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쿠웅-
머리 위로 떨어진 커다란 바위가 두쪽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지며 다애의 발등을 찍었다.
강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애의 뇌가 지애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애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물었다.
“뭐라고, 지애야?”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지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숨을 내쉬더니 다애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언니가 충격 받을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혜선이가 게시판에 사진을 붙이는 걸 봤대.”
“누가 그래?”
“반 애들도 그러고, 몇 명 본 애들이 있나 봐.”
다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시체처럼 잿빛으로 변한 얼굴로 지애를 응시하던 다애가 고개를 들었다.
다애와 눈이 마주친 아이들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다애의 희멀건 눈동자를 보니 무언가 일을 벌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애는 그들이 예상하는 일을 벌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다.
“니들 중에, 신혜선이 사진 붙이는 거 본 애 있냐?”
잠깐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몇 몇 아이들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나, 봤어.”
“나도…….”
“나도.”
“나도 봤어.”
다애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었다.
지애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지애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태환이 다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원은 그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분명 힘을 주기 위해 한 행동일 테지만, 다애는 두 사람의 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차라리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이나 보고 싶었다.
혜선이 그랬다니.
이런 악질 같은 일을 혜선이 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어려웠다.
물론 자신이 본의든 아니든 혜선의 모티브를 가져다 그림을 그려서 혜선이 심란했던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것 때문에 혜선이 화가 났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다애 혼자만 화를 입는 게 아니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호가 피해를 입지 않는가.
혜선이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번 일로 인해 세호는 직장을 잃게 생겼다.
백재고에서 좋지 않은 소문으로 인해 잘렸다는 일이 알려지면 세호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게 분명했다.
다애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다애야, 괜찮아?”
태환이 걱정스레 물었다.
다애가 천천히 태환을 올려다봤다.
다애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씩 웃으며 태환의 등을 투욱 친 다애가 걸음을 옮겼다.
“다애야.”
태환과 가원이 얼른 다애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는 아무 일도 터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아이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너 진짜 괜찮은 거냐?”
“어? 왜? 내가 왜?”
다애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혜선이가… 그런 일을 했다잖냐. 너 괜찮은가 해서.”
“아, 뭐. 난 아무 일도 안 당했잖아. 나보다는 세호 선생님이 걱정이지.”
“진짜 괜찮은 거냐, 너?”
가원이 다애의 팔을 세게 붙잡으며 물었다.
다애가 힘없이 웃었다.
“괜찮지 않으면? 여기서 옷 벗고 춤이라도 출까? 아니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라도 할까?
괜찮지 않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적어도 우리한테 이야기해줄 수는 있잖아. 네 속상한 마음을 다독여줄 좋은 친구가 두 사람이나 여기에 있는데,
무너진 하늘을 어깨에 짊어지고 혼자서 걸어갈 필요는 없잖아!“
“아아, 그래.”
다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힘은 없었다.
다애를 지켜보는 두 남자의 눈에 걱정이 가득 담겼다.
“그래, 맞아. 너희들이 있지. 고맙다. 그런데 말이지. 난 정말 괜찮거덩.
누가 무슨 짓을 했던 상관없는데, 후우. 세호 선생님이 진짜 걱정된다. 진짜로 학교에서 잘리면 안 될 텐데.“
다애는 두 사람의 팔을 한 번씩 툭툭 치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오전 수업을 함께 하는 반 아이들이 흘끗흘끗 다애를 쳐다봤다.
다애는 맥이 빠져서 입술을 비쭉 내밀고 책상에 엎드렸다.
여학생 몇 명이 다애의 옆으로 다가왔다.
다애는 축 늘어진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게시판에 붙은 사진을 가지고 비난하려고 온 거면 꺼져라. 지금은 그런 거 들을 기분 아니니까.”
“다애야. 그 사진 진짜 아니지?”
안경을 쓴 여학생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거 뭔가 오해가 있는 거야. 그렇지?”
다애가 고개를 살짝 들어서 그녀를 쳐다봤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이었다.
“응, 맞아.”
“아, 진짜 다행이다.”
