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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 천도교, 보성사에서 《조선독립신문》 발간해 42호까지 발행
⊙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3월 6일 돼서야 3·1운동을 ‘각지 소요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시작
⊙ 2009년 진관사 칠성각 수리 중 《자유신종》 《조선독립신문》 《독립신문》 《신대한》 등 발견
鄭晉錫
1939년 출생. 중앙대 영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 정경대학(LSE) 언론학 박사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委 위원, 방송委 위원, LG상남언론재단 이사,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同 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역임 / 저서 《남궁억》 《항일민족언론인 양기탁》 《언론인 춘원 이광수》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6·25전쟁 납북》 《언론조선총독부》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등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3・1운동은 지하신문을 발행하면서 횃불을 올렸고, 유인물(油印物) 형태의 소식지를 전파하면서 확산되었다. 민족진영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키면서 신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정상적인 신문은 발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항일(抗日) 독립사상을 고취할 수 있는 전파 수단은 일제(日帝)의 눈을 피하면서 발행하는 지하신문이었다. 지하신문은 언론사(史)와 독립운동사(史)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강제 합방 후 총독부는 한국인 발행 일간지를 모두 폐간시켰기 때문에 1910년대 무단(武斷)정치 기간에 한국인들은 단 하나의 신문도 발행할 수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이 발표된 다음 날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이름을 바꾸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황성신문》과 《대한민보》도 잠시 《한양신문》과 《민보》로 이름을 바꾸어 명맥을 잇는 듯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은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을 통해 전국 각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서울과 각 지방을 비롯하여 해외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유인물이 나타났다. 상하이(上海)에서는 8월 21일에 이광수(李光洙)가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국내로 비밀리에 유입한 사실이 일본경찰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신채호(申采浩)가 주필이던 《신대한》(10월 28일 창간)도 상하이에서 발행되었다.
총독부는 국내의 지하신문과 상하이 발행 《독립신문》의 배포를 엄격히 탄압하였으나 마침내 우리말 신문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1920년 초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을 허가하고, 1924년에는 《개벽》 《신생활》 등 몇 개 잡지를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하는 언론환경 조성을 지하신문이 선도하였다.
3·1운동 당시 지하신문은 실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비밀리에 발행하고 일본경찰에 발각되지 않도록 몰래 배포한 신문이므로 보관된 지면이 드물었다.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에 넘치고 해외에서 울려퍼진 상황을 담은 실물은 볼 수 없었다. 일제가 남긴 기록을 보고 간접적으로 짐작하는 방법 말고는 실증적인 연구가 어려웠다. 이 시기 지하신문의 연구는 윤병석(尹炳奭·인하대 명예교수)의 연구가 처음이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당시 발행된 지하신문 일부를 소장하고 있었기에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하신문은 《조선독립신문》 외에 《진민보(震民報)》 《국민신보》 《자유민보》 등이 이승만 소장 유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밖에 일본경찰 정보에 나타나는 지하신문도 여러 종류였다.
천도교, 《조선독립신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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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일에 나온 《조선독립신문》은 천도교가 발행하고 《뎨국신문》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
천도교(天道敎) 운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하여 3월 1일 전격적으로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崔南善)이 집필하여 자신과 형 최창선이 경영하는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조판하여 보성사로 넘겨서 2만1000매를 인쇄하여 3월 1일 독립선언 당일에 배포하고 전국 각지에 보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 3·1운동 재판 기록).
독립만세운동의 중요한 방편으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은,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월보과장 이종일(李鍾一)의 지시로 편집원 이종린(李鍾麟)과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주도해서 사장 윤익선으로 창간되었다.
이종일은 1898년 8월 10일 《뎨국신문(제국신문)》을 창간하여 1907년 9월까지 10년 가까이 신문을 이끌어간 언론인으로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보성사 사장은 박인호(朴寅浩·천도교 대도주)였는데,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는 월보과장 이종일이었다. 윤익선이 《조선독립신문》 사장으로 기재된 것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보성사 사장 박인호가 전면에 나서면 신문의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인쇄 실무는 보성사 공장 감독 김홍규가 맡아 약 5000부를 인쇄하였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약 4000부를 배포했다. 발행부수는 1만 부를 인쇄했다는 증언도 있다. 윤익선은 경찰 신문(訊問)에서 “보성사에서 하루에 1만 매를 인쇄하여 즉시 발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기록에 따라 발행부수가 다르게 나오는 것은 신문을 받는 각자가 기억하는 입장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창간호는 손병희(孫秉熙)·김병조 외 31인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에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조선독립신문》은 정상적인 신문 체제를 갖추지 못한 전단 또는 호외(號外) 형태의 단면 인쇄였지만, 일제 강점 이후에 발행된 민족 언론의 효시라 할 수 있다.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공중에게 배포하고, 학생들이 각 가정에도 전달하였다. 3월 3일에 발행된 제2호도 서울 송현동·간동·안국동·인사동 등 시내 여러 곳의 민가와 통행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독립신문》은 “민족대표들은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니 이천만 민족은 최후의 한 사람이 남더라도 결코 난폭한 파괴적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보도했다. 평화적 3·1 독립운동 정신을 반영한 기사였다. 민족대표들은 연행되었지만 독립운동은 전 국민이 호응하리라 예측했다.
