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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코헬렛 1,2-11
루카 9,7-9
모든 것이 지나가고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복음: 루카 9,7-9
솔직함이 주는 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활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라는 물음을 던지는 장면을 전한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의 불안한 양심의 반응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를 죽인 헤로데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 결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를 거부한 영혼은 새로운 진리의 빛이 비칠 때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을 느낀다. 헤로데의 내적 동요는 바로 진리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과 회피를 보여 준다. 성 암브로시오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으나, 믿음 없는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Lib. VII, 109-110 의역)라고 지적한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으며, 회개와 믿음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면 결코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찾으면 곧 발견하게 된다.”(Homiliae in Matthaeum Hom. 49,1-2 재구성)라고 강조했다. 즉, ‘예수님을 알고 싶음’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전제로 하는 영적 갈망이어야 한다.
교회는 복음 선포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 헌장은 “신자들은 말과 행위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35항 요약)라고 말한다.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은 강요가 아니라, 매혹으로 전해진다.”라고 강조하며, 선포자는 먼저 말씀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살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목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힘은 우리의 진실한 삶, 곧 복음을 살아내는 기쁨과 증언에서 비롯된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믿음 없는 호기심으로는 참된 만남에 이르지 못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먼저 내가 그 말씀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기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먼저 복음 안에서 행복해야, 그 기쁨이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의 질문은 단지 헤로데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던져야 할 물음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그분을 단순한 ‘소문 속 인물’로 남겨두지 말고, 믿음과 회개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며, 삶 전체로 그분을 증거하는 복음의 향기가 될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학교에 입학한 날, 신학교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특히 세상의 것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주님께서 책임지셔야 한다는 협박(?)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신학교까지 왔으니 저 역시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노력의 하나로 공동 기도를 할 때 성당에서 제일 늦게 나가는 신학생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다짐은 과연 며칠이나 갔을까요?
다음 날 끝기도 후에 공동 묵상 시간이었습니다. 저녁 8시가 되면서 이제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전날의 다짐을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묵상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저는 곁눈질하며 주변을 살폈습니다. 다 나가야 저 역시 나갈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한 명의 신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시가 넘었는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한 선배님이시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미운 선배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하느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겠다 했지만, 사실 그 선배 신학생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온갖 부정적인 마음으로 전혀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다짐은 하루 만에 깨졌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다른 것을 바라보니 제대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등장합니다. 그는 정치적 계산에 밝고 권력 유지에 집착했던 인물로 당황해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당황함은 아마 죄책감과 정치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내적 동요일 것입니다. 자신이 처형한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두려움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민중이 동요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헤로데는 말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이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군중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적 인물들의 범주 안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헤로데 영주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헤로데 영주처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당시의 군중들처럼 단순히 과거의 훌륭한 인물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정답을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의 말씀과 행적으로 정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만 신경 쓰면 절대로 정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의해 부서진 채로 살아간다. 깨짐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서로가 깨진 채로 존재하는 상태를 공유하고 있다(브라이언 스티븐슨).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9.24.목.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걱정과 아픔은
하느님께 내려놓으며
평화로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가을 되십시오.
칼은 사람을 벨 수 있지만,
진실의 울림까지 베지는 못합니다.
어느 사람의 목소리가
어느 날 우리 마음에서
더 크게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정작 보아야 할 것은
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진실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외면한 진실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피하지 않는 마음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다시 바르게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어두움까지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장합니다.
