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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묵상글 (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 은사적 관계, 은사적 공동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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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4:43 추가>
2026.01.26 04:33
- 은사적 관계, 은사적 공동체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어제 바오로 회심 축일 바로 다음 날
디모테오와 티토 축일을 지내는 뜻은 누구나 다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합니다.
디모테오와 티토를 바오로 사도가 자기 제자요 아들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있었기에 디모테오와 티토는
그의 제자와 아들이 되어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런 흐뭇한 제자와 아들들이 있었기에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시작한 전교 활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된 것이니 이처럼 부럽고 흐뭇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관계도 이런 관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복음적이고 은사적인 관계를 꿈꾸기보다 그저
인간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만 되어도 좋겠다며 관계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는 바오로 사도와 두 제자 디모테와 티토 간의 관계라고 할 수 없지요.
제가 생각할 때 이들의 관계는 기도해주고 안수해주는 관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과거 자신이 안수해줬음을 상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수해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령을 선사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세상 아버지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렇습니다.
생선이나 달걀을 주는 것보다 성령을 주시는 것이 더 좋은 것이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뭘 한다면 물질 선물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해줄 것이고 청원 기도해준다면 성령을 빌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인간적인 친교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같이 살아가는 은사 공동체가 될 수 있는데
문제는 의외로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해줘도
서로를 위해선 기도하지 않거나 이런 기도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만 해도 저를 위해서나 가장 가까이서 같이 사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별로 기도하지 않고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주로 했었는데
얼마 전 그 이유를 깨달아 알게 된 다음부터 기도하게 되었지요.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바라는 것도 많고 불만도 많습니다.
사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를 더 많이 주고받게 되기에
사랑도 가장 많이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미워하게도 됩니다.
그리고 미워하고는 미움의 괴로움 때문에 용서하려 그리 애쓰면서도
정작 그의 성화를 위해서 기도해주거나
용서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해달라고 나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면
그리고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와 티토에게서 가르침과 자극을 받았다면
오늘부터라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가,
성령을 빌어주는 은사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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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변모를 위한 독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시며,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선하신 분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성경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변모를 위한 독서
2026년 1월 25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성경을 권위적인 해답집으로만 대하기보다, 내적인 체험을 찾는 마음으로 읽도록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성경의 계시가 전해주는 놀라운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생각했던 분과는 매우 다르시며,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진화생물학자 J.B.S. 홀데인(Haldane)이 우주에 대해 말한 것을 빌리자면,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낯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신비이십니다." [1] 하느님은 결코 두려움의 소식이 아니라, 오히려 압도적인 위로와 참된 기쁜 소식이십니다.
구약성서 신학에서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를 "다섯 가지 형용사의 신앙고백"이라 부릅니다. 히브리 성경 곳곳에서 반복되는 이 고백은, 이스라엘이—그리고 예수님께서—발견한 하느님을 일관되게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성실하시고, 용서하시며, 사랑에 견고하신 분"으로 드러냅니다.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깊이 성찰하기)까지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찾고, 기도하며, 때로는 고통을 겪는 이들만이 그것을 자기 삶 안에서 참되게 깨닫습니다. 내적 체험이 없다면, 그 다섯 가지 형용사는 단지 경건한 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종교는 의식적이고 도덕적이며 교리적인 틀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믿고, 성령께서 성경의 경청과 기록을 인도하셨음을 신뢰한다면—비록 모든 인간적인 것처럼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1코린토 13,12) 바라보는 한계가 있더라도—우리는 그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 불리는 이 책들의 모음 안에 결정적인 하느님의 지혜가 점차 드러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러한 발전하는 사상들 속에 저는 "성경의 위대한 주제들"이라 부르는 것들이 짜여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두려움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은 곧 용서와 하느님의 평화(요한 20,20–23)로 드러납니다.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의 최종 계시라면, 우리는 안전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우주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변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따라 걸으며 체험을 깊게 할수록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일 우리의 준비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머물며 하느님과의 내적 삶을 돌본다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그릇은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단지 확실한 결론을 얻어 "거짓 자아"를 안심시키려는 목적으로 읽는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멈추고,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해로운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이 의식의 여러 단계와 구원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듯,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 판단과 비난, 두려움과 탓하기, 자기중심성과 공로 지향적 태도를 넘어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산고(産苦) 속에 기록된 성경은 우리의 인간적 산고를 비추며, 그 안에서 모든 단계들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성경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성숙한 응답과 미성숙한 응답을 함께 제시하며, 우리는 그 차이를 식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어떤 묵상(meditation) 안에서 G. K. 체스터턴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종교는 우리가 속한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그 자체이다.” 이 말씀은 제 마음에 곧바로 “그렇습니다!”라는 응답을 불러일으켰고, 성경을 묵상하던 제 경험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저는 제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경청하고 묵상하는 동안, 마치 아름다운 시 속에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삶의 체험을 담은 시와 같았습니다. 시는 단순히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뒤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를 드러냅니다.” 제 경험 속에서 성경은 단지 과거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한 시(詩)였습니다.
