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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군(務安郡)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남부 무안반도에 있는 군.
동쪽은 영산강을 건너 나주시, 서쪽은 신안군의 많은 도서에 면하고, 남쪽은 목포시, 서북쪽으로는 깊게 만입된 함평만을 사이에 두고 영광군·함평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경 126°15'∼126°32', 북위 34°44'∼35°08'에 위치한다. 면적은 446.94㎢이고, 인구는 8만 223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읍, 6개 면, 416개 행정리(103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 있다.
자연환경
군 전체가 대체로 3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중앙부에는 연증산(301m)·마협봉(286m)·승달산(333m) 등이 솟아 있다. 서쪽은 서해에 면해 있으며, 해제반도와 무안반도가 각각 서북쪽·서남쪽으로 돌출해 있다. 영산강이 동쪽과 남쪽 군계를 따라 곡류하며, 남쪽 군계에는 영산호가 조성되어 있다.
그밖에 하천 발달은 미약해, 곳곳에 많은 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다. 해제면 양월리와 신안군 지도읍 사이, 망운면 피서리와 청계면 서호리 일대의 습지는 간척사업을 통해 농경지화되었으며, 해제면 송석리와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간에도 간척사업이 행해질 계획이다. 해안은 드나듦이 복잡하며, 조석간만의 차가 심할 뿐 아니라 수심이 얕아 항만의 발달에 불리하다. 탄도·닭섬 등 27개의 섬을 포함하고 있다.
남서해안에 위치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해양성기후의 특성이 나타난다. 연평균기온 13.3℃ 내외, 1월평균기온 1.4℃ 내외, 8월평균기온 26.9℃ 내외, 연평균강수량 773.0㎜ 정도이다. 식생은 동백나무·개서나무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다.
3개의 반도와 2개의 유인도, 26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2005년 전라남도청이 광주광역시에서 삼향면으로 이전해 왔다. 남악신도시의 건설과 더불어 전라남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자체가 되었다. 행정구역은 무안읍·일로읍·삼향읍·몽탄면·청계면·현경면·망운면·해제면·운남면 등 3개읍 6개면 103개 동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416개리). 군청소재지는 무안읍 무안로이다. 면적 449.76㎢, 인구 82,182(2016).
자연환경
노령산맥의 한 지맥이 비옥한 나주평야를 지나 전라남도의 서남단에 무안반도(務安半島)를 형성하였고, 다시 여기서 갈라져나간 해제반도(海際半島)와 망운반도(望雲半島)가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220.3㎞에 달한다.
육지나 도서를 막론하고 높이 400m 이상의 산지는 없으며, 승달산(僧達山, 318m)·국사봉(國師峰, 283m)·감방산(坎方山, 258m) 등의 산과 낮은 구릉 및 평지로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몽탄천(蒙灘川)·남창천(南倉川)·제왕천이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하천이 15개 정도 있으나 특별히 발달한 하천은 없고 영산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해안은 침강해안으로 굴곡이 심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큰데다 바다가 멀리까지 얕기 때문에 항만의 발달에 불리하다. 연안에 2개의 유인도와 25개의 무인도가 있다.
한반도 남서쪽 해안에 위치하므로 온화한 해양성기후를 나타낸다. 연 평균기온 14.0℃, 1월 평균기온 1.0℃, 8월 평균기온 26.1℃이며, 연 강수량은 1,483㎜이다.
연혁
백제 때에 물아혜군(勿阿兮郡)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757년(경덕왕 16)에 무안군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944년(혜종 1)에 물량군(勿良郡)이 되었다가 991년(성종 10)에 다시 무안군으로 고쳤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무안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별호는 면천(綿川)·면성(綿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다. 1897년에 목포진(목포항)을 개항하고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했으며, 무안부로 승격했다. 1903년에 목포감리서가 따로 설치되어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에 다시 부로 승격시키면서 감리를 폐지하고 부윤이 겸하게 했다. 이때 월경지 정리도 이루어져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목포부로 개칭했다가 1914년 군면 폐합 때 목포부의 부내면과 거류지 등 시가지를 목포부로, 주변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했다. 또한 지도군의 13개면과 완도군의 팔금면, 진도군의 도초면도 병합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으나 이후 도서지역의 이속이 빈번했다. 1939년에 성곡면을 몽탄면으로, 1957년에 면성면을 무안면으로 개칭하고, 1963년에 이로면을 폐지했다. 1969년에 신안군을 신설해 도서지방을 분리시켰다.