성숙은 불편한 진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을 없앤다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마음을 놓을 때 우리는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진실은 외면할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걱정과 진실까지 하느님께
내려놓고 맡기는
평화로운 추석 연휴 되십시오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전주교구
※김건태 루카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저러한 질문이 던져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생활하실 때 이미 제기되었던 질문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제후였던 헤로데(안티파스: 기원전 4년 – 기원후 39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이루신 행적들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헤로데는 개인 정보원들을 통해 널리 전파되어 있던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상호 엇갈린 상태에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문들 가운데 어떤 소문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예수라는 이 기이하고 역설적인 인물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하는 이러한 질문들이 헤로데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갈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났다.”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합니다. 군중 심리는 가급적이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호기심을 끄는 쪽으로 쏠리곤 합니다. 때로는 선정적이며 자극적인 소문에 귀를 더 기울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이러한 소문에 부채질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군중은 가르침과 행적의 의도와 목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 충족만 갈구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둘러싼 이 모든 소음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를 처참하게 살해한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마음속 깊이 처박아 두고 잊으려 해도 늘 가슴을 짓눌렀던,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처참한 죽음이 헤로디아의 앙심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 인물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했던” 사람입니다(마르 6,20 참조). 그러나 호기롭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따라서 두려워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판단, 당황해하면서도 질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 이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경비병을 보내 가져오라고 한 요한의 머리는 바로 자신의 인간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 버렸으니, 남은 그의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 영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분의 이 참된 신원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헤로데처럼, 신앙이 주는 어려움과 이 어려움이 요구하는 세속적 포기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겸허한 마음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갖은 혼란과 맞서 싸울 도전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겸허한 마음으로 도전하여, 우리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며 전하는, 가슴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저울 위에 무게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쓰러지듯
우리 역시도 어느 한쪽에 편향되면
객관적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헤로데는 권좌에 앉으면서
서서히 평정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평정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완전히 사람이 망가집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으면 티가 나는 법입니다.
일상이나 업무에서 판단력이나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자유도 진리 안에서 자유로울 때
존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코헬1,2-11 루카9,7-9
오, 주 하느님!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오늘부터 제1독서는 코헬렛입니다. 읽을 때 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종교 유무를 떠나 누구나 공감하는 코헬렛의 실존적 체험의 고백입니다. 오늘 머리말 일부만 인용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아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누가 반박할 수 있을 런지요? 허무와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은 미래의 총아처럼 각광을 받고 있는 AI도 아닌 오직 <빛과 생명>이자 <신망애와 진선미>의 우리 주 하느님뿐입니다. 제겐 AI가 판도라 상자가 열린 듯도 하고, 위태롭기가 또 하나의 비벨탑 쌓기처럼 보입니다. 비관주의자, 염세주의자, 허무주의자 같은 코헬렛이지만 결론 말씀에서 궁극의 희망이자 지혜이신 하느님이 허무와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임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들의 계명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우리 인간이 평생공부의 필수과목이 <하느님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곤 인간이 허무와. 무지의 심연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만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마침 어제 최종적으로 수정하여 나눈 제 <오, 주 하느님!>이라는 자작 고백시가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임을 깨닫고 다시 나눕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집무실 문 여니
숨통이 확 트이는 한줄기 시원한 가을바람,
지옥에는 바람이 없단다
맞네, 바람은 희망, 희망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던가
집무실 문 열면
늘 거기 그 자리 하늘 배경의
가슴 가득 안겨오는 초록빛 생명 가득한 산
주님을 바라보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황홀하고 충만하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말하지 않는다
침묵 중에 고요히 머문다
산이 된다
온몸에 퍼지는 행복감
산의 깊이는 어디쯤일까, 헤아릴 길 없구나
날마다 보고 배워도 끝이 없다
마르지 않은 영감의 샘, 생명의 샘 같다
늘 놀랍고 새롭고 좋다
참 좋은 스승이자 주님 같은 산이다
오, 주 하느님!”<오, 주 하느님!; 2026,9.23>
제게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 같은 산山입니다. <밖으로는 산山, 안으로는 강江>을 사는 <산과 강의 영성>이 제 소원입니다. 그대로 일종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시입니다.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으로 제출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불멸의 고전을 썼던 중세기의 대 영성가 ‘토마스 아 캠피스는 삶에 대한 코헬렛의 전적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라 생각했습니다. 왜냐? 그것은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유일한 우선권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불안해 하는 헤로데의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중심 부재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출현에 궁금해하고 당황해하며 그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의인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후 그의 불안한 마음이, 양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답은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으로 그의 무질서한 내적 삶을 재정립하는 길뿐이지만 요원합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단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정치적 야망을 채우려할 뿐입니다. 그는 선택을 했고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삶을 재정립할 것인가? 혹은 하느님 부재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근원적 고질적 질병과도 같은 허무와 무지에 대한 궁극적 치유와 구원의 명약은 <우리 주 하느님>뿐입니다.
그러니 평생 영원한 현역이 되어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힐링의 치유와 자유도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허무와 무지의 병을 점차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 서울대교구
복음말씀
제1독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