—Carol T.
References
[1] J.B.S. Haldane, Possible Worlds and Other Essays (Chatto and Windus, 1927), 286. The original quote read: “Now, my suspicion is that the universe is not only queerer than we suppose, but queerer than we can suppose.”
[2] Walter Brueggemann,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Testimony, Dispute, Advocacy (Fortress Press, 1997), 216.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Franciscan Media, 2022), 5, 7–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réj Richár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경과 우리의 관계는 때로는 분명하고, 때로는 신비로우며, 그럼에도 언제나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과 같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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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 05:24 추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고 전하기 위하여....
어제 복음(마르 3,21; 요한 10,20 참조)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겼고, 곧이어 나오는 본문에서는 그분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까지 말합니다. 사람들의 말은 예측할 수 없으며, 여론은 마치 제비뽑기와 같습니다. 언어 자체가 하나의 제비뽑기와 같아서, 떠오르는 말을 곧바로 내뱉으면 그것이 깊이 숙고된 것처럼 당당히 서게 됩니다. 때로는 말의 선택을 좁히는 유일한 요소가 바로 말하는 이의 악의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 악령 들렸다 할 수 있었다면,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떤 악의적인 말이라도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도, 이런 악의적인 말과 행동에 맞서 대항하거나 싸우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를 빌어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치명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어와 악의가 결합하면 폭발물이 됩니다. 언어가 폭발물이라면, 악의는 그 기폭장치인 셈입니다.
사회는 교과서에 묘사된 것처럼 언제나 고상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수많은 개인들이 각기 다른 목적을 품고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그 목적들이 때로는 합쳐지고 때로는 충돌합니다. 개인과 개인의 충돌은 국지적 문제에 그치지만, 많은 이들이 악한 목적을 위해 결합할 때 진정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낮은 수준의 결합은 공동체의 매력을 흉내 내며, 서로의 인정과 지지를 통해 자기 의심을 잠시 잊게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집단 최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신뢰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세상의 어둠에 더 익숙해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정신구조와 그 정신구조 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밝고 맑고 희망적이기보다는 어둡고 회의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저 자신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자주 저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 보면서 저도 저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 안에 있다는 생각보다는 뭔가에 짓눌려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씩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종교적·정치적 근본주의가 그 뚜렷한 예입니다. 분노의 말은 많은 이들이 반복할 때 더욱 힘을 얻고, 결국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으로 치닫게 합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삶을 잘 이해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의식하고 확신 있게 받아들여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회의 바벨탑 같은 목소리들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밤을 산에서 홀로 기도하며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무질서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지키려면 피정, 묵상, 혹은 긴 고독의 산책과 같은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합니다. 묵상이란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언어를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2세기 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참되게 소유한 이는 그분의 침묵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을 조금씩 조금씩 더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분의 침묵 안에서도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사랑에 사랑을 더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핵심 명상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 마음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요!!
오늘 우리는 생각과 언어에 긍정적인 힘도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부정적인 위험성도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게 됩니다. 언어는 복음을 선포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악의와 결합하면 파괴적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란과 악의적 언어에서 벗어나, 기도와 침묵 속에서 성부와 친교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은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성숙한 언어와 미성숙한 언어를 구별할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다음의 기도를 바쳐 봅시다!
주님, 세상의 언어가 때로는 칼날처럼 서로를 상처 입히고,
악의와 결합하여 진실을 왜곡할 때가 많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미쳤다, 악령 들렸다”는 모욕을 받으셨듯,
우리도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언어의 폭력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의 소란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시며 성부와 친교를 이루셨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시고자
일하시는 아버지와의 신뢰를 돈독히 하셨습니다.