1979년에 무안면, 1983년에 일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에 망운면 운남출장소가 운남면으로 승격했다. 1987년 삼향면 옥암리·대양리를 목포시로 이관했고, 1992년 현경면 양학리 일부가 무안읍으로 편입되었다. 2005년 광주광역시에 있던 전라남도청이 삼향면으로 이전했다. 2008년 삼향면 남악리를 신설했다. 2011년 삼향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역사
신석기시대 유물로는 영산강과 해안선 주변에서 출토된 뗀석기와 반달돌칼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전군지역(全郡地域)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과 몽탄면에서 출토된 반달돌칼 등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지역에 이미 선사시대의 정치기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상정되나, 마한의 고지(古地)로서 여러 소국 중 어느 국가의 영토였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백제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369년(근초고왕 24)으로 나타나지만, 완전한 정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사창리의 옹관묘를 비롯해 망운면·운남면·삼향읍·해제면 등지의 옹관묘·석실분 등이 백제문화계통과 크게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백제 때는 물아혜군(勿阿兮郡)으로 불렸고 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무안군으로 고쳐졌다. 그리고 함풍현과 다지현·해제현·진도현 등 현재의 함평과 진도지역까지 영속지로 관할하게 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 견훤(甄萱)이 건국한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으며, 909년(효공왕 13) 왕건(王建)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뒷날 고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견훤의 군사를 격파했다는 파군교(破軍橋)의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944년(혜종 1) 물량군(勿良郡)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吳氏)의 출신지가 이곳이었다는 사실이 작용했던 것 같다. 991년(성종 10) 다시 무안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나, 나주군의 속군으로 예속됨으로써 신라시대에 비해 그 영역과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이르러 비로소 감무(監務)를 파견하게 되었고, 1391년(공양왕 3)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는 조처로서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처음으로 현감을 두었다. 세종대에 읍성이 정비될 때 정한 행정편제나 영역이 거의 고정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이때의 가구는 315호, 인구는 1,030명(남정만의 수)이었다.
한편, 대굴포(大掘浦)에 전라수군처치사를 설치, 24척의 전선과 1,895명의 선군(船軍)을 배속했고, 목포만호와 다경포만호에 각각 8척의 전함과 490여 명의 선군이 주둔하였다. 세조대의 진관체제 하에서는 대굴포의 수군처치사영이 해남으로 옮겨가 우수영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이 고장 주민들은 보평산전투를 통해 왜군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895년 관제개혁 때 나주부 예하의 무안군이 되었고, 1896년 도서지방이 지도군(智島郡)으로 분리되었다. 1897년 10월 목포진의 개항으로 이곳에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자 무안군도 부로 승격, 청사를 목포로 이전했고 부윤이 감리를 겸임하였다.
1903년 7월 목포감리서가 따로 설치되자 무안부는 다시 무안군으로 강등되었다. 1906년 다시 무안부로 승격하고 감리가 폐지되어 부윤이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 때 함평군의 다경면·해제면, 영광군의 월경지인 망운면·다경면, 나주군의 월경지인 망운면·삼향면을 편입하였다.
1910년 목포부로 개칭하여 무안의 명칭이 없어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분리하여 목포부와 무안군으로 독립하였다. 그 해 지도군 일대와 완도군의 팔금면, 진도군의 도초면이 편입되었고, 이후 이들 도서지역의 분할 이속이 빈번하게 반복되었다. 1939년 성곡면을 몽탄면으로 개칭하였다.
무안지역은 동학운동이 상당히 활발했던 곳으로 배상옥(裵相玉)·최장현(崔壯鉉) 등이 접주(接主)로 활동하였다. 한말의 의병투쟁에는 김익수(金益洙)·박임상(朴琳相)·박집중(朴執中) 등의 의병장들이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성남리 만창(萬昌)마을에서 김순기(金淳基)·정신섭(丁信燮)·박용규(朴溶奎)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는 전라남도의 만세운동을 선도한 것이었다.
1957년 면성면(綿城面)을 무안면으로 개칭하고 1963년 이로면을 폐지해 일부는 목포시에, 일부는 삼향면에 이관시켰다. 1969년 도서지방을 신안군(新安郡)이라 하여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군의 영역이 육지부의 8개 면으로 줄어들었다.
