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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어떤 실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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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험]
박성규 제9시집 / 그루시선 080 / 도서출판그루(2015.009.1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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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험
박성규
밥을 먹다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손이 아프듯이
식탁은 얼마나 아팠을까
아픔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아픔이란 것이 어떻게 생겼을까
눈물이 핑 도는 사이
식탁의 전자 몇 개는 궤도를 이탈하였을 텐데
눈물을 닦고 나니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했는데
멀쩡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밥알 몇 개가
튕겨 나간 전자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라진 꿈
박성규
거울 앞에 섰다
살아온 날이
영화가 되어 상영되었다
행복한장면도 있었고
슬펐던 장면도 있었다
꿈과 야망으로 뭉친
삶의 대작
거울 앞에 서면 회상에 젖지만
주인공이 없는 영화를
왜 보았을까
집시가 되는 길
박성규
시간을 피해
도망 다니는 일도
오십년 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침마다 냉장고에 갇힌 냉수 한 잔 마시고는
출근을 하고
텁텁한 커피 대여섯 잔 마신 후에야
퇴근을 하는 일상
지친 어깨가 땅에 닿지 않게
소주라는 마약을 섭취하여
하루라는 시간을 잊으려 하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가지는
절대 변할 수 없는 시간
일상에서 벗어나 도망갈 곳이라곤 없으니
시간을 벗어날 수 있으려면
집시가 되어야했다
우선순위
박성규
시력이 약해졌다
안경에게 도움을 받아 살았다
신혼부부처럼 붙어 살았다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살지 못했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가까운 것을 볼 땐 팽개쳤다
권태기 맞은 부부가 되었다
아내와 안경 사이
항상 안경을 먼저 선택했다
그런 속내를 알아차린 아내
벗어 놓은 안경을 수시로 깔아뭉갰다
내 이름 석 자
박성규
이름 없는 들꽃은 없다
이름을 모를 뿐이다
불러 주지 않았을 뿐이다
무시한 적은 더더욱 없다
무식한 것도 아니다
묻지 않았을 뿐이다
이름이 없다고는 말하지 말자
알아도 달라질 것 없지만
모른다고 달라질 것 또한 없으니
내 이름 석 자 박성규도 그렇다
알려 준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알려 주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없는 것이 아니잖은가
내 이름 석 자
들꽃 같다
빈집
박성규
주인 없는 집 우물가
앵두꽃이 피었다
앵두가 빨갛게 익으면
모양새가 장관일 터
저도 과일이라고 자존심 세우다
빨갛게 익겠지만
새들이 와서 한바탕 쪼아 먹을 땐
빈집이 아니다
밭두렁을 거닐다
박성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물이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했다
윗 논에서 물이 넘치기를 기다려도
물은 넘치지 않았고
엉뚱한 곳으로 새는지
갈수록 물이 줄어들었다
둑을 무너뜨리기도 했고
구멍도 내 보았지만
수십 번 되풀이하다 보니
마음조차 주저 않았다
가뭄 타지 않고
폭우가 쏟아져도 눈 깜짝하지 않고
가랑비가 내려도 마음의 동요도 없는
농사짓는 일
心田 일구기가 제격이었다
밭두렁을 거닐며
잡초들과 뒹굴며 놀고
올챙이와 대화를 하면
회전의자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편할 것 같다
바람을 만났다
박성규
구들*이 바람을 만났다
앞사정 국당 장매 천원 탑리 배리
선두 도초 매바위골
구들이 보이는 곳 여기저기 다니면서 바람을 만났다
한때는 황톳물 하나로 하나 되었던 곳
