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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롬 11:33-36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 오,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그분의 지혜와 지식과 부는 얼마나 크신지요! 그분의 결정과 방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ㄱ)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ㄱ. 70인역 사40:13) 35) ㄴ) 또 누가 보상을 받을 만큼 충분히 주께 드렸습니까? (ㄴ. 욥41:11) 36)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살고 모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 바칩니다. 아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33) 바울은 로마서 9장 1절에서부터 11장 32절까지 선민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불순종했던 이방들까지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의 경륜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감격에 차서 탄성을 지릅니다. 바울의 감탄은 그를 가장 슬프게 했던 골육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경륜에서 나온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며 때가 차면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비밀을 깨달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34-35) 바울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대해 이사야 40장 13절을 인용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뿐 아니라 어떤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가 필요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높으십니다(사 55:9). 따라서 우리가 감히 그분의 판단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분의 길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욥기 41장 11절을 인용합니다. 이 문장에도 수사의문문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어느 인간의 도움이나 기부를 의존할 필요가 없는 완벽히 충만하심을 강조하여 나타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36)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시고 동인(動因)이 되실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최종 목적지가 되시는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에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에 있기를” 송축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그분의 주권을 믿는 자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과 그분의 주권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지혜가 부족할 때마다 지혜와 지식이 부요하신 하나님께 나아와 지혜를 구하십시오(약 1:5).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주권을 깨달을 때, 그분을 경외함으로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5살 먹은 그의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와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설 교 >
[로이드존스-로마서 11:33-36 강해]
1. 바울의 위대한 송영
이제 우리는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위대한 송영에 이르렀습니다. 이 송영이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놀랍고, 고귀한 말씀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이 송영의 내용을 나누어 보면 ❶ 첫 번째 부분은 사도가 이 영광스러운 구원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깊음과 부요함을 특별히 언급하며 찬양하는 부분입니다. ❷ 두 번째 부분은 이 모든 일의 비교할 데가 없는 특성을 강조하며 그리고 ❸ 세 번째 부분은 구원이 전혀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다는 점을 밝힙니다. ❹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 바로 그러하신 분이기 때문에 마땅히 경배를 받아야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란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부요함이 깊다는 의미”입니다. ❶ “부요함”이라는 용어는 “은혜”와 “긍휼” 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무한하게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하게 높은 곳까지 두루 바라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최상의 방법은 바로 “깊음”이라는 단어뿐입니다. ❸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최상의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라 할지라도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표현 할 수는 없습니다.
②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부요함입니다. ❶ 부요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❷ 은혜란 분수에 넘치는 호의를 말합니다. ❸ 은혜란 형벌, 징계, 영원한 저주와 고통 밖에 받지 못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합니다. ❹ 따라서 이 모든 축복들로 이끌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③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를 나타내는 두 번째 용어는 “지혜”입니다. ❶ 지혜는 어떤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❷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만일 지혜가 부족하다면 그 지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❸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하나님에게 죄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셔야 한다는 열망을 일으키시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로 말미암습니다. ❹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모든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그 다음에 지식이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 ❶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십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❸하나님께서 전지 하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모든 가능성을 예비한 구원 계획을 세우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 사실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❹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완전하여 하나님의 계획은 틀어질 수 없습니다. ❺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자들인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실행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의 판단과 길
이 송영을 네 개의 주요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강조하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두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구원에 대한 완전한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로 이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말은 하나님의 깊음과 심오함의 범주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측량치 못하다.”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헤아릴 수 없고 측량치 못할 것을 말합니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 토론이나 논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지식에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무한하기 때문에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는 것입니다.
②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으나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때가 이르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신약 성경에서 비추어지는 우리 주님의 설교 모습은 논의나 토론을 통해서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을 강해하셔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④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❶ 세상에서 아무리 더럽고 추하고, 혹은 강퍅하게 살아왔던 사람일 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❷ 우리는 그들이 언제 어느 때에 그 복음을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❸ 또한 그들이 영원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❹ 그렇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판단과 길이 깊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은 당연히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람은 이 사실을 아는데 매우 우둔하고 또한 이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더욱 우둔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이 자각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① 사도는 성경을 인용할 때에 70인역을 사용하지만 여기서 욥기 41:11의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히브리 성경을 직접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또 하나의 논증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② 이 두 인용문이 사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신령한 풍자와 신령한 비웃음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❶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❷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❸ 성경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고 말합니다. 감히 “내가 주의 마음을 안다.”고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❹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우리가 이 말씀을 겸손하게 읽어야 합니다. ❺ 우리는 “부요함의 깊음”, “지혜의 깊음”, “지식의 깊음”에 대하여 살펴보았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는 말씀 속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③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즉 영원불멸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오직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❶ 또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❷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❸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❹ 인간은 자신의 우주를 질서 있게 한답시고 바쁘게 노력하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❺ 실행되고 있고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인간이 모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합니다.