1979년 무안면이, 1980년 일로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운남출장소가 면으로 승격하고, 삼향면 지산리 일부가 청계면 월선리로, 현경면 평룡리와 청계면 사마리 일부가 무안면에 편입되었다. 1987년에는 삼향면 옥암리·대양리가 목포시로 편입되었고, 1992년에 현경면 양학 3·4리가 무안읍에 편입되어 신학 1·2리가 되었다. 2009년 삼향면 남악리를 신설하였고, 2011년에 삼향면이 삼향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
전체적으로 인구유출지역이다. 인구추세를 보면 1970년 13만 1,788명, 1980년 11만 5,238명, 1990년 9만 579명으로 1970~90년 사이에 약 30%의 인구감소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인구감소는 정부의 인구억제정책과 이촌향도에 따른 결과이다. 2000년 이후에도 인구 감소가 지속되어 2000년 7만 467명, 2005년 6만 2,385명으로 감소했다가, 2010년부터 증가추세를 회복하여 7만 5,928명, 2015년 8만 2,236명으로 증가했다.
2016년 기준 인구는 8만 2,182명으로 증가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가구수는 3만 5,350가구이며 가구당 인구는 2.32명을 기록했다. 2005년부터 시작된 남악신도시 건설로 인해 삼향면(현 삼향읍)에 전라남도청이 이전해오면서 인구증가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삼향읍남악출장소 관할지역에 군 전체 인구의 37.6%인 3만 906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읍 단위에서는 무안읍(1만 1,220명)에 거주인구가 가장 많다(2016).
연혁
백제 때에 물아혜군(勿阿兮郡)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757년(경덕왕 16)에 무안군으로 개칭하고 함풍(咸豊)·다기(多岐)·해제(海際)·진도(珍島) 등의 영현(領縣)을 관할했다. 고려시대에는 944년(혜종 1)에 물량군(勿良郡)으로 개칭했다가 991년(성종 10)에 다시 무안군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자 1391년(공양왕 3)에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御史)를 설치, 겸하게 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무안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별호는 면천(綿川)·면성(綿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나주부 무안군,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다. 1896년에는 신설된 지도군(智島郡)으로 도서지역이 이관되었다. 1897년에 목포진(목포항)을 개항하고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했으며, 무안부로 승격했다. 1903년에 목포감리서가 따로 설치되어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에 다시 부로 승격시키면서 감리를 폐지하고 부윤이 겸하게 했다. 이때 월경지 정리도 이루어져 함평군의 비입지(飛入地)인 다경면·해제면, 나주군의 비입지인 삼향면, 영광군의 비입지인 망운면·진하산면·다경포를 편입해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목포부로 개칭했다가 1914년 군면 폐합 때 목포부의 부내면과 거류지 등 시가지를 목포부로, 주변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했다. 이때 이로면·박곡면·일로면·망운면·삼향면·외읍면·석진면은 그대로 편입되고, 일서면·이서면은 청계면으로, 문화면·다경면은 현경면으로, 해제면·진하산면은 해제면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지도군의 13개면과 완도군의 팔금면, 진도군의 도초면도 병합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으나 이후 도서지역의 이속이 빈번했다. 1939년에 성곡면을 몽탄면으로, 1957년에 면성면을 무안면으로 개칭하고, 1963년에 이로면을 폐지했다. 1969년에 신안군을 신설해 도서지방을 분리, 독립시켰다. 1979년에 무안면, 1983년에 일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에 망운면 운남출장소가 운남면으로 승격했다.
인구
전체적으로 인구유출지역이다. 인구추세를 보면 1970년 13만 1,788명, 1980년 11만 5,238명, 1990년 9만 579명, 1995년 7만 5,049명으로 1970~95년에 약 75.6%의 극심한 인구감소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부의 인구억제정책과 이촌향도에 따른 인구감소현상의 결과이다. 2006년 현재 인구이동은 전입이 8,242명, 전출이 8,110명이고 전출인구중에는 도외전출이 많다. 인구 2만 명 이상인 지역은 없으며, 무안읍·일로읍·삼향면에 약 35%의 인구가 모여 있다.
산업과 교통
총경지면적은 185.84㎢이며, 논이 91.64㎢, 밭이 94.20㎢로 논과 밭의 비율이 비슷하다(2006). 경지율은 42.6%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를 비롯해 고구마·양파·수박 등이다.