첫 호 발간 후 이종일과 사장 윤익선이 체포되자, 이종린과 장종건(張倧健)이 제2호부터 4호까지 등사판으로 발행하다 체포되었다. 이어 여러 사람의 다른 후계자들이 비밀리에 발행을 계속하여 이해 6월 22일까지 제36호가 나왔다. 마지막 확인된 호수는 제42호이며, 그 후로도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호’가 발행되었다.
상하이에서 나온 《독립신문》 국내 반입
《조선독립신문》 이후에도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이 국내 각지에서 발행되었으나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당시 보도한 기사 중에 지하신문이 여럿 발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1919년 10월 12일에는 동대문 밖 숭인동 거주 제철공 김상옥(金相玉)의 집을 수색하여 대한국민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후원회 취지서 등을 발견하였다. 이는 김상옥이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여러 차례 배포한 것이다. 같은 때 서울 종로경찰서는 인쇄된 지하신문과 등사판 신문을 압수하고 관계자를 체포하였다.
지하신문 《대동신보(大同新報)》가 대량으로 비밀리에 배포되자, 일본경찰은 이의 색출에 고심하다가 1919년 11월 관계자 정필성(鄭必成)과 인쇄직공 5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일반 주택에 영동활판소(永洞活版所)라는 인쇄소 간판을 걸고 7월 초순부터 《대동신보》 제1호 1만 장을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계속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인쇄공 한 사람이 경찰에 체포되어 비밀 인쇄소가 발각되었다.
《혁신공보(革新公報)》와 《자유신종(自由晨鐘)》이라는 등사판 신문도 있었는데, 수하동 보통학교 직원실 천장에 감추어 둔 등사기를 압수당했다.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과 《신한청년》이 국내에 들어와서 압수당하거나 소지자가 체포되는 경우도 많았다.
3・1운동 후에 발간된 지하신문은 이 밖에도 전국 각지와 해외에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부분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제호로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국내에 29종, 서북간도 등 만주에 13종, 러시아 연해주에 5종,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에 7종, 미국과 프랑스 파리에 5종 등이다.
지하신문은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였다.
《매일신보》, ‘소요사건’으로 폄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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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3·1운동을 ‘소요사건’으로 규정하는 하세가와 총독의 유고를 크게 실었다. |
반면 당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 민중의 전국에 걸친 독립운동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다가 3월6일자 1면에 ‘민족자결주의의 오해’라는 사설로 이른바 “각지(各地)의 소요사건”이라 비난했다.
이튿날(7일) 1면에는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며 만세운동에 가담한 학생과 일반인을 엄중처벌 할 것”이라는 내용의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유고’(諭告・나라에서 시행할 어떤 일을 백성에게 공포함)를 실었다. 본문보다 한 호 더 큰 활자로 편집한 유고는 각지의 독립운동을 ‘소요사태’로 규정하고 ‘불령도배(不逞徒輩)’의 선동이라고 규정했다. ‘불령’은 총독부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불평분자로 격하한 용어였다. 하세가와는 “조선 독립은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서 여러 나라가 승인하였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선동”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매일신보》는 3면 전체에 ‘각지소요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서울과 지방 각지의 독립운동 상황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지하신문을 통해서 서울과 전국 각지의 독립만세운동이 알려지고 확산되는 일주일 동안,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처음으로 3・1운동을 알리는 기사를 실으면서 ‘소요사건’으로 폄하했다. 3월 8일에는 ‘소위 독립운동’이라는 사설로 민족적인 독립운동을 비웃고 민족진영의 주장을 왜곡하여 비난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이런 편집 태도는 민간지 창간 후 민간지 논조와는 더욱 대조적으로 부각되었다.
