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나,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배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작품해설]
편운의 시작 생활은 ‘인간의 본원적 고독’에서 출발하여 생애 마지막까지도 그 여정에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시집을 발간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지나친 다작(多作)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한 체험과 그것을 통한 시인의 깨달음을 잔잔한 목소리로 전달해 줌으로써 여전히 읽는 이에게 따뜻한 감동과 위안을 주고 있다. 그의 시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렇게 ‘인생’이라는 크고 어려운 주제를 쉬운 비유와 소박한 어법으로 노래한다는 점이다.
이 시도 고독한 나그네의 노래이며, 제재인 ‘낙엽’은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가야 할 시인의 분신이다. 화자는 번잡한 도시의 삶을 떠나 낙엽 지는 숲에 누워 ‘지나간 날’을 생각한다. 가을의 쓸쓸함과 고독 속에서 화자에겐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지만, 그것을 지우려 할수록 낙엽 지는 소리가 귀를 기웃거리게 한다. 고개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 속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그로 하여금 왠지 초조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화자는 ‘보이지 않는 곳’인 미지의 세계를 그리는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고독 속에 존재하고 싶어 할 뿐이다. 화자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낙엽 위를 걸으며 본격적으로 가을의 쓸쓸함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한다. 마치 육체가 낙엽 속에 버려진 것처럼 쌓인 낙엽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고독과 슬픔에 빠져든다. 그의 고독은 ‘비 내리는 밤’이면 더욱 깊어져 ‘낙엽을 밟고 가고 / 슬픔을 디디고 돌아도’던 산책깅르 생각하며 마음의 방황을 계속한다. 화자는 밤새도록 낙엽 지는 소리를 들으며 낙엽이 주는 인생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또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 화자는,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것이 바로 낙엽의 운명이며, 자신도 결국은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는 낙엽을 보거나 밟는 행위나 낙엽 지는 소리를 통해 이러한 개달음을 우리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알려 주고 있다.
[작가소개]
조병화(趙炳華)
편운(片雲)
1921년 경기도 안성 출생
일본 동경고등사범 이과 졸업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하며 등단
1959년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1960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1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84년 인하대학교에서 정년퇴임
19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95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2003년 사망
시집 : 『버리고 싶은 유산』(1949), 『하루만의 위안』(1950) 외 1999년까지 80여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