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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북아동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혜암
6년 동안 회장을 맡아 봉사하시던 윤태규님이 물러나시고, 후임으로 이호철님이 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금년도 연수 주제는 다음 월례회 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월례회 날짜는 매월 철째 주 4시로 잠정 정했습니다.
전임 회장 윤태규님의 노고에 감사하고, 신임 회장 이호철님의 힘찬 출발을 축하하는 큰 박수로 따뜻한 연수를 마쳤습니다.
이날 장소를 마련해 주신 박경선 교장 선생님께서 사 주신 복어탕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고맙습니다.
<경북아동문학회 연수 주제>
우리말과 우리글을 온 세계 사람들이 배우고 있는데……
최춘해
우리나라 드라마와 케이팝(k-pob)에 이어 온 지구가 한글과 한국어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세계 곳곳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등에서
한국어 강좌가 잇따라 개설되고 있고, 우리나라 정부가 주관하는 한국어 능력 시험 응시자도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일부 국가에선
한국어를 제2 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연구하고 사랑하는 일본인이 있다. 노마 히데키(野間秀樹·57) 전 일본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는, “한글은 전율 넘치는 지적(知的) 혁명입니다. 인류 전체의 귀중한 자산이에요.”라고 했다. 미(美)적인 관점에서 한글을 평가한다면,“한글은 15세기 당시 전통적인 문자의 미에서 벗어난, 굉장히 논리적인 구조의 미를 갖고 있다. 자음과 모음을 나타내는 여러 요소를 합쳐서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글의 탄생은 산수화의 세계에 컴퓨터그래픽이 등장한 것처럼 파격적이다.”고 했다. 또 한글의 우수성을,
“한글의 탄생은 15세기의 지적 전통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혁명 그 자체다. 소리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발상은 그 시대 언어사에선 획기적이다. 한글 창시자들은 소리 중에서 의미와 관계되는 모든 요소에 분명한 형태를 줬다. 이것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 즉 초성 중성 종성과 지금은 표기가 없어진 성조다. 하나의 음절을 이처럼 네 가지로 분석하는 사분법은 완전히 현대 언어학 수준이다. 한글은 ‘나는 이런 문자다. 누구를 위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고, 나를 이렇게 발음해 달라’는 점을 스스로 밝힌 세계 유일의 문자다. 훈민정음에선 소리가 문자로 되는 근원을 접할 수 있다. 발성기관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근원으로 들어가서 형태를 찾아낸 것이다. 한글 스스로 이론무장을 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훈민정음에 남아 있다.”고 했다.
중남미 찌아찌아족은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어서 세계에서 최초로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고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이어서 볼리비아에서도 문자가 없어서 한글 표기 시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우리 겨레는 이 지구에서 우수한 문화를 가진 자랑스런 민족이다. 특히 우리의 말과 글은 세계의 으뜸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이요, 수출국 12위의 자랑스런 나라가 된 것도, 배우기 쉽고 쓰기에 편하며 과학적인 한글과 아름다운 우리말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둘레에는 참 보기 딱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영어 발음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린아이의 혀 어느 부분을 수술한다고 한다. 그 아이의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부탁을
한다고 해서 수술을 해 주는 의사도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어떻게 돼서 그런 발상을 하게 됐을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눈, 코, 입, 온 몸을 서양 사람으로 바꾸고 싶을 것이다.
우리 문화, 우리의 전통에 대한 애착심이 그렇게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 한국에서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내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루 빨리 떠밀어서라도 외국으로 쫓아내고 싶다. 금수강산 아름다운 나라에 그런 사람과 함께 발붙이
고 산다는 것이 불쾌하다.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고 한다. 유학은 안 보내더라도 조기 교육을
하겠다고 서두는 사람이 많아서 외국어 유치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긴다고 한다. 유치원보다 더 일찍 가르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영어 교육을 한단다. 헤드폰처럼 생긴 기계 장치를 산모의 배에 둘러 매 놓고, 뱃속에 든
어린이가 부드러운 소리로 이야기하는 영어를 듣게 한단다. 예를 들면 How are you? I'm fine. 이런 소리를 듣게 한다는 거
죠. 이 기계 장치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상점에는 이 물품이 동이 날 때가 많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과연 외국어 교육은 조기 교육을 해야 효과가 있을까? 미국에서는 스페인어
나 프랑스어를 중·고등학교 때부터 가르친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배워 놓았다고 해서 한평생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예를 들면 어릴 때 미국이나 유럽으로 양자
를 간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릴 때 배웠던 우리나라 말을 한 마디도 못 하는 것을 TV를 통해서 잘 봤다. 안 쓰면 금방 잊게
된다. 내 생각으로는 필요할 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외국어 교육을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
에 있지 않을까
.
