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어떤 경전인가?
기원전 1세기 전후 보살 사상이 대두되면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대승불교도들은 경전을 결집했는데, 처음으로 결집된 경전이 반야부이다. 이 반야부 경전은 600부인데, <금강경>은 <대반야바라밀경> 600권 가운데 577권 째에 해당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강경>의 전체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산스크리트어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 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이다. 바즈라체디카는 금강으로 견고하며, 어떤 것도 깨뜨릴 수 있다는 뜻이다. 프라즈냐는 반야(般若), 지혜로서 모든 번뇌를 깨뜨린다는 의미이다. 곧 <금강경>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며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로서 번뇌와 고통을 소멸하여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해주는 진리를 설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부처님과 해공(解空) 제일인 수보리 존자와의 문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송용으로 유통되는 <금강경>은 32분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양나라 소명태자가 나눈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금강경>이 어떻게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는가?
조계종은 여러 종파 가운데 선(禪)을 표방하는 종파이다. 선종은 달마가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면서부터 종파로서 성립되었다.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로부터 시작되어 6조 혜능(638∼713)까지 전승된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6조 혜능의 법손인 제자로부터 나말여초에 법맥을 받았으며, 현 즉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할 때, 조계종이라는 명칭은 6조 혜능이 광동성 조계산에 상주했던 산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혜능이 태어난 곳은 옛날부터 유배지로 유명한 영남 신주 사람이다. 오랑캐 땅이라 불리는 고장에서 태어난 혜능은 속성이 ‘노(盧)’씨로서 권세 있는 집안의 후예라고 한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서 파는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무를 해 집으로 돌아가는 중 잠깐 쉬어가기 위해 주막집에 들어갔다가, 방에서 한 승려의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승려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마침내 혜능은 5조 홍인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이후 스승 5조 홍인이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해주었는데, 이때도 혜능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구절 끝에 깨달았다고 한다. 이런 데서 연유해 <금강경>이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조계종도 당연히 소의경전으로 하게 되었다.
<금강경>의 전체 구성 및 사상
<금강경>은 ‘보리심을 일으킨 대승의 보살이 어떤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그 번뇌를 다스려야 하는가?’로 문제를 상정하였다. 그 답은 ‘자아에 대한 상(相)을 갖지 않고, 자신이 행한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관념을 갖지 않는 번뇌를 여읜 경지라고 하였다. 즉 무상(無相)·이상(離相)·무주심(無住心)·청정심·무심에 머물러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금강경>에 많이 등장하는 ‘상(相)’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모양·형상·신체이다. 눈으로 보이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다.
둘째, 자애(自愛)·아만심·분별심·자만심 등이다. 일반적으로 아상이라고 통칭한다.
셋째, 관념·사견으로 자기중심의 사고로 가득 차 있는 경우이다.
넷째, 법상(法相)이다. 법에 대한 개념인데, 여기서 법이란 진리도 포함되지만, 모든 생각이나 마음, 사유작용으로 개념화 하는 방식이 포함된다.
<금강경>의 상에 대한 해석은 전반적으로 둘째와 셋째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금강경>의 전체 구성은 보리심을 발(發)한 보살의 대승적 실천행을 골자로 한다. 이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① 중생을 제도하려는 발원이 담겨 있으며, 작불(作佛)의 서원을 세우고, 6바라밀 실천 등이다.
② 부처로부터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授記]을 받는 대승 사상이 등장한다.
③ 실천 체계이자,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무주심(無住心)·청정심(淸淨心)을 중시한다.
<금강경> 내용에서 살펴본
신행·수행 체계
신행·수행의 체계에 대한 질문 - [2품]
2품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이 ❶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며[應云何住], ❷어떻게 그 마음[번뇌]을 다스려야 합니까[云何降伏其心]?”
조계종 표준본에서는 ❶응운하주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해석하고, ❷운하항복기심을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로 번역하고 있다.
필자는 ❶응운하주를 ‘보리심을 낸 보살은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로 보고, ❷운하항복기심을 ‘어떻게 번뇌로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 응운하주와 운하항복기심은 <금강경>의 수행체계요, 불자로서 삶과 수행의 방법론이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
3품에 의하면, 수보리의 두 번째 질문인 “❷어떻게 그 마음[번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9류중생(九類衆生 [모든 부류의 존재])을 제도해서 무여열반[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들게 하되 한 중생도 제도된 자가 없다. 보살에게 4상(四相)이 없기 때문이다.” - 3품
보리심이란 보살이 해탈 열반을 추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더불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런데 ‘번뇌로운 마음[其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가 관건이다. 이에 대한 답은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중생을 제도했으되, 제도했다는 관념이나 집착[四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답변한다.