고구마는 현경면과 망운면 일대에서 많이 재배하며 주정과 녹말가루의 원료로 쓰인다. 양파산지로도 유명해 무안읍과 청계면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전체 생산량의 45%를 생산한다. 품질이 좋은 대엽김이나 새고막·피조개 등이 양식되며 천일제염업도 행해지고 있다. 축산업은 소규모로 행해지나 돼지·비육우·한우를 기업적으로 사육하는 삼오축산이 무안읍 고절리에 있다. 군내의 큰 공장으로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한라요업(주)이 있다.
상설시장은 없고, 무안읍·일로읍·망운면·해제면에서 5일장이 열린다. 특히 무안장은 일용품, 일로장은 소의 매매가 주로 이루어진다.
호남선이 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목포와 광주를 연결하는 고속화도로가 군의 서부를 지난다. 또한 몽탄면과 현경면으로 연결하는 지방도가 있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다. 도로총길이 412.05㎞, 도로포장률 68.1%이다(2006).
산업·교통
총 경지면적 1만 8261㏊ 중 논이 48.7%를 차지한다. 수리시설로는 몽탄면 달산리의 달산수원지(達山水源地)와 운남면 연리의 양곡저수지(楊谷貯水池) 등이 있다. 둘 다 중심점토식(中心粘土式) 댐으로 축조되었다.
달산수원지는 목포시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수원지 중의 하나로 하루 송수할 수 있는 양은 1만 톤 정도이다. 양곡저수지는 인접해 있는 신기저수지와 함께 양곡·신기·서촌 마을 일대의 간석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함으로써 벼농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조·고구마·양파·유채·시금치·마늘 등이 있으며, 특히 고구마·양파·유채 등은 질이 좋은 특용작물로 손꼽힌다. 이는 토양이 비옥한 사질 및 점토질이고, 무안에서 생산되는 석회비료로 토질을 중화시킬 수 있으며, 병충해가 비교적 적은 까닭에 가능하다.
또한, 무안군은 이웃의 함평군과 경상남도 창녕·거창 등과 더불어 전국적인 양파산지로 알려져 있다. 무안의 양파는 전국 재배면적의 24%를 차지하는데 그 중 일부는 한우의 사료로 개발, 특산품화하였다. 또, 마늘·양파를 원료로 한 고추장·마늘가루·마늘편건조·건조양파·양파장아찌 등 가공식품과 마늘·양파가루를 이용한 국수도 개발, 마늘과 양파의 소비를 촉진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농가 소득을 증대시켰다.
고구마는 현경면과 망운면 일대의 해안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나는 고구마는 삶으면 밤맛을 내기 때문에 일명 밤고구마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과·배·포도·감·복숭아 등 과실류의 생산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망운면 톱머리 단감은 당도가 높아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일로면과 삼향읍, 청계면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굴곡이 심한 반도형의 해제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새로운 농경지가 늘어나 곡물농사와 잎담배가 재배되고 있다. 또, ‘영산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영산강 하구언사업이 마무리되어 일로읍과 삼향읍·몽탄면 일대의 개펄 1,800㏊가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서해연안에서 양식되는 대엽김·피조개·새고막 등은 국내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수익성도 높다.
한편, 현경면·망운면·해제면 등지에서는 세발[細足]낙지가 생산되어 어민들의 소득을 높이는 데 이바지한다. 대부분의 어선은 10톤 미만이어서 어업의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1만 600M/T에 달했던 규석은 1993년에 1,057M/T로 감소했다가 1994년부터는 생산이 중단되었다. 고령토 생산도 계속 줄어 2003년에 3,132톤 생산되다가 2004년 중단되었다.
무안은 목포시와 인접하고 광주광역시에 이르는 도로의 교통이 발달해 주민의 상업활동도 이들 지역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일상적인 상업활동은 정기시장과 읍·면 소재지의 상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5일의 정기시장은 무안장이 4·9일, 일로장이 1·6일, 망운장이 1·6일, 청계장이 3·8일, 해제장이 5·10일에 개장된다. 이 중 특히 무안장은 일용품을, 해제장은 소·생선·곡물을, 일로장은 소를 많이 거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교통은 군의 동부에 호남선 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사창(社倉)·몽탄(夢灘)·명산(明山)·일로(一老)·임성(任城) 등의 5개 역이 있다. 도로는 목포∼광주를 연결하는 4차선 고속화도로가 군의 동북에서 서남으로 통과하는데, 그 중심에 무안읍이 있다. 1997년부터 건설 사업이 본격화되어 2007년 11월 개항한 무안국제공항은 세계를 향한 호남의 관문으로서 그 역할을 안고 있다.