④ “아멘”의 의미는 ❶ 자신이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❷ 우리가 지금 우리가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❸ 우리가 변명을 그치고 핑계를 그치는 것,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을 그치는 것을 나타냅니다. ❹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❺ 나는 전무이고 하나님께서는 전부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❻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단지 미천한 죄인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❽ 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긍휼에 빚지고 있으므로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나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❾ 이제 나는 기꺼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나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생명을 바쳐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은혜
롬 11:33-36 / 광주새로운교회
1. 소경인 아들
나면서부터 소경인 아들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물을 이해시키려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별다른 느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명성 있는 안과 의사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아들은 천신만고 끝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이는 이제야 어머니의 얼굴과 흰 구름 등 세상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아들은 눈을 뜬 후 엄마에게 묻는다. ‘왜 제가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진작 말씀해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엄마는 ‘얘야, 수없이 얘기했지만 네가 믿지 않았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영혼의 눈이 열릴 때에만 진정한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게 된다.
2. 구원의 은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 영광과 감사를 받으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율법적 자력 구원의 상태에 머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무지함을 반복하는 자이다. 우리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며, 은혜의 주권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감사와 찬송처럼 매일 그 깊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이 울려 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본장에서 자신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 얻은 자들도 있다고 말한다(1-10절).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방인들은 돌 감람나무와 같이 소망이 없었지만 참 감람나무의 뿌리, 곧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었다. 이들이 자긍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먼저 입었던 이스라엘도 교만하므로 버림당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접붙임을 받는 것이 겸손히 주님을 믿는 데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11-24절).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을 자들의 수가 찰 때에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할 기회가 이른다(25-30절). 또한 바울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지혜를 찬송한다(33-36절).
3. 구원의 역사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를 찬양한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풍요함으로 말미암았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바울의 고백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이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시며 심판 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잘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 교리는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와 근거를 제시한다.
4. 깊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는 얼마나 클까? 하나님은 얼마나 풍성하신 분이신가? 우리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고백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풍성하신 하나님, 그분의 판단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분의 판단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사탄에게 고통 받은 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세 친구가 있었다. 이 중 소발과 욥의 대화 중 소발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우리는 깊고 크고 넓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을까? 다윗은 주의 의와 판단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보호해 주시고 주의 의는 우람한 산줄기 같고 주의 판단은 바다와 같다고 고백한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 36:6) 또 다윗은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음과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많음을 말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주님이 하신 일은 크고 크시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시 92:5) 우리 주님은 크고도 크신 분이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크게 감격해야 한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음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우리 하나님은 깊으시고 그분의 은혜는 풍성하다.
5. 주님의 마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알 수 있을까? 바울은 주님의 생각을 잘 아는 이가 없으며 주님의 의논의 상대가 될 만한 이가 없다고 말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4) 공동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금 ‘나’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고백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성경에도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다.”(고전 2:16)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된다면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어떠한 각오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십자가에도 그리고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어떤 힌두교 여인이 뜻밖에 침례교 선교회에 크리스쳔으로서 침례를 요청했다. 선교회는 그 여인에게 믿던 종교를 포기함으로 당해야 할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고난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주님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 받으신 고난과 비교할 만큼 큰 고난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크나큰 특권이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증거이다.
