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대장경의 성립
1세기 중엽 중국으로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서방에서 불교승려가 건너와 경전의 번역사업이 개시 되었다. 먼저 안식의 사람으로 알려진 안세고는 소승불교의 학자로서, 148년경 낙양에 와서 번역과 저술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또 월지국의 지루가참은 환제 말기에 낙양으로 와서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이것이 현존하고 있는 한역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무렵 한인으로서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인 승려에게 협력하여 역경에 종사한 엄불조가 있었으며, 월지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손자로 6개 국어에 능통했던 지겸의 번역사업은 주목할 만하다. 주자행은 한인으로서 출가하여 “반야경”의 연구를 위해 우전국에 갔다가 80세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의 비상한 천재성과 노력에 의하여 세계의 문헌 사상 주목할 만한 한역 경전의 기초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월지국 출신인 축법호는 돈황에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고, 서역에서 공부한 뒤에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 266년 - 308년에 걸쳐 번역및 교화에 힘썼다. 그의 역경은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무량수경” 등 다수의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또 사원을 건립하여 많은 승려를 교화하고 78세에 입적하였다.
불도징(232 - 348)은 콧차 출생으로 어릴 때 출가하여 외국에 유학해서 학덕이 높았는데, 320년 낙양에 와서 불교를 포교하며 불가사의한 술법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후조 석륵을 만나 신통력으로 교화하여 그의 신임을 얻어 왕의 고문이 되었다. 석륵의 후계자인 석호도 불도징을 신임하였다. 30년간 포교에 힘써 9 백 개의 사원을 건설하였으며, 1 만 명의 승려를 제자로 두었다. 그의 제자 중에 특히 중요한 승려로 도안이 있었다.
도안의 제자로 혜원이 있다. 혜원(慧遠, 334 - 416)은 산서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유교와 노장을 배웠는데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감격해서 불문에 귀의하였다. 도안이 장안으로 옮겨갔을 때 혜원은 따로 수 십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강남의 여산에 머물렀다. 관아를 설득하여 협조를 얻어 백련사를 지었다. 백 명의 승려들과 함께 30년간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수행에만 몰두하였다. 혜원은 출가자는 왕자에게 예경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불경왕자론(不敬王者論)을 주장하였다.
전진왕 부견은 도안을 비롯한 승려들을 맞이하여 경전 번역사업을 조성하엿는데, 서역의 콧차에 명성이 높은 불교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장군을 보내서 모셔오도록 하였다. 부견은 불해하게도 사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해되었지만 그가 초청한 불교학자는 장안에 와서 평생 역경에 종사하였다. 그의 이름이 쿠마라지바(구마라즙, 350 - 409) 이다. 쿠마라지바의 아버지는 인도인으로, 쿳차에 와서 국왕의 고문이 되어 왕의 누이와 결혼해서 쿠마라지바를 얻었다. 쿠마라지바는 7세에 출가하여 9세 때 어머니를 따라 인도의 간다라 혹은 캐시미르에 유학하고 돌아와 쿳차에 머물렀다. 장안을 장악한 후진의 요흥(姚興, 文柦帝, 394 - 415)은 쿠마라지바를 401년 장안으로 모시고 와서 409년 입적할 때 까지 35부 300권의 경론을 번역하였다. 수백명의 불교학들이 그의 번역을 도와 협력하였으며, 그의 번역 사업은 세계 번역사상 번역에 대한 일대 신기루를 이룩하였다.
번역한 경론으로는 “반야경” “중론” “백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아미타경” “법화경” “유마경”등이다.
붓다바드라(359 - 429)는 “화엄경‘의 번역으로 유명하다. 그는 북인도에서 태어나 17세에 출가하고, 간다라에 가서 공부하고 붓다세나에게 사사하였다. 같은 스승 밑에 중국에서 유학온 지엄이 있었는데, 지엄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동행하였다. 처음에는 쿠마라지바 밑에서 번역하였으나, 쿠마라지바의 제자들 중에 시기하는 자가 있어 40명의 제자를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혜원의 초청으로 수 년간 여산에 머물며 번역에 종사하였다. 이 때 법현이 인도에서 ”마하승기율“을 가지고 돌아와 함께 번역하기도 하였다. ”화엄경“ 60권의 번역은 418년에서 420년에 이루어졌다.
“열반경”의 번역으로 유명한 다르마쿠세마(담무참, 385 - 433)는 중앙 인도 출신으로 간다라에서 쿳차, 돈황을 거쳐 감숙성의 고장에 도착한 것이 27세 때였다.
진제(眞제, 파라마르타, 499 - 569)는 북인도 웃자니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났다. 무제가 대승의 불교학자들을 널리 구했을 때 추대되어 범본 경전을 많이 가지고 남중국으로 들어 왔다.
546년 중국으로 건너와 548년 건강에 도착하여 무제를 만나지만 그 직후 후경의 모반으로 이듬해 무제가 죽었기 때문에 진제의 방랑생활은 시작되었다. 구 후 한번도 제대로 보호를 받으면서 편하게 번역사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평생을 불운하게 보냈다. 진제의 번역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겨우 30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번역본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신역 “금광경명” “섭대승론” “구사론”등이 있다.
당대에 들어서면 중국은 중국 최고의 번역가 현장(현장, 600 - 664)을 배출하게 된다 현장은 낙양 근처에서 태어나 12세 때 낙양의 정토사에서 출가하였다. 사천성의 성도에서 구족계를 받고(622년) 형주, 상주, 조주, 장안 등지에서 공부하였다. 현장이 주로 깊이 연구한 것은 “구사론”과 “섭대승론”의 유식파의 논서였다. 단신으로 서역으로 구도의 길에 오른 것이 29세 때의 일이며, 4년 뒤 633년에 마가다국에 도착하였다. 현장은 나란다 대학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인도의 여러 지역을 순례하면서 그 당시 인도 불교과 몬화의 상황들을 “대당서역기”에 소개하고 있다. 이 대당서역기는 명대에 이르러 그 유명한 “서유기”를 탄생시키게 된다. 다시 중국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16년 후의 일이였다. 그 후 현장은 19년 동안 경전 번역에 몰두하였는데, “대반야경” 6백권, “유가사지론” 1백권, “대비바사론” 2백권, “구사론”, “성유식론”, “습대승론” 등이다.
보리류지는 713년에 “대보적경”120권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대보적경” 중에는 “무량수경”, “승만경” 등이 포함되어 있다.
측천무후는 화엄경이 코탄에는 완전한 범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붓다바드라가 번역한 60화엄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자를 보내어 범본과 역경자를 보내주었으면 하고 청하였다. 이 때 코탄에서 온 역경자가 실차난타(652 - 710)였다. 실차난타는 코탄 태생의 학승으로 대소승 모두에 능통하였다. 그는 화엄경 범본을 가지고 와서 695년 대변공사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699년 80권의 “화엄경”이 번역되었다. 부다바드라가 번역한 화엄경을 “60화엄”이라 하고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을 “80화엄”이라 한다. 그 외에도 “대승입능가경”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