저희도 침묵과 고독 속에서 당신을 찾고, 말씀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배우게 하소서.
성 이냐시오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참되게 소유한 이는 그분의 침묵도 들을 수 있다”는
그 신비를 저희가 체험하게 하시어,
세상의 무질서한 언어 속에서도
당신의 침묵과 사랑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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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들’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평화’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임과 동시에 ‘평화의 일꾼’이 되라는 사명입니다.
또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며 친교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또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증거가 파견 받은 이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본질이고 우선’이며, ‘무엇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지’를 잘 분별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행위의 원칙이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이 일을 이루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신원, 곧 ‘파견 받은 자’에서 비롯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먼저 해야 할 것을 먼저 하게 하소서!
당신께 신뢰를 두고, 먼저 기도하게 하게 하소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제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타인을 억눌러서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이루는
당신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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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싹이 트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쉬는 쉼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비슷한 말로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파급되어 엄청난 태풍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펌프’가 있었습니다. 펌프 옆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그 물을 넣고 손잡이를 흔들면 신기하게도 펌프에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부었을 뿐인데 펌프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물을 사용하고 난 후에는 다시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남겨 놓았습니다. 요양원에서의 미사도 그랬습니다. 병원에 요양 중인 형제님을 방문했던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탄도 다가오는데 형제님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왕이면 형제님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몇 년째 미사 참례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봉성체 봉사를 하던 분, 형제님을 위해서 마사지를 해 주던 분, 형제님과 함께 성가대를 했던 분들이 모이니 병실에서 하기에는 인원이 많았습니다. 요양원에는 작은 경당이 있었습니다. 경당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제단이 있었습니다. 병원 측에 경당 사용을 부탁했더니 기꺼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경당에서 한 명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고, 성가대는 형제님을 위한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에도 형제님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한 분의 작은 소망이 오랫동안 병원에 있던 형제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제게도 뜻깊은 미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사람이 ‘몰라’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는 하느님께서 천사보다 약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자유의지가 겸손과 만나면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교만을 만나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희망과 만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절망을 만나면 풍요 속에서도 근심과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성인과 성녀들이 따라간 길이고,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욕망의 덫에 걸리면 하느님의 아들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큰아들이 되고 맙니다. 헤로데가 그랬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그랬습니다. 제도와 직책으로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과 인내 그리고 믿음과 희망으로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난이 다가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만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늘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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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고통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찬미가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 젊은 시절, 어쩌다 보니 부업으로 교정 사목을 보조한 적이 있습니다. 참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 소년원, 분류 심사원, 교도소, 구치소를 내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습니다. 그 안에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몸 붙여 살아가는 곳이며, 그곳 역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규정상 연락처를 일체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제 주소를 알아 편지를 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안에 대단한 필력을 지닌 문학가들이 많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교도소 문학가들이십니다. 가끔씩 받아본 편지 안에는 한자 한자 얼마나 정성껏 글을 써내려갔는지? 그리고 어디서 그런 명필, 명문장이 나왔는지?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큰 감동을 받지 않을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간 곳곳에는 진심어린 회개의 표현과 강한 신앙심이 묻어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오로 사도 역시 한때 ‘교도소 문학가’ 중에 한분이셨습니다. 자신의 협력자이자 제자인 테모테오에게 보낸 사목 서한도 옥중에서 쓰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를 처음 만난 것은 소아시아 지방 리스트라에서였습니다. 티모테오의 집안은 부유한 상류층이었고, 어머니는 유다인, 아버지는 이교인이었습니다. 티모테오는 성격이 유순하고 내성적이었습니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길에 자주 동행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를 끔찍히 신뢰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로 출발하기 전 그를 미리 파견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도 동행하였으며, 자신을 대신해서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게 파견하였습니다. 