유물·유적·관광
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 2, 사적 1, 중요민속자료 1),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2, 기념물 3, 민속자료 4, 무형문화재 1), 문화재자료 7점이 있다.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철기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조개더미가 발굴되었으며, 무안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송림서원 등이 있다.
보존된 전통 가옥으로는 나상열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7호)·정득수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2호)·박봉기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3호) 등이 있으며, 그밖에 백로·왜가리서식지(천연기념물 제211호)와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다.
주요관광자원으로는 무안반도·해제반도·망운반도와 다도해 작은 섬들의 수려한 해상경관 및 삼향면 유교리 군상동 마을의 봄철 벚꽃, 승달산 등이 있다. 톱머리해수욕장은 2㎞에 달하는 하얀 백사장과 소나무 숲이 잘 어우러졌으며, 바닷물이 맑고 깨끗해 여름피서객이 많다. 수려한 해상경관과 승달산 등 개발 가능한 잠재적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관광지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관광
무안·망운·해제반도 및 여러 섬들이 수려한 천혜의 해상경관을 이루고, 승달산 등 개발 가능한 잠재적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 널리 알려진 관광지는 없다. 다만, 인근 목포시민과 군민은 봄철 벚꽃이 만발할 때면 삼향읍 유교리의 군산동, 여름철에는 톱머리해수욕장, 가을철 단풍 때는 승달산 등을 즐겨 찾는다. 또, 승달산·군산동을 지나 서해바다에 펼쳐지는 다도해의 무수한 작은 섬들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망운면 피서리에 있는 톱머리해수욕장은 길이가 2㎞이다. 지하수가 풍부하고 경사가 완만한데다 200년생 해송이 백사장에 줄지어 서 있으며, 수질이 깨끗한 편이다. 해수욕·찜질 등과 함께 썰물 때는 고동줍기·굴따기 등도 할 수 있고 낙지·도미·숭어 등을 값싸게 즐길 수 있다. 이곳에는 야영장과 약간의 숙박시설·탈의실·샤워장 등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홀통유원지 겸 해수욕장은 현경면 소재지에서 해제면 쪽으로 1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바다낚시 및 해수욕이 가능하다. 망운면 원송현 마을 나루터를 중심으로 1㎞쯤 모래가 깔려 있고 물이 맑아 해수욕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나, 휴식공간·민박·숙박 등의 시설 확충이 요구되고 있다.
조금나루 유원지는 4㎞가 넘는 백사장에 송림까지 갖추어진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또, 바다낚시를 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는 조용하고 횟집이 많아 주말의 가족 휴식처로 적당하다. 이곳은 세발낙지와 오도리(새우)가 유명하며 분재영농조합이 있다는 것이 큰 특색이다. 청계면 도대리에는 골프장이 들어섰다. 그 밖에도 몽탄면의 항공우주관, 학전시장, 초의선사 탄생지, 도요지 등도 관광자원화하고 있다.
주요 사찰로는 승달산 중턱에 자리한 목우암(牧牛庵)이 있고 읍내에는 약사사(藥師寺)가 있다. 약사사에는 약사여래불상(藥師如來佛像)과 범종각(梵鐘閣)이 보존되어 있다. 해제면 산길리에 있는 원갑사(圓甲寺)는 영광의 불갑사(佛甲寺), 영암의 도갑사(道甲寺)와 함께 남도의 삼갑사(三甲寺)로 불리는 전통사찰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팽나무·개서나무숲, 천연기념물인 가마리의 동백나무, 무안읍 용월리의 백로·왜가리 서식처 등이 있어서 영산강하구언과 해안일주도로가 포장되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문화·의료·복지
전통 교육기관으로 무안향교와 송림서원이 있다.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은 1915년에 개교한 무안보통학교(지금의 무안초등학교)이다. 1945년까지 삼향·몽탄·청계·현경 보통학교 등이 설립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무안중학교·무안종합고등학교·해제고등학교 등이 세워졌다.
2018년 기준 유치원 21개소, 초등학교 19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5개교, 전문대학 1개교, 대학교 2개교, 대학원 6개교가 있다. 매년 9월에 군이 주관하는 문화행사로 군민의 날 행사가 개최되는데, 민속놀이·서화전·농악경연·체육행사 등이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길쌈놀이를 비롯해 수세미줍기·연날리기 등 어린이 놀이가 있으며, 〈몽탄강 전설〉·〈상사바위 이야기〉 등의 설화가 전해진다.