6. 여호와의 광대하심
우리 주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우리 주님은 광대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광대하신 주님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그 분의 광대하심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 먼저 드렸으니 하나님이 갚아 주셔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없음을 고백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주께는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있다. 천지는 다 주의 것이고 주는 만유의 머리가 되신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우리는 모든 것이 주의 손에 달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우리는 광대하신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바울은 주님께 받은 은혜가 큼을 고백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누가 여러분을 남달리 뛰어나게 하였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 하나님에게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라면 어째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 우리는 모든 것은 광대하신 주께로부터 왔고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7. 주님께 영광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신다. 만물은 주에게서 나왔고 다시 주께로 돌아간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릴 것을 말한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1-2)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순결한 신부로서 주님을 경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세상 모든 만물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바울은 만물이 주로부터 말미암았고 자신들도 그로 말미암았음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만물의 처음이 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원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1) 우리는 교회와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만물은 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주님은 만물 이전부터 계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하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정사와 권세가 다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알고 주님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소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8.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가운데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허물 많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그 분은 죽지 않으시고 빛 가운데 거하신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오직 주께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려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살리시고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을 잘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9.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찬양
이건기 목사
바울은 (1-11장)을 통해, 복음에 대해 광범위하게 진술해 왔다.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과정을 설명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했다. 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설명했다.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완성한다.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에, 바울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설명하던 것을 중단하고, 마음이 벅차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찬양(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은 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의 탄성을 질렀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던 중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판단을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을 발견할 수도 없다고 외쳤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원문은 이 말이 ‘풍성함과 풍성함이여!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폭과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풍성한지 놀랐으며, 크게 감탄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참 넓고, 그 깊이가 심오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죄인을 참고 기다려준, 은혜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찬양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해 주고, 자기의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구원의 섭리는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더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의 죄가 넘쳐나게 되었을 때,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지만, 방주로 들어온 죄인을 구원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도피성을 마련해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은 십자가로 구원했다. 사형 틀인 십자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을 불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넘어지게 되자, 그 기회를 통해서, 이방인을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은 후에 이방인들을 통하여, 유대인을 다시 불러 줄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고,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한다.
그래서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수 있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 넓고 깊어서, 아무도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깨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서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그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선언했다. 유한한 우리 생각과,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회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높은, 지혜 앞에 설 때에, 겸손해 질 수 있다.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알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힘을 준다. 하나님의 높은 생각과 지혜를 알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게 된다.
(출14장)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는 장면이다.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의 병사들과,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바다의 물결을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간다. 뒤쫓아 가던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바다에 다 수장되고 말았다. 그래서 (출15장)은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이 나온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이루어졌기에, 찬양이 터져 나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계15장)을 보면, 하나님을 반역하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나온다(계15:1). 그 마지막 심판에서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
(계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것이 우리가 한 평생 부를 노래이며, 마지막에 부를 노래다.
2.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몇 가지 질문(34-3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두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다.
34절 질문은 (사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를 인용한 것이며, 35절 질문은 (욥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를 인용한 것이다.
2개의 성경을 인용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조언할 수 없다고 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을 빚지게 할 수 없다. 이는 모든 것들을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모사(쉼블로스, 상담가 : 쉼 + 블레‘조언’)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피조물이 만물의 주인이며, 모두 다 아는 하나님께, 조언할 수 있나?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는 헤아리거나 조언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상담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진 채무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언자가 되거나,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지 말고, 오히려 그 분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닫고, 침묵해야 한다. 욥은 극한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불평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하나님의 크신 지혜를 깨닫고, 이렇게 대답했다.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섭리에 눈을 뜨면, 우리가 무지한 맹인과, 같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보잘 것 없는 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졌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고,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지금도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입을 열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3.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고,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 출발해서, 하나님으로 맺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이며, 끝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 만물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에크)라고 말하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디아)라고 대답하고, ‘만물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에게로’(에이스) 간다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에서, 3가지 전치사(에크, 디아, 에이스)를 사용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유지하며, 하나님이 만물의 목표가 됨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만물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유일한 분이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만물’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 전체를 말한다. 만물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우주전체와,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 존재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창조의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된다. 이 사실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
(2)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든 섭리를 의미한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섭리를 말하는 중이다. 그는 지금 이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을 통해 진행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했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었으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룬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고,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최종적인 송영으로, 끝맺고 있다.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을 유지하고, 또 만물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반발한다.
사단과 우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 우리를 하나님 위치에, 놓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기를 거부하고, 만물의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예배와 찬송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이 없이는, 참되게 하나님을 찬송이 있을 수 없기에, 앞에서 지루할 정도로 신학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예배와 찬송은, 참된 신학이 동반될 때에 가능하다. 올바른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인도해 준다.
참된 신학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찬송(예배)이 없는 신학도 올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냉정하고, 비판적인 과학의 관찰과 평가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와 경외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예배로 이끈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자리가,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못한 신학’과 ‘신학이 없는 경건’, 둘 다 똑같이, 주의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다면, 찬양이 흘러나온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구원에, 감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되기를 바란다. 고난과 고통을 넘어서, 찬양의 승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우리 맞게 가고 있습니까?