그래서 合水걸이라 불렸는지 모르지만
모래내와 기린내가 아직도 만나는 그곳엔
이치돈의 천경림의 사연이며
남산 신령의 상염무가 휘날렸다는 사연이며
경부선 확장 공사며 도동산 인도 공사 중이지만
간간ㄹ이 신라 냄새가 나기도 했다
바람 앞에선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이 들어 자랐던 동리로 돌아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계집애 가슴 건드려 본다고
돌멩이 하나 주어서 던졌다는 소문은
인제 들리지도 않지만
바람을 만나서
바람에게 돌 하나 주워서 힘껏 던졌다
바람이 맞아서 다쳤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구들 : 경주 오릉 옆 들판
옷장
박성규
질서라고는 없다
문을 열면
길고 짧음도
얇고 두꺼움도
순서라곤 찾아볼 수 없다
사계절 구분도 없다
장식용이 아니라
송충이
박성규
책갈피 속에서
책꽂이가 나왔다
책꽂이 속에서
책장이 나왔다
한동안
책과 대면하지 않으려고
고개 돌렸는데
고개를 돌리면서
일부러 그 모든 것을
책갈피 속에 숨겼었는데
오늘
무심코 펼친 책갈피 속에서
죄다 쏟아져 나왔다
송충이가 되었다
틈
박성규
살다 보니
틈이 생겼다
사람과 사람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일에서 손을 놓고 보니
온통 틈투성이다
똥장군은
물만 부어도 틈이 메워지는데
시멘트나 실리콘으로는
메울 수 없는 나
틈 메울 묘책 찾다
생을 마감할 것 같은
전설 만들기
박성규
맨발로 뛰어서 우승을 했고
맹장 수술 하고 나서
상처가 아물기 전에 뛰어서
또 우승을 하여 2연패를 했고
교통사고로 인하여 하반신 마비가 되어도
장애인 양궁에서 우승을 했던
아베베를 기억한다
값진 운동화를 신고
감기만 걸려도 약으로 처방을 해 버리고
멀쩡한 육신을 가졌음에도
우승은커녕 도전 한 번 해 보지 못했어도
아베베를 기억한다
조그마한 비극을 만나도
순간적으로 좌절해 버리고
밥숟갈 들 힘이 남아 있음에도
쉽사리 힘겹다고 포기해 버리는 나
아베베 닮기는 아예 글렀다
이승에서의 전설 만들기
꿈속으로 변해가는 오늘
전설의 아베베만 기억한다
새
박성규
새를 말할 때
간혹 붉은 새 혹은 푸른 새라고
색깔을 말할 때가 있다
40m 거리에서 좁쌀을 발견하고
1920m 밖에서 움직이는 쥐도 발견한다는
새도 있다
새는 왜
안경을 끼지 않을까
새를 보기 위해 안경알을 닦지만
아직까지
안경 깐 새는 보지 못했다
색깔과 안경
색맹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사이라는 말 자체만 줄여도
새가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생각이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세월타령
박성규
주전 앞바다 돌섬에
갈매기 몇 마리
고개 숙이고 앉아 있다
다른 갈매기들은 괴성을 지르며
고공비행에다 저공비행까지 곁들이며
신바람 난 듯 주전 앞바다를 비행하는데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갈매기가
여럿 보인다
꿈쩍도 않는다
먹이는 제때 먹었을까
피곤해서 쉬는 걸까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심기를 건드려
침묵시위 하는 것인가
가족을 잃어 슬퍼서 그런 것일까
진도앞바다에 다녀온 것일까
무서운 층간 소음
박성규
의욕이 떨어지고
말수가 줄은 나이인데도
아랫도리가 빳빳하다
부질없다 하면서도 하다 보니
아들딸 낳고 살고 있다
결코 부질없지는 않았는가 보다
층간 소음으로 인해
다투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내게도 저런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를 일
죽음 앞에선 경건해진다고
남은 삶을 정리하려고
마음을 추스르긴 한다만
애욕이 발정하는 것을 억누르지 못해
무심코 정사를 벌이곤 한다
욕정의 노예로 살고 있는
층간 소음 신고당할지 모를 일
직립으로 살기
박성규
정의 앞에선
그 누구에게라도 허리를 굽히지 말라던
아버지 말씀 떠올라
한평생 굽실거리지 않고
오직 직립 한길로만 살았다
직립이 아닌 자들이 직립처럼 산다고
신문이나 TV 뉴스에 종종 나오긴 했어도
나름대로는 직립의 길을 걸었다
힘겨운 일도 많이 겪었다
이따금 후회도 하곤 했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 길을 영원히 걸을 수는 없었다
그레도 죽는 날까지
직립의 길을 걸을 작정이다
헛발 짚을 때
“엄마야” 하더라도
새벽은 없다
박성규
동트기 전
어둠이 밝음으로 이어져
아침이 되어도
여명을 기다리는 순간
정적을 깨고 일어나는 것은
모두 눈만 비빈다
그들 사이
벽은 없다
부드러운 융단뿐이다.
