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7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요한 21, 20-25
주어진 길
제가 아는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있습니다.
난독증이 있어서 공부를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얼굴은 참 밝습니다.
시험보고 와서 다 4번만 찍었는데 6개씩이나 맞았다고 기뻐하고, 다음날 시험 과목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내일 가 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학생과 함께 살고 있는 분은 그 학생이 ‘공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참 편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학교 선생님이 이 아이와 상담을 하다 되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을 정도입니다.
어찌 보면 그냥 하루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살아가기에 영성적으로도 참으로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돼 있습니다.
내가 낮게 있으면 사람들은 그 편안함 때문에 위에서 그 사람에게로 내려오게 돼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친구들과의 관계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참으로 활력을 주는 아이이고 이 아이는 어딜 가도 굶는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듭니다.
주님께서 부모라면 이런 아이 먼저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아이도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먹고 살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머핀, 마들린 등의 과자를 굽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베드로 사도에게 어떻게 순교하게 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뒤에 따라오는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그저 자신의 길만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진리는
첫 째,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둘 째, 그 길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삶은 어떤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길이 행복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기웃거립니다.
그래서 셋 째,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길은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가장 행복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넷 째, 그 길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삶만 부러워하다보면 주님께서 주신 길도 제대로 걷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다른 삶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째, 가장 행복한 길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 길이 베드로 사도처럼 순교의 길이든지, 요한 사도처럼 오래 살며 복음을 전하는 길이든,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길은 그 길만 다양할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상 살아보기 전에는 주님께서 어떤 길을 가라고 불러주셨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제나 수녀가 되려고 했어도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신 길이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결혼 했어도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는 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일반 대학에 들어갔다가 또 원치도 않는 공부를 해서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셨던 길임을 느낍니다.
조금씩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위의 그 아이도 하루하루를 더 행복한 길을 가다보면 나중에 그 길이 주님께서 원하신 길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을 다 공부만 하라고 부르시지는 않으십니다.
오늘 하루가 가장 편하고 행복했다면 그 길이 주님께서 원하신 길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하자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각자 다르기는 할지라도 모두 사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베드로 사도는 순교를 한 것이고 요한 사도는 글을 쓴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올바로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이 다른 길을 살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행복한지, 그리고 이 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길이고 행복하게 하는 길인지만을 물으면 됩니다.
내 길에서 내가 행복한데 그 행복이 타인도 행복하게 하고 있다면 아주 잘 걷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7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28,16-20.30-31
요한 21, 20-2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발끝부터 먼저
공동생활의 햇수가 늘어갈수록 안타까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한 그루 거목처럼 되고 싶었는데, 한 그루 청청한 소나무처럼 되고 싶었는데, 웬만해서는 상처받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그런 삶을 꿈꿨는데...
현실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맨 날 상처입고, 매일 흔들립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들과의 관계형성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선이 다른 곳에 앞서 우선 내 발끝으로 향해야 되는데, 대체로 시선은 형제들의 허물로 먼저 가게 됩니다.
형제들은 또 한 두 명입니까?
시선이 이 형제에게서 저 형제에게로, 저 형제에게서 또 다른 형제에게로,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나중에는 하루 일과 전체가 형제의 약점 살피기, 불평불만, ‘뒷담화’, 소모적인 논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제대로 수행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향해 ‘너나 잘 하세요!’라고 질책하십니다.
네 코가 석자면서 남의 걱정하지 말고, 너나 단단히 잘 하라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웃의 삶에 대한 적당한 관심과 형제적 나눔,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합니다.
도를 넘어서게 될 때 늘 참담한 결과가 초래됩니다.
깊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참된 예수님 추종도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영성생활도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추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발밑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과제부터 충실히 이행하고 나서, 내 약점부터 먼저 잘 처리하고 나서 형제들에게로 시선을 돌려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27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지금 막 시작된 구원은 주님께서 오실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라고 하신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