구전되는 민요 중 순수 오락민요로는 〈둥당이타령〉·〈청춘타령〉 등이 있고, 노동요로는 〈농부가〉·〈김매기노래〉 등이 전해진다. 2017년 기준 의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 1개소, 병원 2개소, 의원 41개소, 요양병원 3개소, 치과병원 18개소, 한방병원 2개소, 한의원 16개소, 조산소 1개소, 부속의원 1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20개소가 있다. 사회복지시설로는 아동복지시설 1개소, 노인복지시설 16개소, 장애인복지시설 4개소, 어린이집 60개소, 기타시설 1개소가 있다.
2000년까지 인구감소 지역이었으나 2005년 전라남도청의 이전과 남악신도시의 건설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지역이다. 1995년 시·군 통합 정책으로 목포시와의 통합 논의가 오갔으나 무산되었고, 최근의 인구증가에 힘입어 자발적인 시 승격을 기대하고 있다. 무안군 지역의 남악신도시 중 남악지구만이 완공되었으며, 오룡지구와 임성지구는 개발단계에 있다. 면적 449.76㎢, 인구 82,182(2016).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1394년(태조 3) 공수산 아래 무안향교가 세워졌다가 1470년(성종 1)무안읍 교촌리로 이전하였다. 교촌리 송림마을에는 1630년(인조 8)에 현감 유시남(兪市南)과 마을 유생들이 협의하여 세운 송림서원(松林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광해군 때 폐모의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귀양와서 이곳에서 죽은 김권(金權)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1682년(숙종 8)에 사액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5년무안읍 성내리에 무안보통학교가, 1920년 삼향보통학교·망운보통학교·일로보통학교가 각각 개교하였고, 1924년 해제보통학교, 1929년 몽탄보통학교, 1930년 청계보통학교, 1938년 현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1946년에는 무안중학교, 1964년 무안종합고등학교, 1979년 해제고등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1983년 목포시에 있던 목포대학교의 일부가 이전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5개교, 한국폴리텍V대학·목포대학교·초당대학교가 있다.
매년 9월 군이 주관하는 문화행사로 군민의 날 행사가 개최된다. 이는 군민의 상 시상식, 민속놀이·농악경연·서화전·체육행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8∼9월에는 연꽃축제도 한다.
유물·유적
일로읍 광암리·월암리·감돈리, 현경면 평산리, 청계면 청천리·서호리 등지의 고인돌을 비롯해 청계면 도림리·청천리 등지의 선돌 등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일로읍 광암리 노루바윗재 고인돌에서는 홈도끼·방추차·민무늬토기조각이 나왔고, 몽탄면 내리에서는 반달돌칼이, 해제면 광산리 및 몽탄면 명산리와 무안읍 매곡리에서는 돌도끼·돌검·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운남면 성내리 당암마을에 있는 조개더미는 철기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해제면 신정리, 몽탄면 사창리에서 옹관묘와 토광묘가 발견되고 해제면 신정리, 몽탄면 사창리, 청계면 남안리에서는 석실고분이 발굴되었다.
산성으로는 무안읍 고절리·용월리 일대에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면주성(綿州城, 일명 普平山城)이 있다. 이 밖에 무안읍 성남리의 공수산성(控壽山城, 일명 務安城), 성내리의 다경진성(多慶鎭城), 해제면 임수리의 임치진성(臨淄鎭城) 등이 있는데, 현재는 모두 석성의 극히 일부 또는 성곽의 잔재만 남아 있다. 봉수대는 삼향읍 왕산리, 청계면 강정리, 해제면 신정리 등에 남아 있다.
불교문화재로 무안읍 성동리에 무안약사사석불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8호)이 있다. 사찰로는 몽탄면 달산리의 법천사 목우암(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2호)과 목우암삼존불(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청계면 청천리의 마곡사(麻谷寺), 무안읍 성암리의 도덕사(道德寺)·미륵사(彌勒寺)·남악사(南岳寺), 해제면 신길리의 원갑사(圓甲寺,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5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무안읍 교촌리에 무안향교(務安鄕校,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와 송림서원(松林書院)이 있었으나 송림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이 밖에 최익현(崔益鉉)과 기우만(奇宇萬)을 배향한 현경면 평산리의 평산사(平山祠), 운남면 연리의 충효단(忠孝壇)과 동암리의 사도세자제당(思悼世子祭堂, 일명 東巖廟), 무안읍 고절리의 병산사(柄山祠), 몽탄면 사창리의 우산사(牛山祠) 등이 있다.