분풀이
박성규
5월 벌판
노고지리가 없다
들일 나갔던 식구들 돌아올 시간
기별도 주었고
보리밭에서 뒷일 볼 때
망이라도 봐 주었던
노고지리인데
보리밭 이 없으니
어디 가서 노고지리를 찾을까
속상한 마음에
달맞이 꽃대만 꺾는다
우박
박성규
헬리콥터가 날아와
무차별 난사를 가했다
난사당한 자리는
쑥대밭이 되었다
상처 난 자리마다
한숨이 출렁거렸다
여름인 듯 겨울이고
겨울인 듯 여름이었다
21세기에 발생한
전쟁 실황이었다
반달
박성규
뜨겁던
여름을 지나
한로를 앞두고
누굴 그리워하다가
반쪽이 된
내 얼굴
낮달이 되어
서녘 하늘을 배회하네
돌아오지 않을 봄
박성규
입춘이 지났는데도
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영하 7도
아열대성 기후에겐 치명적
이보다 더 심했던 날을 기억하면서
한파 앞에 나서니
따뜻했던 날마저 모두 겨울이다
내공도 떨어지고
면벽 참선할 기력도 없도
움츠러진 모가지
참 불쌍하다
입춘
大吉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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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유종이 미에 대해 생각한다.
생업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꽤나 길었지만
마무리가 시원찮다.
허무감이 앞선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면
현실 앞에서 어깻죽지를 늘어뜨려야만 했다.
삶이란?
시란?
아직 남은 시간
비뚤어진 것은 잘라 내고
올바르고 곧은 것을 위해 다시 일어서려 한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털갈이하는 이유로 둘러대고 싶다.
2015년 아픈 봄을 보내면서
박 성 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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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第9詩集 [※어떤 실험※]
[ 해설 ] -
평범 속의 경이, 그 놀라운 발상법
박신헌(가톨릭상지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1. 시, 영혼의 방부제 그리고 삶 자체
<시는 영혼의 방부제다>미국의 대표 시인 윌트 휘트먼의 말인데, 나는 이 명제를 박성규 시인에게 붙여주고 싶다. 그것은 그의 제9시집 『어떤 실험』의 자서 自序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유종이 미에 대해 생각한다
생업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꽤나 길었지만
마무리가 시원찮다
허무감이 앞선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지만
마음대로 되지않는 것이 현실이라면
현실 앞에서 어깻죽지를 늘어뜨려야만 했다
삶이란?
시란?
아직 남은 시간
비뚤어진 것은 잘라 내고
올바르고 곧은 것을 위해 다시 일어서려 한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털갈이하는 이유로 둘러대고 싶다
2015년 아픈 봄을 보내면서
-<自序> 전문
2015년 봄 즈음에 쓴 이 <自序>에는 적어도 외형적으론 밝고 긍정적인 언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첫 구절부터 <유종의 미>를 들먹이고 있다. 유종의 미란 무엇인가? 일이 다 끝나갈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종말 의식의 한 반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면서 살아온 삶에 대해 <허무감이 앞선다>고 말하며 <현실 앞에서 어깻죽지를 늘어뜨>리고 말았다고 자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약간 과장되게 해석하면 그는 이제 삶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나 의미, 희망 등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서도 <시>의 끈을 놓지 않는다. 유종의 미를 거론한 건 결국은 시를 통한 생의 마무리와 일치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가 <삶이란?> <시란?>하면서 나란히 두 단어를 나열한 것은 이제 그에게 있어 <삶은 곧 시이며, 시는 곧 삶의 전부>라는 의미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박성규에게 있어 모든 것이 허무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한줄기 빛으로, 영혼의 방부제로 작용하고 있는 실체가 시라는 의미와 동질성을 띠는 표현이라 해석되는 소인인 것이다. 그러한 시에 대한 애착은 <나의 墓地>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의 墓地는>이라는 시에서 시적 화자는 <山頂에>까지 이미 묘지가 들어선 마당에 <힘도 없고/백도 없고/돈도 없는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시 속에다 내 묘지>를 쓰는 것뿐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詩
요놈 마디에 흙이 있구나
말을 하면 천기가 누설될테니
시 속에다 묘지를 써야지
이로 보아 시인은 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2. 새로운 생각 갖기, 발견의 미학
박성규의 제9시집『어떤 실험』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돋보이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 갖기 즉 발견의 미학이라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발견의 미학은 크게 고급스럽거나 거창한 것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그것은 그저 지나칠 정도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들을 독특한 시각으로 집어내고 있다.
