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 :12,000원 / *인터넷판매가: 10,800 원 (10 % 할인) / 540원 (인터넷적립)
*권두경작가 연락처 : 경남산청군시천면 원리 573번지.
이메일 : choamm99@hanmail.net
h.p 010-3571-2631
난과 자유(1막2장의 인생중에서)
산중생활을 하는 법정스님이 어느 불자로부터 난을 선물 받았다.
고고한 잎 모습과 은근한 난향에 이끌려 애지중지하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여름 어느 날 스님은, 며칠 동안 집을 비워야 할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산길을 한참이나 내려갔는데 개울을 건너다가 문득 난에 물을 주지 않고 왔음을 알고는 허겁지겁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순간 스님은 깨달았다. 자식 같은 난이 운수납자(雲水衲子)의 무한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가진 게 난 밖에 없던 스님은 그마저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던 2백 여분의 난을 나는 엊그제 모두 처분하고 말았다.
내가 난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의 일.
한국자생춘란의 변이종들이 원예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할 즈음인 86년, 같은 동리로 이사 온 정 모 씨로부터 자생난의 원예적 가치와 재배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한국춘란의 개발붐이 일기 시작할 바로 그 시기였다. 오래 전부터 난은 잎의 우아함과 난향의 감미로움으로 그 가치를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자생난인 한국춘란은 향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그 감상 기준이 향기에서 색깔로 바뀌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자생난의 변이종은 보기 드문 아름다운 색광을 꽃과 잎에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자생난은 원예품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고 자생지는 변이종을 찾는 난꾼들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생난을 찾는 나의 산채 활동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휴일마다 남도 천리길을 새벽같이 내달렸다. 산채의 발길은 산을 넘고 바다도 건넜다. 남도의 산야는 춘란이 지천이었으며 너무 흔한 난이었기에 당국은 특별한 규제도 하지 않았다.
산채활동을 하는 동안 에피소드도 많았다.
일행이 산으로 들어가면 각자 흩어져 난을 찾는데 하루는 산릉의 어느 뻐꿈한 곳에서 산채 초년생인 이 선생의 고함이 산야에 진동했다. 그것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의 소리와 다름 없었다. “중투다! 중투다!”하는 고함질에 흩어진 일행들은 소리로 향해 번개처럼 내달렸다. 혹시나 대주(大株)라도 찾았다면 먼저 달려와 축하해 주는 자는 퇴촉이라도 한 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채 경력이 제일 많은 정 선생이 선착했다. 찾아 낸 것은 대주가 아니라 생강근에서 올라 온 한 촉짜리 황중투 신아였다. 이 선생은 아직 캐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하늘로 향해 넙죽 엎드린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때 정 선생은 주위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엎드린 이 선생 두어 발 뒤에는 같은 개체의 황중투 신아가 3촉이나 더 있었다. 정 선생은 소리 없이 3촉을 캐어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도 엎드려 있는 이 선생의 황중투를 보고 축하해 주었다.
산삼이 그러하듯 춘란의 변이종도 군락을 이루며 자생한다는 사실을 정 선생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선생은 자신이 한턱내는 하산주의 자리에서도 예의 그 난을 쳐다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정 선생이 자신의 황중투 3촉을 슬며시 꺼내놓았다.
그 당시 산삼보다 더 호가가 좋은 황중투 무리를 우리는 넋 나간 사람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 동호인들은 난을 취급함에 취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새벽을 가르는 산채행 차 속에서는 부푼 기대감으로 서로를 격려했고 귀가하는 차 속에서는 전리품을 나누는 따사함도 있었다.
차츰 세월이 흘러 자생난 붐이 온 나라를 휩쓸자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자연히 난을 난으로 보지 않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생업을 포기한 채 갈고리 들고 산으로 들어가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그들에게 있어 난은 예술품도 아니요 원예품도 아니었다. 산삼을 찾는 심마니처럼, 노다지를 찾는 광꾼처럼 그들은 온 나라 자생지를 짓밟고 다녔다. 자연 자생지는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당국에서도 이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난을 돈으로만 보는 일부 산채꾼들의 질적 문제만이 아니었다. 한국난계를 이끌어 가는 유명 협회 인사들의 좁은 소견이 더 큰 문제였다. 신품종을 등록하는 기관이 이원화되어 편 가름하더니 소모임 난계는 사분오열 갈라져 잡음이 어디가나 무성하였다.
난 상인들의 비윤리적 상행위는 난에 관심을 갖는 초심자들을 울리기 일쑤였다. 지역별 동호회는 교류보다 반목이 더 성성했고 덩달아 이리저리 난계를 옮겨 다니는 줏대 없는 친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난계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난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도 아니고 동호인들의 무리지은 어지러운 행동에 실망해서만도 아니다.
난력이 깊어갈수록 수는 늘어나고 눈은 높아지는데 욕심은 끊임없이 생성하였다. 갓줄이 백설 같은 테를 두른 복륜(覆輪), 속 무늬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중투(中透)), 호랑이 얼룩무늬의 호반(虎班), 실안개처럼 사뿐이 녹이 내린 산반(散班) 등 종류별 우수품종이 내 난실에 가득했으나 더 좋은 품종을 향한 내 욕심은 그 끝이 없었다.
최고의 품종을 소유하고 싶은 무상의 욕심이 난 앞에 설 때마다 용솟음쳐 올랐다. 동료의 난실에서나 전국의 난 전시회장에서, 황금빛 용포를 두른 듯 기품이 번쩍이는 고고한 난들을 대할 때 내 정서는 이미 편안하지 못했다. 부러움은 곧 시기심으로 변했고 소유욕으로 내 심성은 침울을 거쳐 암담으로 향했다. 나도 난을 돈으로 보는 무리들과 별반 없는 속물임을 어느날 스스로 자인하게 되었을 때 마음은 황망하여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을 모두 처분하고 말았다.
그들이 내 곁을 떠나던 날, 나는 집에 없었다.
그들이야 알아줄리 없겠지만 애타는 석별지정으로 속눈물이라도 머금을 것 같아서 였다. 새주인을 찾아 그들이 떠나갔던 날, 나는 호프집에 홀로 앉아 오랫동안 상념에 잠겨 있었다.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들의 인심도 좀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고, 대신 조촐하고 빠듯한 가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훈훈한 정들이 많았다.
내가 그동안 좋은 난을 차지하고 채우려했을 때 내 마음은 얼마나 거칠고 무디어졌겠는가.
꽉 차 있는 난실에는 여백이 없다. 비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채울 수가 없다.
비워져 헐거워진 여백의 난실에서 나는 모처럼 한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법정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해가 기우는 마지막 달에 자기 몫을 살고 있는 우리는 저마다 오던 길을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포기한 인생의 중고품이나 다름없다.
그의 혼은 이미 빛을 잃고 무디어진 것, 우리가 산다는 것은 끝없는 탐구이고 시도이며 실험이다. 그런데 이 탐구와 시도와 실험이 따르지 않는 삶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텅 비어 휑하니 밝아진 난실을 바라보니 문득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인생의 중고품이 아닌 중년의 새 삶을 위해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탐구하며 또 시도해봐야 할 것인가. 내가 찾은 삶의 하얀 여백 위에 나는 이제 푸른 자유를 그려 보고 싶다. 그리하여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구름처럼 내 남은 삶은 걸림 없는 자유로 충만되기를 바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