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한수재
매일 다른 해가 지루히 떠오르고
신은 하얗게 쇠었네
비겁하고 순수했던 시절,
골목의 노을을 사랑했고
십자가에서 따뜻해진 영혼
우리는 알고 있었지
맑은 찬송가를 부르며 키우던 침묵
광나는 건반의 비명이 멀리까지 나뒹굴고
시뻘겋도록 눈을 닦는 하늘이 퍼렇게 번져
사람들의 길을 가릴 때
더운 바람과 밥 냄새,
연기에 뒤덮인 지붕들이 교회로 변하는 것을
응시하는 모두의 저녁에
꿈틀거리는 벽돌 위로
여름 나뭇잎은 거기, 무성히 떨며
죽음이 대성황을 이루어
황홀하게 우리 안으로 몸을 숨겨도
대부분의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죽었던
각자의 시절
슬픔, 그건 웃음을 본 자들의 애장품
천장과 바닥을 맴돌던 유령들과
방황이나 울음 없이도 혼자 살아갈 줄을 알았다네
-빨리 폭설이 내렸으면,
동상이 걸릴 만큼 추워졌으면
삽시간에 불덩이의 뇌가 되어
식은땀으로 옷을 벗는 아침마다
고개 숙여보던 거울 속에서
쓰임이 다 한,
그 뜻대로 완성된 주문
우리의 자랑이, 그녀의 독毒이,
망각의 평화가 오기도 전에, 비극의 완성도 없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처럼
우리에게서 빠져나네
형제들이여,
늦게 슬픈 나의 형제들이여
신밀다원시대新密茶苑時代
꾸물꾸물한 하늘 때문이기도 했지만
‘김동리 밀다원시대’ 이중구를 짓누르던
땅끝 바다 근처, 회를 먹는 대목에서
갑자기 그 바다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회를 먹고 싶어’
문자를 날렸다
지금은 전쟁 중도 아니고
부모, 처자식을 버리고 떠밀려 피난 온 것도,
갈 곳 없어 뛰어드는 바다도 아닌데
빠지지 않기 위하여 막다른 끝에서
비틀거리는 이중구의 기차를 타고
끄먹끄먹한 하늘을 따라 바다에 가고 싶다고
어떻게 문자로 보낼 수 있을까
밀다원의 뿌연 다방 커피향이 맡아지는 듯
바로 골목을 돌아서 나가면 아무것도 날지 않는
씹힌 문자처럼 대꾸 없는 바다가 보일 것만 같다
시인의 사색
무언가가, 누군가가 디켄팅해주는 외부의 간섭없이는 멀리서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부르는 내 이름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프로이트가 언급한 ‘죽음의 본능’이란 어쩌면 실제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들어있음직한 마취 상태와도 같은 지극한 행복의 상태를, 원함과 존재함 사이에 그 어떤 긴장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완전한 평온함과 안도감의 상태를 되찾고 싶어 하는 갈망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일이나, 섹스에 완전히 몰입할 때,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 기도에 완전히 몰입할 때, 혹은 둥글게 만 몸을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딱 붙이고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깨어 누워 있을 때 그런 상태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종종 죽음에 매료될 때 불안하지 않았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죽음은 평안과 안전,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생존을 향한 절박한 구걸인지도 모르겠다.
사건지평선(event horizon, 블랙홀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경계선)근처에서 서성이며 삶과 죽음으로부터 방출되는 그 많은 먼지와 빛을 통해 나를 확인하느라 소모되었던 생의 에너지와 무모한 용기들에 애증을 느끼다가도 요즘만큼 나 자신이 고유한 원소로 다가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 앞에 당도한 모든 빛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형기를 마친 죄수의 그 하늘처럼 위축된 고백을 위로하는 빛의 우여곡절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