밥을 먹다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손이 아프듯이
식탁은 얼마나 아플까
아픔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아픔이란 것이 어떻게 생겼을까
눈물이 핑 도는 사이
식탁의 전자 몇 개는 궤도를 이탈하였을 텐데
눈물을 닦고 나니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했는데
멀쩡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밥알 몇 개가
튕겨 나간 전자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실험」전문
박성규의 이번 시집 전체를 통해 가장 좋은 시라고 평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제목부터 평범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무슨 이유였는지 밥을 먹다가 느닷없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친다. 돌발적인 행동에 많은 독자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시에서 시인 자신임이 분명한 시적 화자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인 것이다. 일단 행동을 해놓고 생각을 해보는 행동우선자인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생명력이 없는 식탁에게 <얼마나 아팠을까>하고 동병상련적 위로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쩌면 유치한 언어유희의 일단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순간적으로나마 역지사지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발상법이라고 인정해 주고 싶은 부분인 것이다. 이것은 크게 보아 물활론적 세계관의 한 발로일 터인데 시인의 주변 사물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의 일단으로 보인다. 그러한 발상법은 <밥알 몇 개가/튕겨 나간 전자 자리에 앉아/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밥알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밥알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상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다른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시적 화자 아니 시인 박성규는 일상적인 사실들에 대해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실험」에는 크게 세 가지 사실이 실험되고 있다. 첫째는 신체나 사물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아픔 여부>를 실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가 <식탁>을 내리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결과는 <나만 아픈 것>이 된다. 정작 식탁은 아픈 기색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그 실험은 사실은 하나마나 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두 번째는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하는 실험이다. 서정적 자아는 밥을 먹다가 느닷없이 식탁을 주먹으로 쳐버렸다고 했다. 그것은 어쩌면 되는 일도 없고 밥 먹는 것도 귀찮은 상황에서 짜증 섞인 자포자기의 한 방법으로 그렇게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튕겨져 나간 <밥알 몇 개가>난장판이 된 그 식탁의 한 자리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객전도의 발상법이긴 하지만 시인의 무의식속에서는 <그래도 사람은 먹어야 산다>라는 강한 메시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마나 한 실험을 한 것이다. 도대체 먹지 않고 살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그것을 모르는 존재 또한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이를 통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실험은 <불변 즉 항상성>에 대한 것이다. 인간들은 누구나 변하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항상성恒常性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산천이나 바위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것을 우리는 무상無常이라는 말로 대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또 한 번의 역발상을 하고 있다.
눈물이 핑 도는 사이
식탁의 전자 몇 개는 궤도를 이탈하였을 텐데
눈물을 닦고 나니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했는데
멀쩡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식탁도 하나의 사물이기에 <나>가 내리쳤을 때 분명 식탁의 입자(시인은 굳이 <전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몇 개 정도는 튕겨나갔을 터인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식탁은 그 자리에 온전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했는데/멀쩡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며 새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의 주변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결국 변한 것은 <나뿐>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모든 실험에서 실패를 하고 만 것이 되는 것이다. 실험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현실 복귀>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박성규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스카이 콩콩」에서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어떤 교훈이나 문제점을 던져주기도 한다. 아파트 사이 공터에서 참새들이 먹이를 주워 먹으며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스카이 콩콩을 탄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원래 그 공터에서 스카이 콩콩을 탄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어린아이들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곳엔 아이들은 하나도 없고 참새들의 천국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은 공부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놀이터를 참새에게 양보해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을 <참새보다 못한>불쌍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참새보다 못한 아이들
스카이 콩콩을 타 보긴 했을까
올림픽 준비하듯
요리조리 콩콩 뛰는 참새가
새삼 반가운 아침
이 부분에서 시인은 아이들과 참새 즉 자연물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놓고 있다. 한쪽은 지극히 우울한대 다른 한쪽은 무척이나 발고 명랑한 것이다.
「立秋斷想」에서는 보다 과감한 발상법을 선보이고 있다.