다애의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가슴을 쓸었다.
“야, 김다애. 그 사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의 김다애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야.
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애들은 함부로 말하고……. 정말 짜증났다고.“
“맞아, 맞아. 솔직히 네가 그런 데 드나드는 그런 애는 정말 아니잖아.”
“응, 다애가 남자를 꼬시는 그런 애교 있는 성격도 아니고.”
“옷을 여성스럽게 입고 몸매가 좋아서 남자들한테 어필하는 것도 아니고.”
“응응. 절대로 꼬신다고 남자가 넘어갈 리가 없는데 그런 사진이 붙어서 진짜 놀랐어.”
다애가 피식 웃으며 여학생의 엉덩이를 쓱 만졌다.
“이 기집애들아. 지금 나랑 싸우자고 온 거냐?”
“솔직히 사실이 그렇잖아. 네가 선생님을 꼬셔서 미술 성적을 잘 받는다면,
우리 학교에 선생님을 꼬시지 못할 여자애들이 없을걸.“
“맞아, 맞아.”
“일루 와, 이것들아!”
다애가 장난스레 외치며 벌떡 일어나자 다들 꺅꺅거리며 도망쳤다.
아이들과 장난을 치다가 앉은 다애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사라졌다.
반 아이들이 다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게 고맙기는 했지만
기운이 쭉 빠져서 도저히 밝게 웃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오전 수업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태환, 가원과 밥을 먹고 있었고 또 정신을 차려보니 미술실에 앉아있었다.
미술반 아이들은 모두 다애에게 적의로 가득 찬 시선을 던졌다.
다애는 그들의 시선보다 혜선의 태도가 더 가슴 아팠다.
혜선은 다애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5분쯤 지나자 세호가 들어왔다.
모두 숨을 죽이고 세호를 주시했다.
세호가 학교에서 잘릴지도 모른다는 걸,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호는 생각처럼 어두운 낯빛이 아니었다.
다애는 그 일이 조용히 무마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 세호를 쳐다봤다.
교단에 선 세호가 반 아이들을 쭉 둘러봤다.
세호의 눈에는 아이들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
얼마간 숨막히는 정적이 흐른 후, 세호가 입을 열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다애가 눈을 번쩍 떴다.
그만두다니……. 괜찮을 거라고 믿었는데.
학생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작게 속삭였다.
다애는 무심코 혜선을 쳐다봤지만 혜선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어쨌든 선생답게 행동하지 못해서 여러분에게 커다란 불신의 감정을
심어준 게 정말 아쉽네요. 교사를 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더 좋은 것들을 알려주고 가고 싶었는데.
미술 교사가 정해질 때까지 당분간 여러 화가들이 번갈아 여러분을 가르칠 겁니다.
모두 실력 좋으신 분들이니까 많은 것들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수업은 없습니다. 자습을 하세요. 그럼.“
세호는 반 아이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울음소리도, 야유도 없는, 조용하고 깔끔한 인사였다.
다애가 벌떡 일어나 세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선생님!”
복도를 걸어가던 세호가 뒤를 돌아봤다.
어깨에 내려앉은 햇빛이 처량한 빛을 냈다.
다애는 세호의 앞으로 달려갔다.
“선생님.”
세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진짜로 그만 두시는 거예요?”
“그만 두는 게 아니라 잘린 거지. 하하하하. 난 이제 백수가 됐네.”
“웃을 때가 아니잖아요, 지금.”
“어쩌겠냐. 운다고 해서 다시 직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사실 잘 됐다는 생각도 드네.“
“잘 되다니요.”
“교사를 하려면 가르치는 아이들 전부에게 똑같은 사랑과 관심을 나눠줘야 하지.
그런데 난 널 발견하는 순간, 너 한 명에게만 관심을 갖게 되었어.
이성은 이러면 안 된다고 외치지만 어쩔 수 없더라. 너의 천재성에 매혹되었거든.
내가 생각해도 교사 자질 부족이야. 이런 일이 생겨서 너한테까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 전에
내가 그만뒀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어. 괜히 너까지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만들었구나.“
“아, 진짜. 그게 뭐예요.”
