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신께서 뽑아든 칼, 알라의 검이다. 알라께서는 그에게 패배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늘은 동아시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인물을 소개하겠습니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겐 생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인물은 고대 최고의 전략가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희대의 전략가이며 전술 또한 고대 최고를 논하는 알렉산드로스, 칭기즈칸, 수보타이, 티무르 등의 정복자들에게 버금갈 정도로 무적의 명성을 자랑하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이슬람사 1500년, 무슬림 모든 나라를 통틀어 역대 최고의 장군으로 꼽히는 인물. 소개하겠습니다. ^^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 (Khalid ibn al-walid, خالد بن الوليد)
서기 592년, 비잔틴(동로마)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제국의 세계밖에 있던 아라비아 사막의 저편, 메카에서 한 남자가 태어납니다. 쿠라이시 부족의 한 족장 왈리드 이븐 알 무그히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칼리드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됩니다.
칼리드는 젊은시절 이미 또래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용맹함을 드러내었고 지도력 또한 남달라 성년이 되어 부족의 기병대를 이끄는 기병대장이 됩니다. 당시 아라비아는 메디나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끄는 신흥종교 이슬람 세력과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이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칼리드 또한 쿠라이시 부족의 일원으로서 몇 차례 병사를 이끌고 무함마드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칼리드의 용맹함과 뛰어난 전술을 겪은 무함마드는 감탄하여 칼리드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 노력은 결국 결실을 거두어 칼리드는 쿠라이시 부족의 수령인 아부 수피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메디나로 달려갑니다. 이때가 629년, 후에 '알라의 검(Sword of Allah)' , '신이 뽑아든 칼(Sayf Allah al-Maslul: the Drawn Sword of God)' 로 불리게 되는 이슬람 사상 최고의 전략가가 이슬람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칼리드의 결정으로 인해 당시 동유럽의 거대제국 비잔틴과 중앙아시아의 패자 페르시아제국은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2. 아라비아 평정
서기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승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무함마드의 가장 훌륭한 동료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의 위에 올라 아라비아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미 무함마드가 죽기 전 무함마드의 군대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던 칼리드는 아부 바크르 휘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무함마드 사후 분란이 일어난 아라비아를 평정하기 위해 출정을 시작합니다.
632년 9월, 칼리드는 6천의 병력을 이끌고 부자카(Buzakha)로 진격하여 스스로 예언자라 자칭하는 툴라이하의 반란군 1만5천을 격파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해가 가기전 중앙 아라비아를 모두 평정한 칼리드는 곧바로 동쪽으로 진격하여 또다른 자칭 예언자이자 동부 아라비아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무사이리마를 토벌하러 갑니다.
632년 12월, 아크라바(Aqraba) 평원에서 1만5천 병력의 칼리드 군과 무려 3만이 넘는 무사이리마의 군대가 맞닥뜨려 치열한 접전을 벌입니다. 후에 야마마흐(Yamamah) 전투로 명명되는 이 전투에서 칼리드는 희대의 영웅적인 무력을 선보입니다. 첫날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양측 군대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슬슬 물러나던 시점, 칼리드는 돌연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가 1:1 결투를 신청합니다. 양측 모두 병사들을 물리고 있던 시점에서의 이 대담한 결투신청은 양측 병사들이 모두 지켜보던 절묘한 시점이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무사이리마 측에서 칼리드에 맞설 전사를 내보냈지만 몇 합 겨뤄보지도 못하고 패해버렸고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연달아 전사들을 내보내는 족족 칼리드의 검에 목이 달아났습니다.
더 이상 맞서 싸우러 나오는 전사가 없자 칼리드는 무사이리마와의 1:1 담판을 요청합니다. 이미 전장의 분위기는 칼리드 한 사람이 쥐고 있었고 무사이리마는 거부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섭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리드는 무사이리마에게 달려듭니다. 혼비백산한 무사이리마는 말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며 도망쳤고 이 시점에서 전투의 승패는 결정납니다. 자칭 예언자의 굴욕적인 모습을 눈 앞에서 지켜본 무사이리마의 군대는 사기가 땅에 떨어져 이어진 칼리드 군의 총공격에 더 이상 맞설 마음마저 사라져 결국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립니다.
