해야 합니다. 그곳에 시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장은 절대로 옳바른 시장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탄생된 것입니다.
18 세기의 맑스와 또는 그 반대파들은 그 시장을 받아 들였고, 그 시장이 스스로 자기 조정이 된다는 쪽(아담 스미스)과 시장을 민주적인 틀 속에 가두어 놓아야 한다는 쪽(맑스)으로 갈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노동자의 계급성을 역설해서 노동자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쪽은 초기에는 방치해 두었다가 나중에는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였고, 급기야는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고 말았죠.
두 세력간의 싸움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들의 그것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임금에는 차이가 있었죠) 다만, 노동자의 주인이 국가가 되느냐 자본가가 되느냐의 차이 일 뿐.
노동자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노동자는 물론 일하면 일할 수록 임금이 높아지고, 싸우면 싸울수록 임금이 높아집니다. 노동자의 소비생활 역시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소비합니다.
오로지 자기 조정 시스템이 결여된 자본주의 시장의 시스템에 의해 노동자들은 개미처럼 일하고, 아귀처럼 소비를 합니다. 그곳의 자본가들 역시 그렇습니다. 시장에 쫒기는 것은 자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무역이 자본주의의 단서가 되고 지금도 역시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앞잡이라고 저번의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노동자는 일하면 일할수록, 자본주의 시스템에 점점 깊숙히 빠져들어갑니다. 세계무역의 첨병이 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꼴입니다. 세계무역은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구조조정이란, 자본주의가 깊어지고 세계무역이 활발할수록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물론, 억울한 것은 노동자입니다. 욕심많은 것은 자본가입니다. 국가는 항상 자본가의 손을 들어주엇습니다. 노동자의 노동조건 향상은 국가와 자본가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이윤의 향상과 확대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투쟁 때문에 노동조건이 향상 된 것은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노동자의 노동은 자본주의를 심화시켜 갑니다. 그리고 언젠가 노동자는 구조조정을 당합니다.
이 더러운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도리는 없습니다.
아니, 딱 하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노동자들은 배 부른 인간들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게으르고 편하고 현실을 모르는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니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도 하기 힘듭니다. 시간이 많이 남아돕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응시하거나 책을 읽거나 상상을 할 시간적 여유도 많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시스템을 어쩔 수 없이 잠시 이용할 뿐입니다.
그곳에는 미하일 엔데의 [모모이야기]의 그 시간이 존재합니다.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까지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어디일까요? 여러분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갈 수 없는 파라다이스가 아닙니다.
잠시 덜 일하고 덜 벌고 덜 쓰게 되면, 그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이제, 노동운동은 변해야 합니다. 자본가,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곳에는 모모의 시간과 돈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이기는 길이고 자본주의를 망가뜨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맑스도 실패했고 아담 스미스도 실패하는 겁니다.
우리들의 제 3 섹터는 실재로 존재한 곳입니다. 저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