다애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난 이제 교사가 아니니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너를 도와줄 수 있어.
이번 일을 가지고 나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뭐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나에게 연락을 해. 내가 힘 닿는 데까지 도와줄게.“
“저는, 선생님이 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날 위해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이만큼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나도 내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지 몰랐지.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타나면 질투가 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 그림을 보는 순간, 질투라는 건 생길 틈이 없더라.
내 마음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한 천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갈 행운을 얻었다는 기쁨뿐이었어.
그 천재를 도와준 한 사람으로서 남고 싶다, 나는.
결국 널 도와주는 건 내 욕심 때문이야.“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세계를 놀라게 만들어라. 지켜볼게.”
세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었지만, 다애는 더는 세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네, 선생님. 난 반드시 세계를 가질 거예요.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다애는?”
기숙사에 들어가다가 가원을 만난 태환이 물었다.
“내가 걔 보호자냐? 왜 나한테서 걔를 찾아?”
“퉁퉁거리기는? 그래도 내가 너한테서 걔를 찾아주니까 고맙지 않아?”
“고마워 죽겠네.”
태환이 키득거리며 가원의 옆에 서서 걸었다.
가원은 태환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봤다.
태환에게 있어서 가원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으려고 하는 연적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스스럼없이 웃어주는 게 고마웠다.
사실 가원에게 태환만큼 좋은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원의 시선을 느낀 태환이 얼굴을 붉혔다.
“아잉, 왜 그렇게 쳐다봐? 너무 뜨겁잖아.”
“닥쳐. 죽여 버리기 전에.”
가원이 인상을 구겼다.
“다애가 알바를 하러 갔을까? 오늘 같은 날 알바를 하러 가는 건 비추인데.”
“왜?”
“세호 선생님 일도 있고, 애가 열이 뻗쳤잖냐. 이런 날 알바하면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
“역시 그럴까?”
“응. 아직도 걔를 모르겠냐?”
“그래도 설마 죽일까 싶어서.”
“알바하다 보면 꼭 짜증나는 손님들이 한두 명씩 있잖냐.
오늘 그 인간들 제삿날일 거다.“
“가게에서 살인나면 가게 잘 안 될 텐데.”
“어쩌면 더 유명해질지도 모르지. 미친개 김다애의 살인 사건 현장!”
“가봐야겠다. 너도 같이 갈래?”
“아아, 난 패스.”
태환이 한 손을 들며 뒤로 빠졌다.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거든.”
“혜선이 만나게?”
예리한 지적에 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떻게 알았냐?”
“넌 요새 혜선이 잘 챙기니까.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 왜?”
“그러니까…….”
가원은 태환을 향한 혜선의 뜨거운 눈길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혜선이가 너 좋아해.’라고 설명할 수는 없잖은가.
“뭐야, 가원군. 다애 좋다고 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바람이야?
물론 혜선양이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태환이 장난스레 가원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물었다.
“다애가 더 예뻐.”
가원의 대답에 태환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 뭐, 뭐라고?”
“신혜선보다는 다애가 더 예쁘다고.”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너야말로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난 도대체 신혜선의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다.”
“그럼 김다애는 어디가 예쁜데?”
“전부 다.”
“허허, 이거 참.”
태환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우리 가원군이 이렇게 팔불출이었다니. 소름이 끼치는군.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내가 뭐가 팔불출이냐? 난 객관적으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가원아. 진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애보다는 혜선이가 더 예뻐.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 백 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백 명이 다 혜선이가 더 예쁘다고 할걸.“
“그건 그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어서겠지. 난 지금까지 다애처럼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네 눈에 여자라는 동물이 보인 적이 있기는 하냐?”
“흐음. 글쎄.”
“쯧쯧쯧. 상태가 심각해. 이 노릇을 어찌할꼬.”
“대체 뭐가? 예쁜 사람한테 예쁘다고 하는 게 잘못이냐?”
“그래, 네 마음대로 말해라.”
가원이 정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남자인 태환이 봐도 반할 정도로 섹시했다.