Withus교회
며칠 전 연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연어들이 바다에 살다가 자신들이 태어난 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고, 작은 폭포도 점프해서 올라올 정도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관심을 갖고 자세히 영상을 보니 연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연어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다 보니,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믿을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연어의 본능 속에 매우 깊게 각인된 습성,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의 섭리’라고 이해하지만, ‘자연의 섭리’라고 표현하고 끝내는 것은 너무나 부족한 ‘이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어는 태어난 고향 산천에서 바다로 나가 태평양을 누비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약 오년간의 생을 마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옵니다.
그런데 그 돌아오는 거리가 수천 킬로에 달합니다. 수만 킬로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부산까지가 6백 킬로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먼길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아십니까? 바로 냄새를 기억한답니다 .
자신이 태어난 강물의 냄새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천 킬로를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헤엄쳐 옵니다.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오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바위나 돌에 몸이 찢기고 상처가 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연어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보다 더 아이큐도 높고, 의지도 강하구나..!
물론 제가 연어보다는 더 똑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도 강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냄새로 수천킬로를 찾아가지도 못하고, 연어처럼 자신의 생명을 걸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의 시작에서 연어의 일생을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연어들이 기를 쓰고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아 나는 내 고향으로 꼭 돌아갈 거야!” “냄새를 맡고 찾아갈 수 있어” “어떤 역경이 있어도 나는 내 새끼들을 고향에서 낳을거야” 연어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과 계획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연어들의 행동은 마치 지성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연어의 이성이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진 ‘연어의 본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연어가 수천 수만 킬로 떨어진 고향을 냄새로 기억하고,
수 없이 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먹지고, 쉬지도 않고,
또한 강에서도 살고 바다에서 살기 위하여, 바다에서는 오줌을 찐하게, 강물에서는 오줌을 묽게 누면서 자신의 몸의 염분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그 신비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모습이 자연의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저는 연어를 보면서 은혜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연어의 신비스러운 일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어 맛있게 먹지만 말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라!” “내가 너희를 만든 조물주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부터 11장은, 하나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의와 섭리에 대한 바울을 논증을 담고 있는 하나의 긴 단락입니다.
그리고 그 긴 단락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바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땅의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바라시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6절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고백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모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처럼 드리는 찬양을 ‘송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송영을 통해 하나님에게 함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처럼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6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입니다.
오늘 본문의 송영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비할데 없는 하나님의 엄청난 관대하심과 깊고 깊은 지혜!
우리는 결코 다 이해하지 못하며, 다 헤아려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있는 이 누구인가?
그분께 하실 일을 아뢸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조언을 구하시는 이 누구며 그분께 도움이 된 이 누구인가?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시작하고 그분을 통해 일어나며 그분에게서 마친다.
영원토록 영광! 영원토록 찬양!
오, 참으로 그러하시를!”
이렇게 들으니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 이라는 것이 실감나실 것입니다.
1998년도에 제작된 영화 중에 ‘조 블랙의 사랑’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영화의 장면 설명 간단히 한 후,
“사람도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면서, 하루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이것 저것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했다면”
“그걸 무한대의 숫자와 영원이란 길이로 곱해보게”
저는 이 대사가, 하나님의 대해서 인간인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의 한계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한 문장에는 중요한 4가지 단어가 등장합니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그런데 이 네 단어 중에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필요도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성경 제일 처음에 나오는 네 단어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누구도, 태초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천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않겠다.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들었다.
나는 하나님 없어도 충분히 선하게 살고 있고, 심지어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호회에 가입하고,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사귀고, 인맥을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존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영’이 있고, 영원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각성’하고 살아간다는 뜻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매우 약함을 경험하고, 또 부족하고, 때로는 악하고, 더럽고,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 어두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척해도 우리는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술이든, 돈이든, 외모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든, 가족이든, 그 무엇이라도 의지하는 대상이 없어지면, 곧 두려움을 느끼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위더스 가족 여러분,
한 주간동안 살아가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은 목사로서 굉장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주일이 오고, 주일 새벽에 설교가 잘 준비되었으면 저는 행복합니다.
한 주간이 삶이 마치 성공적인 것 처럼 생각도 됩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는 그 의도가 하나님을 향해 있다고 하더라도,
상당부분 저는 설교 준비가 잘 되면, ‘자기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의 본성에 죄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만 생각합니다.