마침내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에서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 티모테오를 에페소 교회에 남게 하여 자신의 대리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교회 전통은 티모테오를 에페소 교회의 초대 주교라고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티모테오에게 서한을 쓰고 있을 당시 바오로 사도가 처한 상황은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스스로도 짙은 고독과 절망, 좌절감 속에 빠져있는 느낌입니다. 감옥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재판은 극도로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단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지막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 씌여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테오 서간의 분위기는 철저하게도 희망적이며 따뜻합니다. 사랑 많은 아버지가 늘 그리워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분위기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2티모 1,2-4)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의 책임자이자 사목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말것을,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나아갈 것을 격려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사랑과 열정, 첫마음과 용기를 잃지 말고, 복음에 충실할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1티모 1,6-8)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들같은 제자에게 쓰신 바오로 사도 서한의 표현들이 참으로 감동적이고 눈물겹습니다. 눈부시게 찬란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쁨의 찬가를 부릅니다. 돌아보고 헤아려보니 우리네 삶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입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슬픔은 전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를, 티모테오 주교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 한발은 이미 또 다른 세상, 주님 나라로 건너가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고통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찬미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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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2018년 부활절 다음날부터 제 신앙은 시련과 박해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오늘 주일도 제가 영세 받은 본당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실제로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는 눈물을 많이 흘렀습니다. 제대를 보며 복사가 서고 싶었습니다. 제 신앙의 고통은 수녀님과의 이상한 마찰로 인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사실 이상하게 불똥이 저한테 튀어서 이게 발단이 돼 모든 신앙생활이 꼬이게 됐습니다. 그 사연을 한번 목놓아 부르짖어보겠습니다. 반면교사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절날 복사를 그날은 제가 서지 않았습니다. 저는 전야미사 때 섰기 때문에 다른 복사 단원이 섰습니다. 근데 그날 작은 수녀님과 복사 단장 사이에 미사를 잠시 앞두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의실에서 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복사 단장이 화가 나 복사를 안 서겠다고 해서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급히 제가 서게 됐습니다. 급히 복사복을 입고 주복사를 서게 됐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해서 미사는 마쳤습니다. 어떻게 수습을 할 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복사 대장은 복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그런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그다음날 월요일 새벽미사를 참례하러 본당에 갔습니다. 마침 그날은 본당에서 엠마오를 가는 날이었습니다. 평소에 보면 새벽미사에 나오지 않는 분들이 그날은 왠지 많이 참석해 조금 의아했는데 미사 마치고 나서 엠마오 가는 날이라 그랬습니다. 사실 저는 원장 수녀님께 부활절 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수녀님께서 조금 아시는 게 좋을 듯했고 또 그렇게 해서 문제를 수습하려고 잠시 수녀원 앞에서 수녀님을 기다렸습니다. 짧게만 요점만 말씀을 드리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엔 잘 뭔가 전달을 하는데 갑자기 수녀님이 말을 받아 전하시는데 하시는 말씀 중에 제 본당에는 마귀가 왜 이렇게 많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흔히 개신교 때도 보면 사탄이나 마귀라는 걸 평소에도 잘 사용하는 사람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런 말에 적응이 된 부분도 있고 해서 그렇습니다. 한두 번 정도는 저도 그냥 수녀님이 말씀하시니 토를 달지 않고 들었습니다. 근데 본당 신자들을 이야기 하실 때 계속 마귀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꾸 그렇게 하시니 조금 이제 제 마음이 불그락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녀님께 그랬습니다. 처음엔 부드럽게 "수녀님, 아무리 신자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마귀라고 하는 건 조금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말씀에 어떤 말씀을 하시다가 어떤 자매님을 보고 대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이고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 자매님은 제가 영세를 받고 짝사랑한 띠동갑 연상 누나입니다. 신앙 안에서 짝사랑한 누나였습니다. 한 6년 지난 시점이고 또 1년 정도 했던 것입니다. 본당에서 그것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그 이후로는 포기를 했습니다. 제가 언제 올린 글이 있었습니다. 본당 누나를 짝사랑했을 때 남긴 메모라는 제목으로 올렸습니다. 저는 그런 사적인 감정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그 누나를 대마귀라고 했을 때 정말 그땐 화가 났습니다. 사실 그 누나가 아마도 제 본당에서 제일 교무금을 많이 내는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교무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이라고 해서도 편향해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개신교로 말하면 거의 정확하게 십일조를 합니다. 초등교사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제가 수녀님과 그 누나 사이에 언제부턴가 약간 문제가 있었다는 걸 소문을 통해서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이유를 떠나 그런 신자 단순히 교무금을 개신교처럼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 표현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수녀님께 " 수녀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치 대마귀가 뭡니까? " 라고 조금 언성을 높여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소리가 나서 한 자매님이 성당 사무실 근처에 있다가 나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매님이 다름 아닌 제가 글에서도 올렸고 사랑하는 누나라고 하며 암투병 할 때 제가 묵주 3000단 봉헌을 했던 자매님입니다. 실제로는 누나라고 하지 않고 문자로만 누나라고 아주 수줍게 몇 번 했던 그런 분입니다.