야마마흐 전투를 끝으로 자칭 예언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아라비아는 칼리드의 출정 반년도 되지 않아 다시 평정됩니다.
3. 웅대한 전략! 대제국 페르시아 침공
당시 아라비아는 동북쪽으로 페르시아제국, 서북쪽으로 비잔틴이라 불리는 동로마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두 제국 모두 서로 오랜 전쟁을 겪으며 국력이 전성기에 크게 못 미쳤지만 미개한 아라비아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수치일 정도로 여전히 강대함을 자랑했죠.
아라비아의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담대하게도 동로마와 페르시아를 침략하여 이슬람의 세를 넓히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아라비아는 모든 면에서 이 두 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칼리드의 군사적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칼리드에게 전권을 주어 페르시아 침공을 명합니다.
서기 633년 3월, 아라비아 평정이 끝난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 칼리드는 1만8천의 병력을 이끌고 대제국 페르시아 침공을 결행합니다.
칼리드는 페르시아만에 접해있는 페르시아 제국 서남부의 항구도시 카지만 근처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군대와 조우합니다. 2만 가량의 병력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는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어 무장면에서는 유리했지만 군대의 대다수가 낙타와 말을 탄 기병으로 이루어진 칼리드의 군대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농락당하다 진이 빠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어 버립니다.
동로마를 제외하면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은 갑자기 남쪽에서 나타난 야만인의 침공에 깜짝 놀라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에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상대해도 모자랄 판에 어리석게도 병력을 산발적으로 파견한 것이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이른 칼리드에 맞서 싸우러 나온 군대의 규모는 2만. 칼리드는 이 또한 가볍게 격파하여 버립니다.
수도 크테시폰에 비상이 걸립니다. 칼리드가 이른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 수도 크테시폰과 거리상으로 너무 가까웠고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 황제 아르다시르 3세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군대를 편성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페르시아 제국은 악수를 둡니다. 제국군이 다 집결하기도 전에 먼저 1차 방어군을 내보낸 것이죠.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고는 해도 크테시폰같은 대도시를 2만도 되지 않는 규모의 병력으로 함락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르다시르는 충분히 군대를 총집결시킬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겁을 먹은 아르다시르는 어느정도 병력이 모이는 대로 방어군을 출동시키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1차 방어군의 규모는 대략 3만명 정도로 이미 몇 차례 전투를 거쳐 병력이 1만5천으로 줄어든 칼리드의 군대의 2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서기 633년 5월, 2차 방어군의 총사령관 바흐만의 군대가 합류하기도 전, 안다르자그하르가 이끄는 1차 방어군과 칼리드 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집니다. 칼리드는 5천의 기병대를 셋으로 쪼갭니다. 1천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나머지 4천을 각각 2천씩 두 부대로 나누어 페르시아 진영 뒷편 언덕에 매복시킵니다. 그리고 1만1천의 병력으로 3만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페르시아 군은 중무장 군대답게 처음엔 방어를 굳혀 칼리드 군의 1차 공격을 훌륭히 방어해냅니다. 그리고 칼리드의 군대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일제히 반격을 시작합니다.
칼리드의 군대는 자연스레 뒤로 밀리기 시작했고 특히 중앙은 의도적으로 후퇴속도를 조절한 칼리드의 지휘에 의해 더욱더 밀려나게 됩니다. 자연스레 칼리드의 군대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모양이 되었고 페르시아군에게 중앙이 돌파당하여 진형이 쪼개지면 페르시아 군이 승리할 판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언덕뒤에 매복해 있던 4천의 기병대가 갑자기 전장에 나타나 페르시아 군의 후방으로 일제히 공격해 들어갑니다.
그와 동시에 칼리드는 직접 검을 뽑아들고 밀리고 있던 중앙에 뛰어들어 다시 방어를 굳힙니다.
전후좌우, 사방이 모두 포위되어 버린 페르시아 군은 하나 둘 공포에 질리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지휘체계가 무너졌고 사기 또한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방은 온통 언월도를 치켜든 이슬람의 군대뿐,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하고 페르시아의 1차 방어군 3만은 이곳 왈라자에서 전멸합니다.