‘보리심을 낸 보살은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
4품에 의하면, 수보리의 “❶어떤 마음 자세를 갖고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보살은 현상[法]에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형색[色]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며, 소리·냄새·맛·감촉·생각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무주상(無住相)의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 만약 보살이 어떤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다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복덕은 광대하고 무량하다.” - 4품
6바라밀 가운데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도 베풀었다는 집착심이나 관념이 없이 보시하라는 뜻이다. 곧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이다. 이렇게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매우 크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주상보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구조와 같다. 이 구절은 <금강경>의 대표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후대 선종이 발달하면서 승려들의 수행 목표로 설정되기도 하였다. 경에서 무주상, 곧 무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선종의 선사들이 <금강경>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10품에 의하면, “모든 보살은 응당히 청정심을 내어야 한다. 보살은 형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며, 소리·냄새·맛·감촉·생각의 대상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應無所住], 마음을 내어야 한다[而生其心].”고 하였다. 즉 보살은 6경(六境[형체·소리·냄새·맛·감촉·생각의 대상])에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소주(所住)란 바로 앞 문장 단어인 ‘청정심’을 말한다.
6바라밀을 완성하라
<금강경>이 대승불교 경전답게 수행의 완성으로서 6바라밀을 강조한다. <금강경>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와 무주상인욕(無住相忍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나머지 네 바라밀[지계·정진·선정·지혜]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보시에 대해서는 앞에서 거론하였고, 무주상인욕을 살펴보자. 부처님이 과거세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수행할 때, 가리왕에게 신체를 할절(割截) 당하면서도 4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곧 부처님께서 ‘나의 신체’, ‘나의 몸’이라는 상이 없었고,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나 원한이 없는 무주심으로 욕됨을 참았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런 인욕을 ‘무주상인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수행 목적은 반야[大智]와 자비[大悲]이다. 반야와 자비 중 어떤 것을 중시해야 하는가?에 있어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개의 측면이라기보다는 합일된, 혹은 쌍수(雙修)된 측면이 되어야 한다. 곧 자비도 반야의 작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무주상자비요, 반야도 자비의 작용을 바탕으로 드러나는 무주상반야(無住相般若)여야 한다. 이렇게 자비조차도 지혜가 수반되어 집착이나 관념 없이[應無所住] 그 마음을 내야 한다[而生其心].
과거·미래·현재 중
어느 시점에 마음을 찍을 것인가?
<금강경> 18품에 삼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그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이란 마음이 아니요, 단지 그 이름만을 가지고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 회자되는 선사가 <금강경>의 대가라고 불린 당나라 때의 덕산 선감(782∼865년)이다. 덕산은 선종의 5가 7종 가운데 운문종과 법안종 법맥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덕산은 출가 이후 경전을 연구한 강사출신으로 <금강경>의 대가로 알려져 있어 사람들은 그를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덕산은 당시 북방 지역에 거주했는데 남방의 선사들이 문자[경전]를 부정하고 불입문자(不立文字)·견성성불(見性成佛)·직지인심(直指人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덕산이 그들을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떠났다. 덕산이 용담 숭신(782∼865)의 절 앞에 당도해 마침 배가 고프던 차에 떡장수 노파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금강경>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겠습니까[→點心]?” 덕산은 노파의 질문에 답을 못하였다. 이후 덕산은 용담을 만나 법을 깨닫는다.
과거·현재·미래라고 불리는 시간이란 것도 인간의 사유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에 불과하다. 시간은 순간순간 찰나의 연결이요, 점선 점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하나로 나열되어 연결된 것이라고 착각한다. 한 찰나에 머물러 그때를 현재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과거의 마음이 되어버린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다. 무상하기 때문이다. 머물러 점찍은 그 마음이 참 마음이라고 하지만, 곧 흘러가버려 과거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금강경> 18분에서 말하는 ‘마음’도 시간적인 개체가 없음이요, 공간적으로도 고정된 실체의 마음이 없다. 단지 ‘마음’이라고 명명할 뿐이다. 그래서 18품에서 ‘여래가 설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단지 마음이라고 이름할 뿐이다.’라는 즉비논리가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즉비논리(卽非論理)
즉비논리란 긍정을 하고, 다음 부정을 한뒤 다시 긍정하는 세 단계로 설해진 논리이다. 즉 ‘A 즉비(卽非) A, 시명(是名) A’라는 공식인데, <금강경>에서 30여회 정도 언급되어 있다. 즉비논리는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년)가 명명한 이래 일반적으로 공식화되어 있는 학설이다.
A는 곧 A가 아니다. 단지 그 이름만을 가지고 A라고 한다.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장엄이다” - 17품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궁극적인 지혜[實相]라는 것도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므로 여래가 단지 이름하여 궁극적인 지혜라고 하였다.”
- 14품 [是實相者則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이와 같이 <금강경>은 무상과 무주, 즉비논리를 각 별개의 사상으로 논하지만, 분별심·(고정)관념·집착심·아만심·차별심·사견·자애(自愛) 등 번뇌를 타파한 뒤에 지혜가 발현됨을 강조한다. 이렇게 번뇌 깨뜨리는 지혜가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경전 이름이 ‘금강(金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