아직은 조기 교육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른다. 남들이 조기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우리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떨어지지나 않을까 미리부터 걱정을 해서 앞다투어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부질없
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 전에 외국어를 가르치면 어떤 점이 해로운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 미국말을 하면 미국 정신을, 독일어를 하면 독일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된다. 말 속에는 그 나라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
다. 한국 사람이 어릴 때부터 미국말을 배우면 몸은 한국 사람이면서 정신은 미국 정신을 가진 기형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 빼앗겼을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한테 굳이 한국말을 못 쓰게 하고 일본말을 쓰라고 강요를 한 까닭
이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에게 일본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총, 칼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도 말과 글의 힘으로 이루
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애국지사들도 말과 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말과 일본 글자 쓰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
럽게 생각하는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국 사람이면서 남의 나라 행세를 하는 것만큼 못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일제
말에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 행세를 했거나 일본 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수치를 당하고 있는가. 역사에 길이
더러운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다.
둘째 외국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을 할 때, 번역이 제대로 안 된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번역이 잘못되는 까닭은 우리나
라 말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 해도 우리나라 말을 제대로 못 하면 엉터리로 번역된 문장이 될 것은
뻔하다. 그때에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 말을 제대로 배울 것을 하고 후회를 해 봐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작가 한 분은 미국에서 난 손자를 굳이 한국으로 불러 들였다. 남들은 일부러 영어 교육을 하기 위해서 미국으
로 유학을 보내는 판에 왜 굳이 한국으로 어린 손자를 불러 들였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어릴 때부터 모국어를 제대로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라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란 묘한 것이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 입에서는 건전한 말이 나오고, 불량한 생각을 가진 사람 입에서는 불량한 말
이 나온다. 깡패들이 쓰는 말은 폭력, 파괴, 잔인함 등을 뜻하는 말들이고, 그런 말들을 자꾸 듣고 쓰게 되면 점점 더 포악해
지게 된다. 그와는 반대로 고상한 사람들이나 문학하는 사람들의 말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들이다. 이런 말을 자꾸 듣고 쓰
게 되니까 저절로 점점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소년한국일보사 사장이었던 김수남씨는 살아 있을 때 동
시 외우기 운동을 여러 해 동안 펼쳤다. 그는 말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스스로 동시를 100여 편 이상 외우고 있
었다. 동시를 많이 외우니까 저절로 말도 잘하게 되고 마음이 부드러워지더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나의 귀한 아들딸한테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문화인, 그리하여 마음이 아름답고 건전한 21세기 문화인
이 많이 배출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전세계의 한국어 열풍
아세아주
일본-한국어 능력 응시자가 1만 3000여 명, 사설 학원, 세종학당 문전성시
중국-중국 대학의 한국어과 80여 곳, 1만 7000여 명.
일본, 중국 외에 한국어를 각급 학교에서 정규 교과과정으로 채택하는 움직임은 인도네 시아, 인도, 태국, 홍콩, 베트남, 대
만, 호주 등 곳곳으로 확산.
대만-타이베이 한국어학원이 40여 개
호주-학생들 5천 758명
인도네시아-4개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를 운영 중.
인도-4개 대학이 한국어과를 개설
홍콩-여성 중 절반 이상이 한국어를 취미로 배운다고.
태국-59개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21개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 개설. 18개 대학 추가 개설 희망.
대학 입시 과목에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포함시키는 방안 검토.
유럽
프랑스-소르븐 대학에 한국어 강좌가 정규 과목으로 진입되다.
고교에서도 정규 강좌로. 한국어 강좌 수강 신청은 새벽부터 줄서다.
영국-세계 최대 언어 박람회 ‘랭귀지 쇼 2011’에 한글관 운영.
아랍에미리트-한국 대표 현대시 10편, 근대 소설 3편 아랍어 번역본 책자
이집트-대학교, 고등교육원 한국어 강좌 운영.