왈라자 전투에서의 대승 이후, 아르다시르 황제는 병으로 쓰러져 버렸고 2차 방어군의 지휘관인 바흐만 또한 병력을 이끌고 수도 크테시폰에 틀어박힙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칼리드는 파죽지세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공략하던 중, 처음으로 난관에 부딪힙니다. 수도 크테시폰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지점, 울라이스에서 거센 저항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이 울라이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저항군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치열하게 항전합니다. 칼리드가 이번에도 전장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군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죠. 이 울라이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어지간한 칼리드 또한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무슬림 연대기에는 "만약 끝까지 전장에 남아 싸우는 군대가 있다면 그 군대는 분명 울라이스의 페르시아 군대다" 라는 기록까지 남아있을 정도죠.그러나 결국 칼리드는 울라이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힘겨운 전투를 치른 후 칼리드는 "이런 군대는 처음 보았다." 라는 말을 남기며 울라이스의 페르시아 군대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 울라이스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는 더 이상 칼리드의 군대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아르다시르 황제는 병석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고 크테시폰에 주둔해 있는 페르시아 군 또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히라,안바르, 웃 타므르 등의 여러 거점들이 칼리드의 진격에 파죽지세로 함락되면서 이라크 전 지역이 아라비아의 영토에 편입됩니다.페르시아를 침공한 633년의 해가 가기도 전에 페르시아 지배하의 이라크 전 지역이 무력화 된 것입니다. 칼리드의 군대는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의 국경인 피라즈까지 진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동로마 제국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은 야만인 군대를 일단 눌러놓자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여 오랜 숙적인 페르시아 제국을 도우기로 결심하고 국경지대의 군대를 움직여 페르시아를 원조하기 위해 출동합니다.
무려 4만이 넘는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을 맞이하여 칼리드는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지형을 이용한 유인책을 씁니다. 의도적으로 겁을 먹은 척 퇴각하여 군대를 뒤로 물린 것이죠. 이 모습을 본 동로마-페르시아 연합군은 기세를 타고 칼리드의 군대를 주살하기 위해 일제히 유프라테스 강을 도강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칼리드는 재빨리 별동대를 보내 강둑을 점령하게 하고 둑을 터트립니다. 강둑이 파괴되자 유프라테스 강은 강변에 몰린 연합군을 휩쓸어 버렸고 뒤이은 칼리드의 공격에 전멸해 버립니다.이 피라즈 전투 이후, 후방마저 모두 정리한 칼리드는 페르시아 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크테시폰으로 진격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페르시아 제국을 구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아라비아의 군주 아부 바크르의 전언이었습니다. 크테시폰으로 가는 길목의 가장 중요한 요새인 카디시야(Qadissiyah) 를 공격중이던 칼리드는 "일단 페르시아는 놔두고 시리아로 진격하여 동로마를 쳐라" 라는 아부 바크르의 명령을 받고 군대를 뒤로 돌립니다.이 전언으로 인해 무적의 군대의 칼날의 표적은 페르시아에서 동로마로 겨눠지게 되었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페르시아 제국은 몇 년 남지 않은 생을 연장하게 되었고 대신 동로마제국이 재앙을 받게 됩니다.
5. 비잔틴 제국을 겨누는 알라의 검
칼리드의 연이은 승전소식을 들은 아부 바크르는 큰 자신감을 얻어 휘하의 병력을 모두 출동시켜 동로마제국의 남쪽 국경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로마의 방어체계가 굳건하여 전선이 고착된 상황이었죠. 바로 이 때문에 페르시아를 공격중이던 칼리드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칼리드는 페르시아에서 동로마로 향하는 일반적인 길을 포기하고 사막을 횡단하기로 결심합니다. 페르시아와 동로마를 잇는 간선도로는 당연히 동로마 제국군의 감시하에 있었고 동로마 제국의 방어체계가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칼리드는 사막 곳곳에 분포하는 오아시스의 위치를 먼저 철저히 조사하여 식수문제를 해결하여 병력의 피해없이 사막 횡단에 성공합니다.
