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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시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1981년 '시와 경제'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
1982 <<한국문학의 현단계>>에 평론 <지금 이곳에서의 시> 발표
제50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밤에 쓰는 편지>(청사)
동덕여대 인문학부 문예창작전공 교수
------------------------------------------------게시 목록 ---------------------------------------
노숙 / 김사인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고향의 누님 / 김사인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공휴일 / 김사인
빈 방 / 김사인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새 / 김사인
여름날 / 김사인
오누이 / 김사인
강으로 가서 꽃이여 / 김사인
귀가 / 김사인
꽃 / 김사인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2005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의 누님 /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 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넝쿨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공휴일 / 김사인
중량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쓰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 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빈 방 /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별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중에서 『창비시선』>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 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미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세지를 찍어대는 노랑 머리 대학생의 구멍난 청바지 틈엔 허연 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며 큰집 작은집이며 논둑길이며 앞산 밑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하고 위엄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문학사상 (2007년 2월호)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장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월간『현대시학』 2006년 3월호 발표
새 / 김사인
거센 바람 속에
새가 난다
날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득이는
저 혼신의 날개짓이
넒은 강
건널까
저 거센 힘과 파닥임 사이
아슬한 균형 박차고
기어이 날아갈까
날아
못가고 몸 솟구쳐 이름없는 새
오른다
바람의 숨막히는 쇠그물의 끝을 향해 작은 새
피묻어 오른다
유연한 포물선 아니라
예리한 비수로 파랗게 날 서
수직으로, 온몸을 던져 수직으로
솟구쳐
바람의 멱통을 쪼아, 쪼아
피투성이 육신을
쪼아
살아
건널까 작은 새
죽음의 바람을 뚫고 넓은 강
몸은 벗어 장사지내도 그 예민한 부리
살아 건널까
저 새
기어이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강으로 가서 꽃이여 / 김사인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작과비평, 2006) 중에서
귀가 / 김사인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꽃 /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첫댓글 시사랑님!! 조금의 꾸밈도없는 사실적인감각으로 묘사하신 멋진 여러작품들 감사합니다. 소중히 담아 갈께요~ 수고 하셨읍니다. 행복한 사랑안에 기쁨이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