미주
켈리포니아주-고교가 한국어를 장규 외국어 과목으로 채택 2개 반 운영.
초등학교 방과후 한국어를 일주일 3시간씩.
뉴저지주-고교 한국어반 개설. 모두 60여 곳.
샌프란시스코-팰마 고교와 원드미어랜치, 개리랜치 등 중학교에서 한국어 채택이 추진되고 있다. 로웰 고교는 최근 지원자
가 많아 내년부터 한 반 더 늘리기로 했다.
로스엔젤레스(LA)-세종학당에 418명 수강 신청.
중남미-18개 주에서 70개 가까운 한글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볼리비아-찌아찌아족에 이어 한글 표기 시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아이마라 부족 인구 200만 명, 말만 있고 문자가 없다.
멕시코-9개 한글 학교 운영.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린다.
브라질-한류가 확산되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아르헨티나-
쿠바-한글 학교 1곳 운영 중.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
최춘해
Ⅰ. 문학의 길을 향한 첫 걸음
1. 나의 데뷔작
신문에 신춘문예 광고가 나면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한두 번 떨어졌을 때는 섭섭하기는 해도 태연한 척 할 수 있었으나 몇 차례 떨어지고 나니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처가, 실망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KBS 방송국에 투고를 해서 채택이 되어 원고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아동문학가로 데뷔 하는 것만이 내 꿈이었다. 이원수 윤석중 한정동 김영일 박홍근 박목월 김성도 김진태 등 아동문학가들이 여간 존경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도 이원수 씨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초등학교 때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하듯이 성인이 되었는데도 이원수 씨의 모든 것을 다 닮고 싶었다. 말 한마디, 행동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존경스러웠다. 선생은 소주를 좋아하셨다. 소주는 싸고 맥주는 비쌌다. 선생님을 대접하고 싶은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느꼈다. 또 시상식이나 총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식사나 축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얼굴 모습이나 태도가 조금도 가식이나 권위 같은 걸 느낄 수 없었다. 관료들의 오랜 습성인 덕치덕치 쌓인 권위로 덮인 얼굴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얼굴 모습에서부터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생각되었다. 나도 선생님과 같은 문학가가 꼭 되고 싶었다. 절실한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중에 느꼈다. 내가 당선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아직도 당선될 만한 작품을 못 썼다. 당선 작품이 나오기까지 더 노력을 해야 한다. 내 스스로 더 다부지게 다짐을 했다. 선배들의 시집,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 평론집 등을 열심히 읽으면서 작품 쓰는 일에 정성을 모았다.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글감을 찾았다. 기나긴 세월을 말없이 자릴 지키고 앉아 있는 산등성이를 걸으면 무슨 진리라도 캐어보고 싶고, 눈에 띄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생물이나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이 간다. 산꼭대기에 오를 동안은 꿈을 펴보기도 하고 시의 경지에 묻혀 보기도 한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발아래 펼쳐져 있는 들판을 관망하고 높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푸른 꿈을 키워간다. 나의 데뷔작 ‘시계가 셈을 세면’도 등산길에서 글감을 얻어 정리되었다.
아이들이 잠든 밤에도/셈을 셉니다.//똑딱똑딱/똑딱이는 수만큼/키가 자라고/꿈이 자라납니다.//지구가 돌지 않곤/배겨나질 못합니다./별도/달도 돌아야 합니다.//씨앗도 땅속에서/꿈을 꾸어야 합니다.//매운 추위에 떠는 나무도/잎 피고 꽃 필, 그리고 열매 맺을/꿈을 꾸어야 합니다.//시계가 셈을 세면/구름도 냇물도/흘러갑니다.//가만히 앉아 있는 바위도/자리를 뜰 꿈을 꿉니다.//시계가 셈을 세면/모두모두 움직이고/자라납니다.
나는 등산을 하면서 이른 봄 묵은 잔디에 속잎이 나서 조금씩 더 푸르게 덮여 가는 것, 묵은 가지에 물이 올라 새순이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것, 산봉우리에서 햇살을 내뿜으며 솟아오르는 해님,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들판을 달리는 냇물은 언제나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날마다 보아 왔다. 또 바위 위에 올라앉아 책을 읽으면서 이 바위도 언젠가는 주춧돌이 되거나 석수장이 손으로 사자 모양으로 다듬어지거나 할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향상하고 발전한다는 걸 늘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위의 작품은 <한글문학>에 제1회 추천 작품인데, 다른 두 작품과 함께 조유로님이 추천했다. 당선 완료 작품 ‘이른 봄’은 다음과 같다.