이 사막횡단의 전략으로 인해 동로마제국은 완전히 허를 찔립니다. 느닷없이 시리아 본토에 1만에 달하는 군대가 진입한 것입니다. 게다가 위치 또한 절묘하여 시리아 북부와 남부의 통신이 차단되어 동로마제국의 시리아 동부 방어체계가 허무하게 무력화 되어 버립니다.
칼리드의 등장과 동시에 고착되어 있던 동로마-아라비아 전선이 통째로 뒤흔들립니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대제국 비잔틴과 이제 막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신흥세력 아라비아의 거대한 대전쟁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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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으로 나눌 예정이라 여기서 끊겠습니다 ㅎㅎ 고대전쟁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야르무크 전투는 다음편에 올라오겠네요 ㅋㅋ 짧지 않은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첫댓글 저도 전쟁사를 좋아하는지라...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처음 탄생 부분에서 기원전이라 쓰신 것은 오타인 듯 싶네요. 마호메드 사후,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라면 기원 후가 맞을 듯 싶네요.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단위 방어 병력을 운용하지 못한 것은 병참선 문제가 아닐까요? 2만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병참도 무시 못하죠. 단지 축차적인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전략을 보여준 칼리드가 위대하다고 생각이드네요.
읔 오타로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살라딘인줄 알았는데 이런 인물이 있었군요. 잘봤습니다
ㅎㅎㅎㅎ 제가 최고로 좋아하는 이슬람 위인도 살라딘입니다 ^^
저도 살라딘인줄..
감사합니다 몰랐던 인물이였는데 ㅎ
많이 배웁니다 2편 기대가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굿보이님 ^^
아 잘봤습니다. 처음듣는 인물인데, 재밌네요 ㅎㅎ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전쟁사를 보면 시민군과 종교신념에 의한 종교군이 가장 강력했다고 봅니다.. 예외는 몽골군이구요
몽골 ㄷㄷㄷㄷ 역대최고의 포스죠.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추천 날리고 가요~
항상 감사합니다 매직존슨 님 ㅎㅎ ^^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ㅎㅎ 너무 재미있네요
항상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 ^^
와 또 나왔다 봐야지~ 너무 즐겁게 읽고 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마켈렐레 님 ㅎㅎ ^^
이런거 좋아요ㅎ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
돌격갑 곽거병사마도 보고싶네요 ㅋㅋ 보급은 어쩔꺼냐라고 묻는사람하테 "거기서 털면되지" 하고 다들 비웃었는데..... 결과는..... 타르타르소스.... 무제가 "야 넌 병서좀 읽어라" 라고 했을때
곽거병왈"삼촌 병서는 ㅄ 들이나 읽는거임 내가 곧 병서임.... " .............. 곽느님의 위엄...
안 그래도 중국도 한명 생각 중이긴 한데 아쉽게도 그게 곽거병은 아닙니다 ㅜ 그리고 언제 올릴진 모르겠네요. 중국은 전략 전술 기록을 세세하게 남겨놓지를 않으니 쓰기가 워낙에 힘듭니다 ㅜㅜ
곽거병의 진격로... 고대에서 저러면 할말이 없는뎅 ㅋ 쓰신다면 원숭환 쓰시나요??
아뇨 그건 비밀입니다 ㅋㅋㅋㅋㅋ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다음 편 언제 나오나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ㅋㅋㅋㅋ 금방 올릴 겁니다. 내일이나 모래 쯤 올릴 예정입니다. 너무 재밌게 봐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ㅋㅋㅋ ^^
이번엔 이슬람이군요 ㅎㅎ 잘 봤습니다 ㅋ
감사합니다 ㅎㅎ ^^
이젠 제목만 봐도 느껴지네요 ^^ 잘 봤습니다!
ㅋㅋㅋ 감사합니다 ^^
새로운 인물을 알아가네요^^잘 읽고가요~~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
감사합니다. ㅋㅋ 너무재밌내요 항상잘보고있어요 ㅎㅎ
제애미 린님도 항상 댓글 달아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
너무 잘봤습니다~ 2편도 기대할께요~ ^^b
항상 감사합니다 ^^ 2편도 곧 올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전혀 모르던 인물인데 덕분에 잘 배우고 갑니다^^
봐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ㅎㅎ ^^
이힛 ㅋㅋㅋ 잘봤습니다~
풋사과님도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