여름 한 철 신나게 쏘다니다가
터벅터벅 걸어온 가을이
부동산중개소에 들러서 급히 계약서를 썼다
낡은 집이야 리모델링 한다지만
겨우 겨우 마련한 더움의 터전을
기별도 허락도 없이 겨울에게 팔아 버리고 말았다
저 들녘은 어찌되려나
저 나무들은 또 어찌되려나
황금색과도 파란색과도
흥정 한 번 못 해보고
까마귀 울음소리 들린다고
송두리째 겨울에게 팔아 버린 가을
봉이가 분노할 것이다
-「立秋斷想」전문
이 시의 주인공은 ‘가을’이다. 가을이 봄이나 여름 그리고 온갖 산천과 나무들에게 기별도 허락도 없이 겨울에게 계절을 팔아 버렸다는 내용이다. 계절의 무상한 변화를 결코 놓치지 않고 새로운 생각 갖기로 표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겨울을, 가을이 양도한 부동산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가을을, 아무에게도 상의를 하지 않고 마음대로 부동산을 처분해 버린 악덕 부동산 업자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삶의 편린 내지 생활 주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호기심이 없이는 좀처럼 나타나기 힘든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박성규는 이러한 수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새로운 시각 갖기의 한 표본이 될 만하다 할 것이다.
3. 일상적 삶의 소묘, 그 허심의 시상
박성규의 시 중엔 자신의 일상적 삶의 편린을 깡그리 보여주는 시들이 많다. 이 시들은 너무나 진솔하여 마치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느낌까지 들게 하며 때로는 독자들이 민망할 정도의 사연까지 노골화시키기도 한다. 어떤 시인의 시에나 그의 일상시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것을 시적으로 약간 왜곡하거나 우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박성규의 일상시는 그러한 기교가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여 주거나 토로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늦은 퇴근에 귀가를 서둘러
윗도리를 벗고 양말을 벗고 바지를 벗고
허겁지겁 하루까지 벗는다
허기진 배를 채워 줄 식탁
구미 당기는 반찬이 없다
라면을 삶아 먹을까 국수를 삶아 먹을까
결국 한 때 끼니만 때우면 되는 일
차려진 밥상을 위해 감사한 마음을 앞세우고
한 숟갈 한 숟갈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지만
그것도 시원찮아 냉수를 꺼내어 벌컥벌컥 마신다
하루를 벗기엔 아직도 역부족인가
설거지를 미뤄 둔 채
습관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은 연기 한 모금 쭉 빨면 정신이 들까
자고 있는 TV를 리모컨으로 깨우다가
안경을 벗었다 꼈다 반복하다가
진동도 없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물휴지 한 장 꺼내어 발가락 사이를 닦다가
베란다 창문을 열어 조잡스러운 공기를 몰아냈다가
책을 펼쳐들고 넘기는 시늉을 했다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뉴스와 입씨름하다가
심심한 입을 위해 생라면을 부수어 먹기까지는
고작 한 두 시간
샤워가 꼭지를 틀어
하루를 씻어 내려야만 끝나는 교전 뒤의 정적으로
잠을 청하면 하루를 벗을까
-「거룩하지 못한 밤」전문
이 시에는 역시 시인임이 분명한,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고독하고 바쁘고 무질서한 일상이 거의 가감없이 노정되어 있다. 설명을 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소박한 이 시에는 라면으로 끼니 때우기, 설거지 미루기, 식후 끽연, 리모컨으로 TV서핑하기, 휴대폰과 안경 만지기, 물휴지 한 장으로 발가락 닦기 등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빨리 샤워를 하고 잠을 청함으로써 하루의 교전을 마무리하려는 소망이 가득 차 있다. 이 시 속 인물의 삶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혼자 사는 사나이의 때에 절은 게으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 제목이 <거룩하지 못한 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적나라한 일상 표출은 자기 숨기기와는 정반대인 자기 노출의 한 편린인 것이다. 이것은 곧 시인의 순수함이 한 단면이면서 세상에 대한 떳떳함과 자부심의 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페퍼먼드란 말에 향이 담겼다
라디오 광고에 중독된 머리는 롯데 껌부터 떠올렸다
페퍼먼트의 실체는 논두렁에서 많이 자랐던 박하
페퍼먼트 칵테일 한잔 마시고 싶다
함께할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제 맛을 느낄 것 같은
오늘
페퍼먼트는
정신 안정에 효과가 있고
진통 효과도 탁월하단다
소화 촉진은 말할 필요도 없고
호흡기 관련 질환에도 잘 듣는단다
항균 작용에도 유용하고
체질 개선에도 좋고
눈 건강해도 도움이 된다니
페퍼먼트에 취하고 싶다
박하 향에 취했던 유년을 생각하니
페퍼먼트 칵테일이라도 마시고 싶다
그이와 함께라면 더더욱 좋을
오늘
그이는 무엇 하고 있을까
- 「박하」전문
이 시는 박하 향 껌을 생각하며 박하 건강식품을 떠올리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박하 칵테일을 한잔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여기에도 시인의 일상적 삶이 고스란히 노정되어 있다. 다만「거룩하지 못한 밤」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이 시에는 행위보다는 일상적 삶의 사고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집을 떠나 홀로 외지에 살고 있는 건강한 사나이로서 그리움의 대상을 구가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이 시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부분은 <함께할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제 맛을 느낄 것 같은/오늘>이라는 구절이다. 외로움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거의 전적으로 공감할 것 같은데 시인은 이러한 <생각>마저도 거의 액면 그대로 노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박성규의 일상시에는 시인의 무의식적 버릇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경우도 있다.