암탉이 알을 품듯/봄님이/온 세상을 품고 있다/안개 낀 아침.//닭의 체온으로/보송보송 예쁜/ 병아리가 깨이듯//봄님의 품안에서/병아리처럼 그렇게 예쁜/연둣빛 새싹이 깨일 테지.//보슬보슬 내리는 안개비는/새싹의 젖줄//새싹이 눈을 감고/강아지처럼 젖을 빤다.
심사를 하신 이원수님은 다음과 같이 추천의 말을 썼다.
최춘해님의 ‘이른 봄’을 추천한다. 임의 동시들은 이미 적지 아니 보아왔고 기대도 걸어 온 나였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귀여웠다. 아침 안개를 알을 품은 암탉처럼 느끼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안개비를 새싹의 젖줄로 보고 “새싹이 눈을 감고/강아지처럼 젖을 빤다.”고 한 끝 연에서 이 동시는 뛰어난 시의 광채를 보게 해 주었다. 최님은 그의 생활 시들에서 내용의 동화나 소설다움에서 떠나 시 다운 내용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준 것 같다.
2. 상주글짓기회,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 시절
상주는 ‘삼백의 마을’ ‘감이 열리는 마을’ ‘동시의 마을’ 등의 별명이 있다. 누에 고치, 곶감, 흰 쌀 세 가지의 흰 색, 즉 흰 옷을 입은 우리 민족의 순수성을 나타낸 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글짓기 지도를 하다가 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현득 김종상 같은 동호인을 만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상주에서는 글짓기회가 있었는데, 회원들이 글짓기 지도를 활발히 해서 상주 아이들의 글이 신문이나 잡지에 쉼없이 발표되었고 백일장이나 현상모집에서도 두드러지게 많이 입상되었다. 그리고 윤석중 선생의 안내로 상주 아이들의 작품으로 서울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그 작품으로 <동시의 마을>이라는 책을 내었다. 윤석중 선생은 상주를 ‘동시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이때 글짓기 지도 교사들은 글짓기 지도를 하는 목적이 단순히 글을 잘 쓰게 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다 했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글짓기 지도를 하기도 하고 자비로 아이들을 대구 서울 등 외지의 백일장에 인솔해 가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노는 날에도 아이들 작품을 싣는 어린이 신문을 등사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상주읍에서 글짓기 회원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상주읍에서 8km 떨어진 사벌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이 멀어서 중간에도 만나야 될 만큼 회원들이 보고 싶었다. 글짓기회에서는 글짓기 지도 방법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각자의 작품에 대한 합평도 했다. 당시에 전국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가 있었는데, 내가 간사를 맡았다. 이 회에는 회장도 없고 간사가 모든 일을 맡아서 했다. 전국의 교단에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자기의 작품을 회원 수만큼 등사를 해서 간사한테 보내면 간사는 회원 수만큼 <은방울>이라는 작품집을 만들어 회원에게 우송을 했다. 전 달의 작품에 대한 평을 함께 실었다. 21호(1965년 7월 1일 발행)와 28호(1965년 12월 1일 발행)는 인쇄판으로 내었다. 서문은 이원수 고문님이 썼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중앙일보사에서 최종률 기자가 취재하러 내가 근무하는 사벌초등학교에 왔었다. 중앙일보 문화면에 전면 특집 기사(1966년)로 실었다. 최종률 기자는 내가 거처하는 사벌초등학교 사택에서 하루 밤을 묵어서 갔다. 상주 글짓기 회원과 교단아동문학 동인회 회원을 만난 것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내가 매일신문에 등단을 하던 1967년에는 대구시가 경상북도에 합쳐져 있을 때였다.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이재철, 김성도, 김진태 세 분이 해마다 심사를 했다. 전 도에서 아동문학에 등단을 한 사람은 손꼽을 정도의 숫자밖에 되지 않았다. 신현득, 김종상, 허동인, 강청삼, 권태문, 김한규 등이다. 문학 단체로는 1957년에 창립된 대구아동문학회 하나뿐이었다. 이응창, 김성도, 김진태, 윤운강, 여영택, 이민영, 신송민, 정휘창, 서월파, 윤혜승, 서광민, 박인술 등이 창립회원이었다. 대구아동문학회에서는 동인지를 발간했다. 창간호<달뜨는 언덕>을 1958년에, 2호<꽃과 언덕>을 1959년에, 3호<오손도손>을 1966년에, 4호 <나무는 자라서>를 같은 해에 발간했다. 이 회에 들어가서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회원은 원화여중고 교원과 계성고등학교 교원이 많았고, 신송민, 신현득, 김선주, 허동인 등 초등학교 교원들이 함께 활동했다.