오늘 마침 히야친타 축일이 이번주에 있어서 교중미사 때 축일자에게 간단하게 선물 아닌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축일도 축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얼마 전에 모친상을 당해서 보통 보면 그렇게 되면 주일에 본당 식당에 점심을 빨랑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오늘 보니 자매님이 빨랑카를 하셨더군요. 저는 자매님이 내신 것이라 사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먹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냥 제 마음이 교적이 타 본당으로 돼 있어서 먹지 않았습니다. 본당 자매님 한 분이 오늘 준비하신 분이 저를 보고 밥 먹고 가라고 했는데 제가 솔직히 신부님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 또 교적이 딴 본당에 있는데 먹는 것 눈치보인다고 그냥 가겠다고 해서 왔습니디. 많은 사람들이 혹 주일에 이런 걸 주일카페라고 합니다. 주일카페가 있는 날 제가 그냥 가면 자매님들이 마음 아파하십니다. 제가 그냥 사양하고 옵니다. 신부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자매님이 저한테 오시는데 그때 그만 수녀님은 수녀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그 자매님이 저한테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 수녀도 인간이다" 라고 했습니다. 첫마디가 그랬습니다. 인간적으로 같은 여자이고 또 수녀님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잘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 저한테 그렇게 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근 6년을 저를 지켜보셨고 복사를 성실하게 영세를 받고 나서 평일미사뿐만 아니라 주일 때도 거의 대부분 다 섰고 또 제가 평소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분명 뭔가 문제가 있어서 화를 냈긴 냈지만 제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만약 그렇치 않았다면 단박에 " 베드로, 지금 뭐 하는 거냐" 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이분이 저를 마치 싸움을 말리듯 제 가슴을 손으로 밀었는데 거의 안아주시듯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저는 그만 성당에서 집으로 갔습니다. 화가 났지만 마음은 또 아팠습니다. 일단 이유야 어찌됐든 수녀님께 약간 언성을 높혔기 때문입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떤 신부님께 성사를 바로 봤습니다. 저는 수녀님을 어떻게 보면 본당의 영적 어머니 같은 분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바로 성모님과 같은 분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저도 인간인지라 잘 화를 내지 않는데 그날은 제가 참지를 못했고 또 하느님이 보내주신 딸에게 무례를 한 것 같아 울었습니다. 울면서 성사를 보러 갔습니다. 문제는 이날 엠마오로 가시는 분들이 대부분 사목위원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쉽게 표현해 여기서부터 음모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역사를 봐도 과잉 충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걸 통해서 수녀님께 잘 보이기 위해 저를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저는 그날부터 일단 복사에서 짤렸습니다. 그날부터 복사를 근 7년 하고 한 10개월 정도 못 서게 된 것입니다. 그건 둘째 치고 이때부터 제 모든 본당 생활에 제약이 따랐습니다. 또 소문도 이상하게 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의 신부님 지금 신부님 이렇게 변동이 됐는데 이게 다 어떻게 된 모양인지 계속 발목을 잡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신부님과의 이상한 관계도 그전 이 사건에서 뭔가 다 유래가 돼 실제 그게 꼬여 이 신부님이 방아쇄를 당겨 제가 문제가 더 이상하게 꼬인 것입니다. 실제는 이 사이에 누군가 저는 누가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저를 음해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본당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의 말을 우선적으로 듣고 또 신뢰를 하게 되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결국 그런 걸로 인해 속된 말로 신부님께 찍히게 돼고 또 신부님도 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게 됐고 그게 원인이 돼 타 본당으로 그만 교적을 옮겨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옮기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이게 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해결될 날이 올 것입니다. 바로 최후의 심판 때를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저를 모함하고 저를 사지로 몬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밝혀지기 때문에 저는 그걸 믿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억울해도 참고 인내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걸 믿지 못한다면 저는 미쳐서 죽었을 겁니다. 이 고통의 시간 때문에 제가 지금 심장이 아주 안 좋아진 것입니다.