장승으로는 몽탄면 대치리에 총지사지석장승(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23호) 2기가 있다. 그리고 법천사석장승(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24호)·법천사목우암·무안성남리석장승(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25호)등이 남아 있다.
중요건물로는 삼향읍 유교리의 무안 유교리 고가(務安柳橋里古家, 중요민속문화재 제167호), 무안읍 성동리의 무안정득수가옥(務安丁得洙家屋), 매곡리의 무안박봉기가옥(務安朴鳳基家屋) 등이 보존되어 있다. 그 밖에 무안읍 교촌리의 유산정(遊山亭), 매곡리의 영화정(詠花亭)·죽헌정(竹軒亭), 몽탄면 이산리의 식영정(息影亭) 등 정자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무안읍에 무안 용월리 백로와 왜가리번식지(천연기념물 제211호), 청계면에 무안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숲(천연기념물 제82호)가 있다.
기타 문화재로는 청계면 태봉리에 인화분청사기 가마터가 있고, 몽탄면 사천리·대치리와 해제면 유월리, 그리고 운남면 하묘리에 귀얄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다. 해제면 송석리의 도리포 해저유물 매장해역은 사적 제395호로서 고려청자 매장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해제면 광산리에 무안발산마을 미륵당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이 있다.
민속
이 고장에 전해 오는 민속놀이로는 남도의 다른 지역과 비슷한 강강술래·줄다리기·널뛰기·농악 등이 있다. 이 지역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활발하게 행해지던 「둥당이타령」 및 길쌈놀이도 있다. 「둥당이타령」은 팔월보름날이나 정월에 부녀자들이 모여 활방구를 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다.
미영(무명)타는 활을 죽 창문에 걸고 활꼭지로 활시위을 퉁기면 둥당둥당 소리가 난다. 또,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두들겨도 비슷한 소리가 난다. 이런 토속적인 간이 악기들의 리듬에 맞추어 “둥당이다 둥당이다 당기둥당이 둥당이다.”라고 하면서 시집살이나 사랑 등을 주제로 하여 노래들을 부르고 춤을 추어대던 흥겨운 놀이이다.
길쌈놀이는 신라 때부터 유래해온 부녀자들의 가장 큰 향연으로, 음력 7월 백중부터 8월 추석까지 한 달 동안 계속된다. 이는 고려와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그 열기가 식었지만, 이곳에서는 한때 색다른 사연으로 인해 성황을 이루었다.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직한 김충수(金忠秀)의 부인 금성나씨(錦城羅氏)가 왜적에게 희롱당한 유방을 은장도로 도려내고 순절하자, 그녀의 고결한 정렬을 추모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나씨가 즐기던 길쌈놀이를 자주 행하고 노래를 애창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부녀자 20∼30명이 목화따기·씨앗이·미영타기·고추말기·미영잣기·베뽑기·베날기·베메기·베짜기 등의 순서로 진행한다.
남자들의 놀이로는 공치기놀이가 있다. 옹이가 박힌 굳은 나무를 이용해 어른 주먹의 두 배 크기로 나무공을 깎아 끝이 굽은 지팡이 모양의 자루(이를 꽁매라 함)를 가지고 쳐서 상대편의 문에 넣는 놀이이다. 일정한 규칙이 있어 양편이 서로 정해진 위치에 서고 그 위치를 벗어나면 벌칙이 따른다. 괭이로 선을 그리거나 나무로 울짱을 만들어 낙이라 했는데, 선수들은 이 낙 안에서 놀이한다. 그 밖에 수세미줍기·연날리기 등의 놀이가 있다.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당제는 이 고장에서도 지낸다. 특히, 음력 정월보름경 당산에 볏짚으로 줄을 늘어뜨리고 나무나 돌 등의 당산신에게 옷을 입혀 마을의 평화와 질병의 퇴치 또는 풍년을 빌었다.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관에서도 지역적으로 제단을 만들어 지역민의 안위를 빌기도 하였다.
무안읍성 남문 안에 고을 원님이 헌관이 되어 제를 지내던 성황당이 있었다. 대개 제사는 음력 정월에 지내지만 망운면 송현리 두모마을의 해송에게는 마을 입향일인 음력 7월 15일에 제를 지낸다.
