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살이 /이성환
평소 절간 같은 사무실에 소란스러움이 입주한다. 근무 인원이 줄어든 탓에 생긴 한쪽 공간에 작은 사무실이 하나 더 들어선다. 유휴 공간을 활용하여 전전세를 낸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지출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는 시대다. 어떻게든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황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들도 우리도.
한 지붕 두 가족이다. 두 집 다 자영업자요 같은 세입자 입장이다. 복사기를 비롯한 사무용 기기는 물론 화장실도 같이 이용해야 한다. 나는 터줏대감이라도 되는 양 이것저것 공유할 기기와 비품을 설명하고 농담도 건넨다. 그래도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동거는 어쩔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제집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근에 세입자와 소유자 간 임대차 갈등으로 빚어지는 사건을 많이 본다. 한때는 대출 사기가 횡횡하더니 지금은 전세 사기가 유행이다. 월세와 달리 매달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독특한 주거 문화가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세상이다.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전세 사기로 피눈물 흘리는 수만의 피해자들의 고통과 불면은 현재진행형이다. 사회 초년생으로 옥탑방에서 사글세를 살며 악착같이 저축한 돈이 곧 보증금이 아닌가. 그 종잣돈은 삶의 기반이자 전 재산이다. 피해자들은 자책과 뒤늦은 후회, 계약서를 작성할 때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 내 집 마련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현실 앞에 그저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그들은 알토란 같은 돈을 떼먹어 버린 이 사회를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했을까.
유년 시절, 대여섯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때는 서너 집이 한 지붕 아래 복작이던 때였다. 얇은 벽 사이로 옆방의 기침 소리, 웃음소리까지 스며든 단칸방은 온 식구의 숨결로 가득했다. 학교에 가기 전 재래식 변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다반사. 그럼에도 고생스러운 기억보다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너나없이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가난을 당연시했다. 오히려 그게 내 삶의 동력이 되었지 싶다.
집을 나누어 세를 준 것이 셋방이다. 그 시절의 셋방은 누군가가 내어 준 의자요 평상 같은 존재였다. 당시 집주인은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잠시 숨을 돌리게 하거나 피곤한 몸을 눕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연탄 공장처럼 컴컴한 곳이지만 사방에 벽이 있으니 그래도 의지가 되는 방이었다. 월세 계약서 역시 보증금, 임대료, 날짜 정도만 적힌 단순한 계약서였을 것이다. 월세가 밀려도 주인은 기다려주었고, 세입자는 미안함에 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려는 염치가 있었다. 주인은 세입자를 제 식구처럼 여겼을 것이다. 빠듯한 살림의 집주인과 몸뚱이 하나뿐인 세입자 간의 끈끈한 상생이 아니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임대차계약이 있을까. 가로수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도 임대차계약서를 쓴다. 장기 계약을 하는 나뭇잎도 있지만, 이른 봄에 일 년을 기한으로 나무에 세 들어 산다. 만기가 임박하거나 밀린 월세를 치러야 할 늦가을 무렵이면 이마에 주름이 늘어나고 얼굴색이 변한다. 그러다 찬바람이 불면 바람에 쫓기듯 땅으로 이사를 한다. 사람의 일생도 나뭇잎 신세나 다름없다.
집이 있고 없고를 떠나, 세상에 세입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어릴 때는 부모에게 얹혀살고, 성인이 되면 학업이나 직장 때문에 고시원이나 월세방, 기숙사에 더부살이한다. 잠시 세 들어 살던 자도 어느 순간 소유자로 바뀌고, 얹혀살던 집도 세월이 가면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천문학적인 돈을 가진 부자는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자도 자기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권력을 대신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을 떠받치는 부와 권세는 죄다 남에게서 빌린 돈이요 빌린 권력임에도 마치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은 남에게서 빌리지 않은 것이 없다. 소유자는 재산이라는 사물을 제 것이라며 세입자에게 빌려주지만, 그걸 지녔다고 천년만년 내 것은 아니다. 과거 역사의 찬란했던 문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과 그들의 호화로운 저택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라. 한때 내 것이었지만 다시 떠나가니 진정한 내 것도 아니다. 영원한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누군가가 잠시 맡긴 일시적 소유에 불과한 것을.
사람은 누구나 지구라는 집에 잠시 세 들어 사는 나그네다. 백 년이 길면 길고 짧으면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다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마치 나뭇잎이 뿌리가 있는 흙 속으로 돌아가듯이.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의 몸은 흩어진 별가루가 되어 은하수를 떠돌다 다시 흙으로 내려앉는다. 미세한 티끌이 되어 은한銀漢을 떠돌아다니다 소행성에 불시착하기도 할 것이다. 먼 훗날 나도 지구를 떠나 돌아다닌다면, 어린 왕자가 산다는 B612호 소행성에 한번 들르고 싶다.
매일 비슷한 시각에 전동차라는 큼직한 집에 세 들어 출퇴근한다. 기계음이 들리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공간이지만 눈을 감고 묵언의 시간을 갖는다. 요사이는 ‘유는 무에서 나온다(有生於無)’는 말에 골몰한다. 그릇이나 자전거 바퀴는 각각 구체적인 사물이니 존재이자 유가 되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형상 중에서 빈 공간은 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와 무는 앞뒤나 차등이 없이 공존하는 데 왜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는 것일까. 쉽사리 풀리지 않는 화두에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기울인다.
그러나 생태계의 순환을 떠올리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흙에서 자란 식물의 줄기에서 꽃과 잎이 피고 지고, 다시 낙엽이 되어 흙으로 되돌아가면서 나무의 뿌리를 살린다. 삶 또한 무에서 유로, 유에서 다시 무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집주인이 가진 것도 어쩌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세입자의 빈손에서 나온 게 아닐까. 마치 생태계가 생물과 무생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듯, 홀로 생기거나 만들어지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새로 이사 온 변호사가 다가와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한다. 나는 얼씨구나 하며 늘 먹는 밥보다 저녁에 술 한 잔이 어떠냐며 답한다. 그도 역시 바라던 바라며 기꺼워하는 표정이다. 그의 얼굴에서 왠지 동병상련의 동지애를 느낀다. 세입자들 간에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인정이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므로.
첫댓글 셋방을 빌미로 밥 대신 술 한잔을
4개월 치 약봉지는 우쩨 댔능교
그라몬 우리도 날 한 번 잡읍시더
반갑습니다. 선생님. 문학기행 갈 때 한 잔 하입시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