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이문(安城李門) 운정(芸亭) 이숙번(李叔蕃) 이숙번(李叔蕃.1373.공민왕 22~1440.세종 22) 조선 정종(定宗) 때 문신. 본관은 안성(安城). 이경(李坰)의 아들.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 충청도관찰사로서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고, 태종으로부터 정사공신(定社功臣)의 호를 받고 승선(承宣)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안성군(安城君)에 피봉 되었으나, 공을 믿고 교만과 사치를 일삼던 끝에 햠양에 장류(杖流)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백응(伯應), 호는 운정(芸亭), 본관은 안성(安城). 문하시중 이경(李坰)의 아들이며 중추원판부사 이중번(李仲蕃)의 형.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춘장시 병과에 7등으로 급제하여 26세에 지안 산군사로 있으면서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세자 방석(芳碩)을 비롯하여 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ㆍ심효생(沈孝生)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 功臣) 2등에 책록 된 뒤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방원의 최 측근이 되어 정종이 제2대 왕위에 오르자 방원에게 "공(公)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27세가 되던 해(1399)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초에 박포(朴苞)가 방원과 반목중이 던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 제거하여 곧 좌군총제(佐軍摠制) 되었고, 28세 때(1400)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이 되었다. 30세 때(1402) 새로 설치한 내갑사(內甲士)의 좌번(佐番) 책임자가 되었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 이 해 말 안변 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도진무로서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하여 진압하였다. 이어 지의정부사ㆍ참찬의정부사를 거쳐 33세에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었고, 34세에 겸중군총제ㆍ겸판의용순금사사를 역임했다. 35세 때인 태종 7년(1407)에 겸충좌시위사상호군 등을 지내고, 이듬해 십사상호군(十司上 護軍)이 폐지되자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에 제수되었고, 37세에 동북면절제사를 역임했다. 그 뒤 참찬의정부사ㆍ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역임하고, 40세에 종1품 승정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병조판서, 42세에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고, 이어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를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해(1414)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이듬해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평소 태종의 처남이었던 민무구 형제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윤저 등과 함께 파당을 지어 비방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결국 관작을 삭탈당하여, 45세에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 세종조에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 도승지 김돈(金墩)이 선왕 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천거해 서울에 불려와 편찬을 도 왔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숙번 묘】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묘는 물왕 저수지 인근에 있는데 묘 앞에는 문인석상 4기, 장명등 1기 등 석물이 있다. 시흥시에서 유일한 사각형 형태의 무덤으로 1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각형 형태의 무덤은 고려 말의 형식과 유사한 것으로 조선 토기 묘제 연구의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후에 후손들이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원형을 잃었으나 2006년에 다시 정밀한 발굴 조사에 따라 원형을 회복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후대에 세운 묘비의 비문은 강희맹(姜希孟)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출처] 안성이문(安城李門) 운정(芸亭) 이숙번(李叔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