바지를 입고 나서는
꼭 오른쪽 엉덩이를 만져 본다
엉덩이 만지는 습관은
꽤나 오래된 듯 싶다
바지를 벗을 때까지
엉덩이를 만지는 것이
고약한 손버릇이긴 하지만
행여 남들 눈에 띄면 무안해지기 일쑤라
그럴 때면 토닥토닥 두드리기만 한다
오늘도 바지를 입고서
엉덩이를 만졌다
무사했다
-「지갑 확인」전문
엉덩이에 붙어 있는 뒷 호주머니의 지갑을 확인하는 일이 일상적 버릇이 되어 버린 시적 화자의 습관을 표출한 이 시는 <내> 소유물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버릇이라는 게 있다. 계속 손톱을 깨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술을 쥐어뜯는 사람도 있고 민망한 부분을 쓰다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주인공은 호주머니의 지갑을 계속 확인하고 있다. 화자는 그것이 오래된 버릇이라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남에게 들키면 무안한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남이 있을 때는 그냥 엉덩이를 토닥거리기도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거짓없는 일상적 삶의 버릇이 노정되었다는 시인의 토로인 것이다.
4. 자아성찰, 세계Welt에 대한 겸손과 화해
박성규 시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아성찰의 시가 많다는 점이다. 이들 시 중에는 무지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본의 아니게 많이 가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곧게 살리라는 옳음에 대한 굳은 의지의 시들도 있어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한다.
산수유 소식이 들리고
개나리 진달래가 피었다
2014년, 봄이 왔다
그래
봄이 왔군
언 땅에서 싹이 돋고
마른 가지에 움이 트고
그래
봄이 왔군
때가 되면 왔다가
때가 되면 가 버리는 계절이지만
그럴때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
태어나서 죽기까지
이름 한 번 남겨야 할 텐데
2014년 봄
또 그렇게 가 버릴 것이고
지나가면 다시는 못 올 시간 앞에서
낙담만 한다
-「봄, 2014」전문
이 시는 속절없이 왔다가 지나가 버리는 세월을 한탄하며, 살아 있는 동안 이 세상에 이름 한 자 남기기를 염원하는 자성시다. 특히 이 시에서 <때가 되면 왔다가/때가 되면 가 버리는 계절이지만/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태어나서 죽기까지/이름 한 번 남겨야 할 텐데>라는 부분이 핵심적 내용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가 자성自省의 키포인트가 되고 있다. 이를 보아 시인 박성규는 명성에 대한 야망이 약간은 도사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억지로 그것을 달성하려 하지는 않는다. 즉 자기 명예를 위해 남에게 피해를 준다든지 무리를 할 생각은 없다고 은근히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지나가면 다시는 못 올 시간 앞에서/낙담만 한다>는 자성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배부른 가을」에서는 넉넉해진 삶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을 자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넉넉함>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인의 소박성을 엿볼수 있어 재미있다. 화자는 지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단감 두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모두 <내>가 먹을 <내>소유의 짐들이다. 순간 화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감 껍질을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며 맛있게 말려 먹었던 사실을 떠올린다. 지금은 저 감을 깎으면 버릴 것이 분명한 감 껍질을 생각하며 넉넉해진 삶에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자성이 이 시의 핵심내용인 것이다.
지금 나는 저 감 껍질을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릴 것이 분명
홍시가 될 때까지 그냥 둬 버릴까
껍질을 모아 말려 볼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감을 두고
고민을 한다
「산에 안 가는 핑계」에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무지를 자성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그래 너희는 참나무가 맞구나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너희는 왜 ‘참’자가 없니?