이때 한 주일에도 몇 차례씩 만난 사람은 신현득이다. 신현득이 칠성초등학교 근무할 때 칠성초등학교 근처 어느 오두막집 셋집에 찾아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식량이 없어서 콩나물이 더 많게 섞인 보리밥을 대접 받았다. 아마 불청객이 갔기 때문에 부인은 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양식이 모자라 허덕이던 때에 내가 왜 찾아가서 꼽사리를 끼었는지 후회가 된다. 신현득이 칠성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는 칠성학교 근처 막걸리 집에서, 대구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근처에 옥이 집이 있었는데, 늘 그 술집에서 만나 막걸리를 먹으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에도 수 차례 만났었다. 우리가 만나면 가는 집이 정해져 있다. 염매 시장 안에 돼지 국물 집, 학원서점 옆의 가보세 등이다. 권기환, 이천규, 김선주 등 우리 또래끼리 만날 때는 <가보세>는 안 간다. 가보세는 맥주 양주를 파는 집이라서 술 값이 비싸다. 그래서 김성도, 이재철 등 귀한 분을 모실 때만 가보세에 갔다. 김진태 윤운강 정휘창 이응창 박인술 등 선배들이 있었지만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서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술값은 서로 내려고 다투었다. 신현득의 고집을 못 이겨서 내가 질 때가 많다. 평소에도 정의감이 강해서 비뚤어진 것을 그대로 두고 못 본다. 향촌동 어느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는 두 청년을 봤다. 우리 둘은 거기에 끼어들었다. 신현득이 경우에 어긋난 사실을 따질 때 나도 신현득을 두둔했다. 그랬더니 그 건장한 청년 둘은 우리들 목을 졸랐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뒤에 오래 목이 아팠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은 향촌동의 유명한 깡패라고 했다. 그만하기를 다행이라고 했다.
상주에 있을 때 이야기다. 이무일, 김종상, 이천규, 강세준 권태문 등이 글짓기 지도와 작품 쓰기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자주 모였는데, 다 친하게 지냈지만 그 중에서도 이무일과 나는 가장 가까운 사이었다. 이무일은 나보다 나이가 7살 아래이지만 격의 없이 지낸다. 남녀 사이에 연애를 할 때, 만나도 자꾸 만나고 싶은 것처럼 동성간인데도 자꾸만 곁에서 보고 싶었다. 이무일은 상주초등학교에 근무하고 나는 사벌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우리 집에서 마음 턱 놓고 허리띠를 풀어 놓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아무 거리낌없이 속에 품은 이야기를 털어 놓으며 술을 마셨다. 아마 너댓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막걸리도 한 말쯤 먹었을 것이다. 드디어 속에 들어갔던 술이 되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먹었던 술이 속에서 새끼를 쳐서 배가 되는 양을 토해냈다. 온 방에 술이 그득했다.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처가 방에 그득한 술을 처리하느라 땀을 뺐다. 우리 둘은 그런 뒤에 더 가까워져서 이무일이 작고하기 전까지 사뭇 가까운 사이로 지냈었다.
내가 가까이에서 아동문학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김종상과 신현득이다. 나이는
나보다 적지만 등단을 먼저 했고 작품을 잘 썼기 때문에 문학에서는 선배로 받들며 많이 배웠다. 그때 좋아했던 작품은 신현득의 ‘고구려의 아이’, 김종상의 ‘흙손 엄마’ 등이다.
첫댓글 몇 십년째 빼놓지 않고 연간집을 내니 참 대단합니다. 최춘해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상주모임이 우리 어린이문학사에 끼친 영향을 돌아보니 다시 한번 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