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로마 4,1-8 루카 12,1-7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복음 12장 1절-7절)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하고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인지요.
우리는 매일 나름대로 바둥대며 살 때가 많아요. 해야 하는 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
이것 갚고 저것 쓰려면 빠듯한 예금통장의 잔액, 그리고 해야할 업무들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의미도 없는 일상생활에서 익숙하다 못해 길들여지는 우리의 모습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지하철에 몸담은 승객처럼 ‘어느 역에 내리세요’라는 말에 따라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도착합니다. 아침에는 그 반대이고요.
그런데 다행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선물은 어떤 댓가가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에 사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할 말은 없지요.
우리에게 수십 억 년 그것도 숫자로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그런 세월 속에서 이 땅에 이 시대,
그리고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의 주제는 이 세상에 힘 있는 세력, 그것이 사람이 쥐고 있든,
아니면 돈이 쥐고 있든 그 앞에서 기죽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시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의 위세는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해석할 권한을 잡고 있었지요.
심지어는 사두가이와 합세해서 성전을 배경으로 최고 종교회의 산헤드린(סנהדרין)은
재판기구의 배경은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들의 눈치를 볼 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허리고 굽혀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세력 앞에 맞서신 주님께서 생명이 위협을 받으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복음 12장 5ㄱ절)
그러시면서 이어서 주님께서 오늘의 주제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복음 12장 5ㄴㄷ절)
주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비록 세력이 세상에서 나를 좌지우지하며 생명까지 위협하고 육신을 죽이는 힘이 있어서
두려울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앞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하느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의 세력 앞에 주님처럼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거두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사랑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참새까지도 먹이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아끼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복음 12장 6절-7절)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절대적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로마서 4장 2절-3절)
사도 바오로는 이이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죄 중에 있었다 하더라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용서받고
행복을 누린 사람.’으로 사도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설명했듯이 세상에서 어떤 일의 댓가로 보수를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세상의 인간관계를 넘어서 사랑으로 용서하고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우리는 사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실 아쉬운 것이 없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며 행복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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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바오로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로마 4,1-8 루카 12,1-7
오늘 복음은 몇 가지 단편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이 부분의 본문에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하나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그 사이에 ‘두려워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처음 언급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마지막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한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감정은 대개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를 극진하게 아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며 보살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공포가 아닌 경외심으로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나는 지금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가 공포에만 머문다면,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하느님마저도
공포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히는 공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깨달음이 오늘 은총 안에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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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로마 4,1-8 루카 12,1-7
직원들과 ‘어떤 남편이 더 좋은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를 공주처럼 아껴주는 남편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남편이 해 주기 때문에 아내는 좋지만
남편이 없으면 어린아이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운전도 배우지 않았고, 은행 업무도 해 보지 않았고, 예약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입원하게 되면 아내는 남편이 없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두려움도 커지게 됩니다.
군인처럼 아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엄하게 알려주는 남편이 있습니다.
자동차의 타이어도 교체할 수 있게 해 주고, 웬만한 일은 공구로 고칠 수 있도록 해 주고,
장거리 운전은 교대로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때로 야속하기도 하지만,
돌발 상황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남편이 더 좋은 남편일까요?
궁금하면 구글에 물어보지만, 신앙인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있지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야 일어나셔서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다지 믿음이 약하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걷고 싶다는 베드로에게 그럼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집니다.
베드로가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왜 두려워했느냐?’
5000천명을 배불리 먹이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있는지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강하게 키우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워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는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옷도 많이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때로 박해를 받고, 모욕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치지 못하고, 나약해 질 때면 엄하게 꾸중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못했던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채워야 할 등잔의 기름은 무엇입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채우려 했던 위선, 가식, 교만, 권위는 구원의 등불을
결코 밝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채워야 할 기름은 인내, 온유, 친절, 나눔입니다.
그것들은 구원의 등불이 되어 믿음, 희망, 사랑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