태환은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에 손을 얹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섹시한 거야? 덮칠 뻔했잖아.’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가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애 주위에서 빛나는 건 뭐냐?”
“뭐?”
“가끔 다애를 보면 주위에 번쩍거리는 황금빛 광채가 있거든.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가 없어.
대체 그건 뭐냐?“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태환은 잠시 배를 잡고 뒹굴었다.
가원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런 태환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겨우겨우 일어난 태환이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가원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나직하고 은근하게 말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회복 불가능의 팔불출이라는 거야.”
하교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대부분은 집이 아닌 학원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다애는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다애의 시선이 멈춘 벽에는 커다란 포스터가 몇 장 붙어있었다.
다애는 검은색 바탕의 포스터로 가까이 다가갔다.
국내의 유명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들의 사진 전시회였다.
사진 전시회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가원을 데려가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보니 2만원.
다애에게 있어서 적은 돈은 아니었다.
다애는 일단 주위를 둘러봤다.
지저분한 회색 거리에는 담배꽁초와 종잇조각, 껌딱지들이 늘어붙어 있을 뿐
다애가 원하는 건 보이지 않았다.
“가원이 녀석은 표 같은 거 잘만 줍던데 내 눈에는 보이지를 않네.
도대체 그 놈은 어디에 그런 노다지를 숨겨두고 있는 거야?“
투덜대면서도 다애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전시회의 문의처에 전화를 했다.
몇 가지를 물어본 다애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가까운 은행에 들어가서 입장료와 저녁 식사 비용으로 6만원을 인출했다.
천원으로도 벌벌 떠는 다애에게는 큰돈이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같이 사진전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 가원이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째서 그토록 가원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건지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다애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도시락 가게로 향했다.
다애가 알바를 하는 곳에 갈까 하다가 관둔 가원은 태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질투나고 가슴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가원에게 웃어주는 태환이 고마워서
혼자 놔둘 수가 없었다.
어차피 태환은 가원보다 친구가 많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사진집을 뒤적이던 가원은 고개를 돌려 태환을 쳐다봤다.
태환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임에 열중한 태환에게 가원이 말했다.
“미안해.”
“뭐가?”
태환의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만약에 다애의 일로 미안해하는 거면 한 대 후려칠 거다.”
태환이 말했다.
가원이 한숨을 내쉬며 사진집을 덮고 모로 누웠다.
태환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내가 싫지 않냐?”
“흐음.”
태환이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훌쩍 뛰어올랐다.
남자 둘이 눕기에는 좁은 침대였기에,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 붙어 누워야했다.
가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태환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럴수록 태환은 더욱 강하게 가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하다는 놈이 날 밀어내? 말이랑 행동이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아니면 넌 입만 산 놈이냐? 앙?“
“미안하기는 해도 너랑 이렇게 가까이 얼굴 맞대고 싶지는 않다.”
“정말로 미안하다면 나와 키스를 해!”
“그럼 미안하지 않을래. 당장 내 방에서 꺼져.”
“하하하하.”
태환이 웃으며 가원을 놔주고 똑바로 누웠다.
가원도 태환과 같은 자세로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해.
그렇다고 다애가 안 좋아진 건 아냐. 진짜로 다애가 좋거든.
그런데 네가 다애를 행복하게 해주는 만큼, 나도 다애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잖냐.
굳이 다애를 갖지 않아도 난 다애와 같이 즐겁게 웃을 수 있어.
욕심 부리면 화가 날 뿐이야. 난 이 정도로도 만족해.“
“성인군자로군.”
“비꼬는 거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하지만 말이지, 최가원군.”
태환이 고개를 돌려 가원을 쳐다봤다.
“만약에 가원군이 질투가 나서 다애와 내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애를 빼앗을 거야. 알겠어?“
가원도 고개를 돌려 태환을 쳐다봤다.
그리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로 너와 다애 사이를 갈라놓지 않을게.”
태환이 돌아가고 가원은 침대에 엎드려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태환이 괜찮다고 말하지만 역시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았다는 죄책감.