오늘 이런 글을 올리려고 했던 건 전혀 아닌데 오늘은 어떻게 미사 참례하면서 제대에 선 복사를 보고 갑자기 이 사건이 떠올라 이 사건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제단에서 복사를 설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한 마음을 하소연이라도 그렇다고 해결될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엉어리라도 풀어보려고 알리는 것입니다. 이게 주목적은 아닙니다. 이유 불문하고 최종적으로 알려드리고 싶은 건 제가 서두에 표현했듯이 제 이 사건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라도 수녀님, 신부님과는 어떤 마찰도 생기지 않게 하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한 순간의 실수라면 실수라고 해도 그 실수가 이런 엄청난 시련을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저처럼 이런 걸 경험하시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결과만을 언급하면 전혀 와 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장구하게 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힘들어도 끈질긴 잡초처럼 죽었다 또 일어나고 또 죽었다 또 일어나고 이렇게 모질게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모진 목숨인 것 같습니다. 그냥 죽어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 편할 수도 있을 텐데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모질게 신앙이라는 목숨을 유지하는지 참으로 버거울 따름입니다. 너무 힘들다 보니 이제 눈물이 흐릅니다. 앞으로도 또 넘어야할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죽을 때 죽더라도 이 현세에서 한을 풀지 못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는 그때 하느님께서 풀어주실 걸 믿고 갈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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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1-9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도 주교의 기념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도 바오로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로, 선교 여행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바오로가 그들을 눈여겨 보았다가 특별히 선발하여 자기 선교활동의 협력자로 삼았지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훈련시키신 것처럼, 바오로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로써 갖춰야 할 기본 소양과 덕행을 습득시킨 후 에페소와 크레타 교회 공동체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들은 각자 자신이 파견되었던 지역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어 중요한 소명을 수행하게 되지요.
오늘의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그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당신께서 받으신 성령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함이었지요. 우리 마음 속에 탐욕이라는 가시덤불이 자라면 그만큼 걱정도 커져서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마음이 육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성령의 불꽃이 약해지다가 꺼져버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 마음을 온전히 비우기 위해, 그 비운 마음에 하느님과 그분 뜻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광야로 나아가 기도하셨던 겁니다. 그런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받기만 하면 알아서 내 신앙이 열매 맺는 게 아니지요. 성령께서 붙여주신 신앙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욕망을 절제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복음선포라는 특별한 소명을 맡겨 파견하시는 제자들에게 두가지를 강조하십니다. 첫번째로 ‘비움’을 강조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재물과 인간관계라는 세속적인 조건들에 기대지 말고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정에 매이고 재물에 연연하면 중심을 못잡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지요. 그런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까지 제대로 나아갈 수 없으니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라는 겁니다. 두번째로 ‘순명’을 강조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누가 나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주면 차려주는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주님께서 주고 가신 참된 평화를 나누면, 내가 실천하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다른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되면,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행복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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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의 삶 자체가 신앙의 증언이고 복음 선포입니다.>
“그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1-9)”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선교활동을 할 때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이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생활 지침’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삶’이 곧 신앙의 증언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됩니다.
만일에 ‘말’로만 복음을 선포하고, ‘삶’이 신앙인답지 않다면, 그 복음 선포는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복음 자체는 진리이지만, 전하는 사람의 거짓된 삶 때문에 ‘듣는 사람’이 복음을 거짓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복음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에서 ‘착한 행실’은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2)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라는 선포는, “하느님 나라가(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라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 선포는 ‘종말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선포는 “늦기 전에,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라는 선포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라는 뜻이고, 안타까워하시는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선교활동은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기도하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기도하면 안 되고, 우선 먼저 신앙인답게, 하느님의 일꾼답게 생활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은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라는 뜻인데,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 떼를 회개시켜서 양들로 변화시키려고 갑니다.
<‘양답게’ 살고 있는 사람만이 이리 떼를 변화시킵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이 말씀의 ‘착한 생실’도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4)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그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의 후원금으로 생활한 것이 아니라, 직접 노동을 해서 생계비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도 18,1-4).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2-13).”
<선교 여행 동안 비천하게 지낼 때도 있었고, 풍족하게 지낼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 즉 그런 것을 초월해서 살았던 것이 바오로 사도의 삶이었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의식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25-34).
신앙인은 걱정을 믿음으로, 또 ‘기도’로 극복하는 사람입니다(필리 4,6-7).
걱정거리에 사로잡혀서 걱정만 하는 것은 믿음의 반대쪽에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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