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박미산
누군가 내 눈을 통째로 옮겼다
푸른 눈과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름 호수
시간에 자주 충돌하는 헤픈 문장들 때문에
밑바닥부터 마르기 시작했다
바닥을 드러낸
묽고 붉은 무늬는 머리 위로 쏟아지고
빨간 꽃무릇이 여름과 가을 사이
비늘줄기를 흔들며 지천으로 깔렸다
조금만 펄렁대도 호흡이 무너지고
거리의 내력이 흔들렸다
이것이 신호인 줄 몰랐다
어느 순간 눈의 힘이 풀려 훔쳐보기 시작했다
황혼의 행간에서
잃어버린 단어를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말라 떨어지는 꽃덮이들이
온통 눈동자를 뒤덮었다
물 없는 호수에 피어있는 꽃
꽃들의 발소리
아타카마 사막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었다
몇 천 년 만에 폭우가 내렸다
내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넘실대는 활자를 품고
달의 계곡을 걷기 시작했다
모래 바람이 부풀고 있다
싹트던 문장들이 낙타 등에서 곤두박질쳤다
발길에 채이고 짓밟히며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졌다
찢어지고 젖어 알 수 없는 문자들
이름 한 번 얻지 못한 사막 깊은 곳에서
뜨겁게 달궈진 시가 훗날 발굴될 수 있을까
빗방울을 발목에 걸고
내일 또 내일을 걸어야겠다
흔적 없이 또 사라질지라도,
산문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나는 눈에서 실핏줄이 자주 터졌다.
핏빛 실핏줄은 마치 불갑사에 지천으로 핀 꽃무릇처럼 흰자위에 활짝 피어나곤 했다.
꽃무릇이 피어나면 일주일은 파충류처럼 빨갛게 지낸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책도 읽지 말아야 하는데
당장 내일 발표할 과제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 일쑤였다.
눈에 안약을 넣어도 건조함은 그대로이고
여름 호수 같은 촉촉한 눈동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래바람이 불고 눈은 더욱 건조해졌다.
활자들은 제멋대로 곤두박질치고 난 그 활자들을 찾으러 나섰다.
겨우 찾아낸 문자를 배열하여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었다.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단어를 찾아 길을 떠나곤 했다.
황혼의 행간에서 잃어버린 단어를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말라 떨어지는 꽃덮이들이 온통 눈동자를 뒤덮었다.
꽃무릇 피는 것은 노안의 시작이었다.
꽃무릇이 찾아올 적엔 바쁜 생활과 잠시 교전을 멈추고 침잠한다.
그때는 왜 그리 시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번뜩이는지.
시의 계곡으로 들어가 찢어지고 젖어 알 수 없는 문자들을
깁고 말려 골짜기에 널곤 하였다.
지금도 가끔 붉은 꽃이 나의 물 없는 호수에 지천으로 깔린다.
시가 찾아오는 순간이다.
비록 이름 한 번 얻지 못한 문장들이
흔적 없이 또 사라질지라도 나는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