그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태환이 좋은 놈이기에 더했다.
차라리 태환이 나쁜 놈이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태환이 다애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다애에 대한 감정을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애는 가원이 처음으로 제대로 본 여자였다.
가원에게 여자란 귀찮은 존재일 뿐, 형체도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런데 다애는 형체도 의미도 있었다.
그것들이 너무 확실한 모양을 가지고 다가와서 도저히 다애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줄을 알면서도 밀어붙이기 식으로 다애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뜨거운 감정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아아, 미안해 죽겠네.”
가원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다애에게만 지정해둔 벨소리였다.
가원은 넘어질 듯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다애가 먼저 가원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여, 여보세요?”
[밖이냐? 왜 이렇게 숨이 차?]
“방에서 운동을 좀 하고 있었어.”
[그래, 넌 운동 좀 해야 돼. 약해빠진 놈.]
“시비 걸려고 전화했냐?”
‘시비 걸어도 좋아.’라고 생각하면서 볼멘소리로 물었다.
[아아, 그런 이유도 있지만. 너 내일 저녁에 뭐하냐?]
“알아서 뭐하게?”
[쯧쯧쯧. 힘도 없는 게 반항은. 잔말말고 시간 빼놔. 내일 나랑 갈 곳이 있어.]
“어딘데?”
‘너와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사진전. 뭐라더라? 무슨 봄 어쩌고 사진전이던데.]
“아, 그거.”
[알아?]
“응. 가고 싶었어.”
[잘 됐네. 거기 가자.]
“내가 시간은 별로 없지만 모처럼 네가 가자고 말하니 시간을 빼보지.”
[바빠서 좋겠다. 난 은둔형 외톨이구만.]
“입장료는 얼마야?.”
[그런 거 걱정하지 마. 표는 내가 살게.]
“뭐? 네가 돈이 어디에 있어서?”
[이 누나가 네놈 한 명 먹여 살릴 돈은 있거든? 말했잖아. 넌 내가 책임진다고.
내일은 내가 널 에스코트할 테니까 나한테 다 맡기고 넌 몸만 와. 그럼 끊는다.]
“어? 아, 그래.”
[잘 자.]
전화가 끊긴 후에도 가원은 멍하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잠시 후, 가원의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가원은 화장실에 가려던 것도 잊고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가원의 어깨에서 시작된 미세한 흔들림이 곧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곧 침대가 흔들릴 정도가 되자 가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 김다애 진짜, 귀여워 죽겠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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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장편 ]
아수라장 스케치북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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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1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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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까지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요!!!!! 앞으로도 잘 써주세요
제발 혜선아 니가 아니지..ㅠ_ㅠ..? 다애 너무너무 깜찍해요 ><
아아아아!!!!! 너무 재밌어요!!!!! 가원이 눈에는 다애가 귀여워 보일지 몰라도, 저는 가원이가 진짜 귀여워서 미칠것 같아요!!!!!!!!!!!!!!!!! 흠흠..세호라는 캐릭터도 참 좋아요!!! 학교에서 잘렸지만 다애 곁에 머물면서 도움을 많이 주겠죠? 세호의 비중을 줄이지 말아주세요 ㅠㅠ!!!!!! 백묘님 완전 짱! 너무 재밌어요, 담편도 기대할게요 흐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혜선이라믿으면 안돼죠!!!!!!저는지애 99.99%!!!!!!!!!!!!!!!
혜서이가 한거 아닐꺼에요. 지애가 범인 ㅋㅋ 아 지애 죽여버(..)
ㅋ그것은지애냔의짓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확실할꺼임 ㅋㅋㅋㅋㅋㅋㅋㅋ지애.. 이냔을.. 확..콱.. 그냥..콱콱콱
지애 요것을 기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두 지애라 생각중
지애 생각할수록 재수없는거 같아요
아오.........이것들을확!
하하... 진짜 지애참 독하네요 하지만 다애 부모님이 더 싫은 건 왜일까요 !? 설마 친자식이 아닐리는 없고.. 아니 .. 있으려나?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