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맑은 가난’의 삶을 살아갑시다” /법정스님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불황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경제적인 불황이죠.
그래서 IMF 때보다도 더 하느니 덜 하느니
이런 말까지 나오는 시점입니다. 그
불황의 주요 원인이 소비 위축현상에 있다고 합니다.
소비가 활성화된다면 우리경제가 다시 안정을 이룰 것인가.
내수가 살아나서 소비가 활성화되고
고도성장이 다시 지속된다면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참 시절이 좋을 때는 흥청망청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얼마 만큼이면 만족할 수 있을까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고도성장이 지속된다면
그 결과는 생태적 파국을 앞당기게 됩니다.
우리는 한정된 지구 자원에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우리들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그동안 너무 착취를 당해왔기 때문에
크게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입니다.
날로 심각해가는 지구 온난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지구는 단순한 무기물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커다란 생명체입니다.
지구온난화는 지구가 중병이 들어서
신음하면서 앓고 있는 현상입니다.
과도한 석유를 소비하고 그 찌꺼기가 배출가스로
지구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고도성장을 향한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즉
이러한 미국식 생활행태가 지구 온난화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안 좋은 원인이 소비부진에 있다면
경기활성화를 위한 더 많은 소비는 결과적으로
더욱 심각한 지구의 파멸을 불러일으킵니다.
세계의 저명한 기상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금세기(21세기) 중에 지구 기온이 지금보다도
5도 내지 8도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재앙이 닥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갠지즈 강과 메콩 강, 양자강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강을 흐르게 하는
히말라야의 빙하들이 앞으로 40년 안에
모두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파리 길상사 창건 10주년 기념행사에
가느라 10년 만에 스위스의 융프라우에 올라가봤습니다.
그런데 산기슭의 빙하가 앙상한 바위로 변하고 있더군요.
지구 온난화 현상을 실감했습니다.
갠지스 강과 양자 강 등이 말라버리면 인류의 1/3이 의존하고 있는
쌀농사는 모두 망치게 됩니다.
그 결과 세계는 큰 기아상태에 직면하게 될 거라는 예상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예상 때문에 우리가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연속입니다.
미래는 딴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의 연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미래는 더욱 좋아질 수도 있고 더욱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들 각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윤리가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어머니인 대지의 건강을 위해서
자식 된 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윤리는 말보다 실천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순간순간의 사소한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재산이나 물건은
우리보다 앞서 이 땅에서 살다간 조상들이 남겨준 유산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음세대, 어쩌면 우리들 내생이 됩니다.
이 다음 세대의 일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지구로부터 얻은 물자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은
곧 우리들 삶의 터전인 지구환경을 돌보는 길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가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맑은 가난이란 마음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가난은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거나
시새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무엇을 갖고자 할 때도 먼저 갖지 못한 사람의 처지를 생각합니다.
이 순간도 날마다 세계 도처에서
3만5000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전역에서 여섯 사람 가운데
한사람인 10억명 정도가 하루 1달러
우리나라 돈 1100원으로써 목숨을 이어갑니다.
이런 현실인데 세계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가장 많이 버리는 나라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랍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더 많이 차지할수록 행복할까요.
20~30년 전 우리가 어려웠던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진 것은 지금에 비해서 훨씬 적고 빈약했지만
지금처럼 삭막하거나 살벌하지 않았습니다.
행복으로 따진다면 그때 시절이 더 행복했어요.
연탄 몇 장, 쌀 몇 바가지를 들여놓고도 다들 행복을 누렸습니다.
지금은 그 무엇을 가지고서도 만족할 줄 몰라요.
고마워할 줄 몰라요.
지나친 것은 모자란 만 못하다는 교훈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그 하나만을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원래 갖고자 했던 그 하나마저 잃게 됩니다.
사람이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불행해져요.
돈이나 재물이 인간의 할 일을 대신하게 되면 그곳에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통해서 귀하고 고마운 줄 압니다.
오늘과 같은 경제적인 불황 앞에서 우리 스님들이
남긴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그런 덕을 익혀야 됩니다.
함께 잘 나누어 갖지 않고서는
이 생태적인 파국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미국이 도전을 받고 있는 것도
이웃의 어려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함을 나누어 갖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미국만이 아닙니다.
지난 인류의 자취를 보면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남을 돕고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혼자 독차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이란 크게 보면 내 분신이며 또 다른 내 자신입니다.
나눔을 통해서 객체가 전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남을 도울 수 없다면
그에게 해(害)를 끼치지 말라는 겁니다.
옛말에 동냥은 못줄망정 바가지는 깨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요즘은 그런 현상이 없습니다만
우리 어린시절만 해도 흉년이 들면 멀쩡한 이웃들이
바가지를 들고 끼니때마다 구걸하러 다녔습니다.
이게 먼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식들 굶길 수가 없어서 바가지를 들고
이웃으로 구걸을 하러 다닌 것이지요.
그래서 이웃들이 먹던 밥도 떠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남을 도우면 도움을 준 쪽이나 받는 쪽이 다같이 충만해집니다.
받는 쪽보다는 주는 쪽이 더욱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나눔의 비밀입니다.
이 절(길상사)이 처음 문을 열 때
바로 제가 이 자리에서 가난한 절이 되기를
내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념이 이 도량에서 얼마만큼 실현되고 있는지
우리 함께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절에 드나드는 불자들도 각자 가정에서
맑은 가난을 어떻게 실천하고 계시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됩니다.
삶의 질은 결코 물질적인 부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건 속에도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있다면
삶의 질은 얼마든지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제대로 살 줄을 알아야 됩니다.
<서울 길상사 창건 7주년 기념법회에서 법정스님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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