잎사귀 따다가
눈앞에서 고르라고 한들
구분할 수도 없지만
누구에겐 붙여 주고
누구에겐 붙여 주지 않은 사유
난들 알겠나!
허! 참!
‘참’자를 도둑맞을 리도 없는데
참나무가 맞긴 맞니?
구분할 수가 없어서 민망하구나!
헷갈려서 못 가겠구나!
-「산에 안 가는 핑계」전문
산에 가면 참으로 많은 나무가 있다. 그중엔 <갈참나무/졸참나무/굴참나무>와 같은 참나무 종류도 있고 <신갈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같은 참자가 없는 참나무도 있다. 그런데 지금 시적 화자는 그 이유를 모른다. <참>자를 붙이는 것과 안 붙이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화자는 위에 제시된 나무들 잎사귀를 가지고는 전혀 분간을 못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나무들을 대면할 면목이 없다는 것이, 그래서 산에 못 간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인 것이다. 이것은 곧 세계wilt 에 대한 무지에의 자성이며 겸손의 한 자세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자엽자두」가 있다. 벚꽃으로 혼동했던 자엽자두꽃에 대한 미안함을 노래한 이 시는 분별력 없는 자신을 나무라는 자성과 겸손의 시이다.
이에 비해 「직립으로 살기」는 시인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 다른 시들과 차이가 있다.
정의 앞에선
그 누구에게라도 허리를 굽히지 말라던
아버지 말씀 떠올라
한평생 굽실거리지 않고
오직 직립 한길로만 살았다
직립이 아닌 자들이 직립처럼 산다고
신문이나 TV뉴스에 종종 나오긴 했어도
나름대로는 직립의 길을 걸었다
힘겨운 일도 많이 겪었다
이따금 후회도 하곤 했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 길을 영원히 걸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죽는 날까지
직립의 길을 걸을 작정이다
헛발 짚은 때
“엄마야”하더라도
-「직립으로 살기」전문
자성의 시이기는 하지만 모처럼 대하는 의지와 긍정의 시인지라 상당히 반가운 감이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아버지 말씀>따라 정의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TV등 매스컴을 통해 <직립이 아닌 자들이 직립처럼 산다고>하는 공허한 말들도 많이 들어 봤고, 직립으로 살려다 힘겨운 일도 많이 겪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직립의 길을 걸을 작정이다>고 노래한다. 너무 지나쳐 비명을 지르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 시적 화자의 결의인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성이면서 의지이고 동시에 세계에 대한 굳은 결의인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화자는 세계와 따뜻한 화해를 이루게 될 것이다.
5. 망향 혹은 귀향 의식
박성규의 시에는 망향 내지 귀향 의식을 다룬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그의 망향시에는 직접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의지 내지 소망을 노래한 것도 있고 이젠 남의 집이 되어 버린 옛집을 회상하는 시들도 있으며 풍문으로 떠돌던 고향의 옛날이야기를 회상하는 시 등 다양한 종류의 시들이 포진하고 있다.
고향으로 가자
가서 아궁이에 불 지피고 물 데워서
객지 생활에서 찌들은 때를 씻자
고향으로 가자
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허물어진 추억을 다시 꿰맞추자
비워 둔 사이
허물어지고 팔려 버렸다지만
여생을 오순도순 지내도록 새로이 집을 짓자
고향에서 살면
봄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면
거룩한 밤이 될 거다
사람 냄새가 담장 너머로 퍼져 나가면
행복한 세상이 될 거다
두 다리 쭉 펴고
오순도순 하루하루를 살자
고향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고향으로 가자」전문
타향살이에 지친 화자는 이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직접적으로는 <객지 생활에서 찌들은 때를 씻>기 위함이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허물어진 추억을 다시 꿰맞추>기 위해서이며 <사람 냄새> 나는 곳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도 고향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고향에 돌아가도 정말 옛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하면 시인은 너무나 서운해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옛 시인들도 일찍이 <고향에 돌아와도 옛날의 그 고향은 아니더라>라고 읊었던 사연을 한 번쯤 음미하길 바랄 뿐이다. 그것은 이미 남의 집이 되어 버린 그 고향 집을 노래하던 순간부터 시인은 감지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박성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해야 할 것이다.