설화·민요
전해 오는 민담이나 전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형지물에 관한 전설이 이곳의 토속적인 맛을 더 밀도 있게 담고 있다.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시 동강면을 연결하는 영산강 하류를 몽탄강(夢灘江)이라 일컫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
후삼국시대 왕건이 나주성에 웅거한 견훤과 한판 승부를 겨루기 위해 몽탄강 근처 동강면 옥정리 몽송(夢松)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견훤의 군대가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포위된 왕건군이 혈로를 뚫고 도망하려 했으나 몽탄강물이 범람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서야 견훤군은 공격을 멈추었다.
이 때 군막에서 막 잠이 든 왕건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현몽하여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강을 건너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꿈에서 깨어 즉시 군사를 강 건너로 옮겨 파군천에 매복시켜 놓았다가 추적해 오는 견훤군을 크게 무찔렀다는 이야기이다. 그 뒤 꿈에 현몽을 받아 건넌 여울이라 하여 몽탄(夢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해제면 대사리의 백학산(白鶴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고려 말 고씨(高氏)의 속성(俗姓)을 가진 명승이 이 산에 들어와 절을 세우고 수도를 하였다. 어느 해 가뭄으로 온 동리가 아사지경이 되었을 때 한 노인의 간청에 따라 불공을 드려 비를 오게 했으나, 다음 세상에 중들이 수난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상좌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은 백학이 되어 구름을 타고 날아갔다 한다.
현경면 현화리의 할미바위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다. 옛날 이 고을은 여름이면 각다귀 떼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바다를 지키는 할미신〔女神〕이 각다귀들을 치마에 싸서 바다에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또, 일로읍 청호리의 「상사(相思)바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떤 아름다운 처녀가 굴을 따러 갔다가 만난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간 청년이 풍랑을 만나 죽게 되자 그 처녀는 날마다 강변에 있는 한 바위에 나가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강에서 구렁이가 나와 처녀를 감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그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사이가 나빴던 두 가문의 처녀·총각이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승달산전설」, 등천에 실패한 용이 꼬리로 내리쳐 자꾸 낮아졌다는 「감방산전설」, 중국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는 돌이 되어 버렸다는 「수암(물바위)전설(水巖傳說)」과 「저승제전설」,「멍수바위전설」 등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다.
이 고장의 고유민요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노래들이 많이 전한다. 이들은 크게 순수오락적인 민요와 노동요의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순수오락적인 민요로는 주로 「강강수월래」·「둥당이타령」·「도라지타령」·「청춘타령」·「아리랑타령」·「각설이타령」 등이 있고, 노동요로는 「농부가」·「김매기노래」·「밭매기노래」 들이 전해지고 있다.
「둥당이타령」은 둥당이라는 간이 토속악기와 춤이 곁들여지는 노래로서 이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전한다. “물짓는다고/신죽이나 보내라소/어매어매/각시어매/베잘짜면 뭣한단가/뒤안에 복성 다따먹고/나한쪽도 안주는가/마당가운데 잰 모닥불은/겉이타야 남이알재/내속타듯 속만타고있네그려/시집살이 잘한다고/소문이 났는디/요강단지 씻어서/살강에다 얹었네.”
다음은 이 지방에 전해오는 「잡타령」의 가사이다. “시들시들 봄배추는/밤이슬오기만 기다리고/옥에갇힌춘향이는/이도령오기만 기다리네/얼씨구나 좋다 저절씨구/지화자자 저절씨구/백설같은 흰나비는/부모상복을 입었는가/새벽단장 곱게나 빗고/장다리밭으로 유람가네/얼씨구나 좋다 저절씨구/지화자자 저절씨구.”
또, 「방아타령」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유와 방아야/어유와 방아야/이방아가 뉘방아/강태공의 조작이로다/어유와 방아야/이방아를 지을적에/서른세명 역군들이/낙락장송 베어다가/이방아를 만들었나/어유와 방아야/팔구월 추수하여/우걱지걱에 실어다가/물좋은 수양수출/덜쿠덩 방아찧자/어유와 방아야/덜쿠덩 자주찧어라/점심때가 늦어간다/어유와 방아야/어유와 방아야/들에서 찧게되면/물방아가 좋을시고/집에서 찧게되면/드들방아가 좋을시고/어유와 방아야/호호맵다 고추방아/앞에서 찧은 부인/궁둥이는 너무도크다/어유와 방아야/덜쿠덩덩덩 자주 찧어라/점심때가 늦어간다/어유와 방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