또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고 염려하며 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선하고, 내 인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영광을 얻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손흥민 선수가 진짜 멋진 골을 넣었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손흥민 선수,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기쁨일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성과를 내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기뻐하고 영광을 누리는 것을,
‘자아실현’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표현하면 그 모습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 도취적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손흥민 선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사람은, 자아 도취적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정신없이, 그리고 열심히 살아왔던 우리의 삶에서 잠시 멈춰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하는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싫다구요? 그렇게 살기 싫다면요? 하는 질문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음식을 먹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플라스틱이나, 고무를 먹으면 안됩니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도, 경유를 넣는 차와, 휘발류를 넣어야 되는 차와, 가스를 충전해야 하는 차로 나뉘어 집니다.
인간이 경유를 넣는 차로 만들었는데, 만일 추억의 만화 ‘아기 자동차 붕붕’ 처럼 자동차가 말을 할 수 있어서 “나는 휘발류를 먹고 싶은데?” 하면 뭐라고 말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신앙고백서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많이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 1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위더스 가족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서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자아도취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의 본성이고, 죄된 본성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와 반대로 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참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음을 목표로 방향을 정하고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늘 우리의 본문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의 성공과 행복, 그리고 그럼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이 받을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므로 힘을 얻고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시상식에서 가수나, 배우나, 운동선수들이 상을 타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할 때의 그 말이, 그런 뜻 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을 창조의 목적임을 인지하고 말하는 분도 있고,
그냥 자신의 성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라는 고백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으로 받음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러냐구요?
이런 말들 많이 하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런 놈을 데려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저런 계집애를 데려와?^^
우리를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 않습니까?그래서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렇게 노래도 하고, 말도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고, 목숨까지 바치는 스토리의 영화나 드라마가 끊임없이, 시대를 초월해서 만들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사시겠습니까?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우리, 맞게 가고 있는 것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고향을 향해 방향을 정하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모습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그것 잡아서 맛있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길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지혜롭게 보존하고 관리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연어도 자기가 돌아가야 할 본향을 향해 가는데,
우리도 그렇게 방향을 올바로 정하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광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 침투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 하나 가지고 광야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광야생활에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언약궤가 있었듯,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었듯,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통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이 하나님 나라라는 본향을 향해 올바로 서 있는지,
자아도취적 내 본성의 요구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맞게 가고 있는지, 도전받으시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신앙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신앙의 결과는 하나님에게 두되 원인은 사람에게로부터 출발을 시키려고 합니다. 사람이 한게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에 따른 보상을 하시거나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끌어내었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용납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가령 '십일조를 안할 때는 돈도 잘 안벌리고 집안에 우환이 생기더니 십일조를 잘하니까 일이 잘되고 가정이 평안해졌다'라고 한다면 결국 십일조를 한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복이라는 결과를 끌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끌려 다니면서 복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깊으신 하나님의 지혜와 부요하신 지식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이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찬양을 합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에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방법이 동원된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행위에는 구원을 받을만한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않음에 가두어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인간을 억지로 순종을 못하도록 막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복음에 순종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긍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순종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주신 이유는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실천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를 통해서도 말씀이 실천되어지고 행하여진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는 순종치 못함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 지식이라고 말하고 인간이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반대편에서 행동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하나님의 행동을 측량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 반대편에서 행동하신다는 명확한 증거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생명의 길이 십자가에 있음을 눈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채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힘을 다해서 십자가에 있는 생명의 길을 부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했던 생명의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 잘 드리고, 제물을 아낌없이 바치며 살면 그것이 곧 생명의 길인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오늘날도 난무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길로서 십자가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생명의 길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몸으로 단지 십자가에만 있으면 되는데 사람들은 빈몸이라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오는 자를 싫어하실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을 하고서는 잔뜩 뭔가를 들고 나오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말하되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의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 우리의 행함과 십자가가 합작된 열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생명의 길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이 기쁜 소식에 대해서 반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를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과연 누가 원했습니까?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하나님에게 요청하기라도 했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의에 대해서 너무 무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의되시는 분을 보내셔서 그분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서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34,35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말씀하는 것도 그런 내용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알아준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드린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이 되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36절에서도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만물이 없고 주께로 돌아가지 않을 만물이 없습니다.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자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세상 만물 안에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새삼스럽게 하나님에게 바치고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나 안바치나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주셨다가 가져가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있던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런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다시 가져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모든 원인과 결과는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거나 도움이 된 적이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생각이 어떤 것이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도 몰랐던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아무런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할게 있다면 단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과 공의로우심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삶은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유익이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신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에 삶의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머리 숙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은총이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원한적도 없고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만큼 큰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길 되신다면 우리에게서는 그 어떤 행위도 생명의 길에 있어서 보탬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지혜와 믿음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긍휼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