일수 빚내어 샀던 그 집
스무 평도 안 되는 건평이지만
마당 있고 장독대 있고 뒤양간이 있는 그 집
재래식 변소가 싫다고 두엄 더미 앞에서
엉덩이 까 놓고 볼일 보았던 그 집
정월 대보름날이면 지신밟기로 떠들썩했던 그 집
셋방살이 면했다고 행복해했던 그 집
긴긴 동지섣달 군불 지펴 구운 새끼 감자를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서 까먹던 그 집
초가지붕이라고 잉기 엮어 단장하면
새집이라고 좋아라 했던 그 집
초가지붕 걷어내고 기와지붕으로 바꿔야 한다고
새마을 운동 바람 불었을 땐 황당했던 그 집
삼동 겨울 비닐천막 속에서 살면서
초가집 허물고 기와집을 지은 그 집
자식들이 장성하여 객지로 떠났고
주인마저 세상 뜨고 난 후 빈집이 되어 버린 그 집
빈집이라고 해도 때때로 꽃이 피었던 그 집
꽃이 피니 빈집은 아니라고 하던 그 집
꿈속에서 찾아가도 남의 집이 되어 버린 그 집
경주시 사정동 299번지인 그 집
-「그집」전문
남의 집이 되어 버린 고향 집에 대한 쓸쓸한 회상을 하고 있는 이 시에는 고향에서의 정겨웠던 풍정風情들이 고스란히 노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장성하여 객지로 떠나고 늙은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집주인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다. 주인이 바뀌자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꿈속에서 찾아가도 남의 집이 되어 버린 그 집>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박성규의 고향은 회억回憶하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실향민」은 보다 쓸쓸한 고향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흙먼지 털털거렸던 무렵부터
떠난 사람들
실향민이 되었다네
오릉 정비 사업 때 그랬고
천마총 정비 사업 때 그랬고
황룡사지 정비 사업 때 그랬고
안압지 정비 사업 때 그랬고
반월성 정비 사업 때 그랬고
시청 앞 고분군 정비 사업 때 그랬고
쪽샘동네 정비 사업 때 그랬고
흥륜사 복원 사업 때도 그랬는데
떠나지 않았어도
떠나야 할 운명을 안고 마음 졸이며 사는 사람들
언젠가는 실향민이 될 것인데
동창들이 실향민이 되었다네
정든 동리 떠난 나도 실향민이 되었네
타향살이 끝난 뒤에 모여서
고향 이야기 끄집어내면
눈시울부터 붉히려나
-「실향민」전문
경주가 고향인 시적 화자의 실향 내막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이다. 비포장도로 시절부터 고향 떠나기는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경주 유적 복원 사업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시적 화자는 노래하고 있다. 그 통에 시적 화자도 동창들도 모두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억지로 떠밀려서 떠나간 고향이기에 그들은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부터 붉히게 된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4. 결언
박성규의 시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진솔하다. 시적 기교나 화려한 수사가 별로 없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들은 의외로 많다. 앞에서도 거론했듯 박성규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을 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넘어갈 사실들에서 그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들은 얼마든지 계발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번 시집에서 박성규는 사라져 가는 것, 신체적 쇠약, 무無, 텅 빈 것, 실직, 고갈 등에 대한 관심을 집요하게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생활환경과 연결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미흡한 것, 낮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어린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내용들이라 할 것이다. 박성규 시인의 문운文運이 계속되길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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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박성규의 제9시집『어떤 실험』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돋보이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 갖기 즉 발견의 미학이라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발견의 미학은 크게 고급스럽거나 거창한 것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그것은 그저 지나칠 정도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들을 독특한 시각으로 집어내고 있다.
박성규의 시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진솔하다. 시적 기교나 화려한 수사가 별로 없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들은 의외로 많다. 앞에서도 거론했듯 박성규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을 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넘어갈 사실들에서 그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들은 얼마든지 계발해도 좋을 것 같다.
-- 박신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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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시인∥
∙ 경주에서 태어나
∙ 계간『시인정신』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 현재『포엠포엠』운영위원 및 작가회 부회장
∙ 대구문인협회 회원, 시와여백 동인, 시나루 동인, 일일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 시집 :『비 오는 날 쓰고 싶은 편지』『난장이들이 부르는 노래』『아버지의 면도기』『국화도 해바라기를 꿈꾸는가』『풍선불기』『꽃아』『멍청한 뉴스』『오래돤 겹눈질』『어떤 실험』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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