구한말 《뎨국신문》 관계자들이 만든 《조선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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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에 나온 지하신문 《진민보》와 《자유신종보》. |
《조선독립신문》 발행에 연루되어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73명에 달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징역 3년
이종린(李鍾麟・36) 《천도교회월보》 편집원. 천도교도
장종건(張悰鍵・25) 경성서적조합 서기. 무종교
징역 2년
최치환(崔致煥・23) 경성전수학교 1년생. 무종교
임승옥(林承玉・26) 경성전수학교 2년생. 무종교
징역 1년6개월
윤익선(尹益善・48) 천도교도. 사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장
징역 1년
김영조(金榮洮・21) 경성전수학교 2년생. 무종교
징역 8개월
임준식(林準植・22) 천도교인
징역 6개월(3년 집행유예)
유병륜(劉秉倫・25) 무직. 무종교
1920년 2월 27일 이종린·윤익선·장종건 등 64명은 상소를 포기하였다. 4월 8일 경성복심법원(覆審法院)이 지방법원의 형을 확정하였다. 이들 피고는 미결 구류일수 120일을 본형(本刑)에 산입(算入)하였다.
징역 3년형이었던 장종건은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던 중에 감형되어 1921년 5월 27일에 출옥하여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 윤익선은 1년6개월 뒤인 1922년 9월 2일에 출옥하였다. 독립선언문과 《독립신문》을 인쇄한 보성사의 총무 장효근도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장효근은 1898년 이종일이 《뎨국신문》을 창간할 때 창간 동인으로 참여해서 1905년 5월까지 근무했다. 이해 경무관(警務官)에 임명되어 언론계를 떠났다가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사장 吳世昌)가 창간되면서 언론계로 복귀하여 동지(同紙) 편집 겸 발행인을 역임했다. 《독립자유민보(獨立自由民報)》를 발간한 유연화(柳然化)·최석인(崔碩寅)·백광필(白光弼)은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21년 2월 28일에 석방되었다.
독립선언서를 공포한 3월 1일 배포된 《조선독립신문》 이후에 독립사상을 고취・선전하는 다양한 유인물이 비밀리에 간행・배포된 사실은, 3·1운동에 연루된 독립운동 인물에 대한 일제의 재판 기록에도 적시되어 있다. 판결문에는 “지하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위세를 올리려고 하는 자가 빈번히 나타났으며, 지하신문이 ‘조선 독립에 관하여 황당무계한 사실을 날조하며, 또는 전선(全鮮)에 걸쳐 봉기한 독립운동의 소문을 과장하는 등 불온문구’로 정치 변혁의 범행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일제의 시각이었고,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스로 쟁취하는 민족 언론의 재생운동이라는 의미였다.
3월 1일 이후의 지하신문은 서울의 《조선독립신문》 외에 《진민보》 《국민신보》 《자유민보》는 다행히 이승만 소장 문서 속에 실물이 남아 있었다. 실물은 없지만 경찰이 압수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문은 《국민회보》를 비롯하여 만주 지역에서 발행된 《자유종》 《태극기》(〈소요사건에 관한 민정휘보〉, 제6보, 4.22, 제7보) 등도 있었다.
《독립신문》, 사실보도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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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발행자들을 체포했다는 일본경찰의 보고서. |
이러한 상황에서 상하이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어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국내 각지와 해외에서 여러 종류의 소식지가 발행되는 동안, 인쇄시설을 갖추어 본격적인 신문을 제일 먼저 발행한 쪽은 오히려 친일지(親日紙)였다. 1919년 7월 21일 선우일(鮮于日)이 만주 봉천(奉天)에서 창간한 《만주일보(滿洲日報)》가 그것이다. 이 신문은 일본 당국의 지원을 받아 발행되었는데, 3·1운동 후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첫 일간신문이며, 서울에 지사까지 두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8월 21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언론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흔히 이 신문은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알려져 있지만, 경영상으로는 독립된 신문이었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이고, 주요한(朱耀翰)이 출판부장이었다. 창간 당시의 제호는 《독립》이었는데, 제1차 정간을 당한 후인 10월 25일 제22호부터 《독립신문》으로 바꾸었다. 발행 장소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늑로 동익리(勒路同益里) 5호, 격일간으로 매주 화·목·토요일 3회 발행이었다.
이광수가 쓴 창간사는 이 신문의 사명을 다섯 가지로 천명했다. ▲첫째, 독립사상 고취와 민심통일 ▲둘째, 독립사업과 사상을 전파하고 ▲셋째, 유력한 여론을 환기하고 정부를 독려하여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넷째, 문명 국민에게 불가결한 신(新)학술과 신사상을 소개하며 ▲다섯째, 국사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개조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서 신국민을 이끄는 데 노력한다고 밝혔다.
1919년 11월 1일(24호) ‘본보의 주의’라는 글에 의하면, 《독립신문》이 너무 개방적이고 사실보도 위주라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방적인 사실보도로 인해 적에게 비밀이 누설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말했다.
“그러나 적의 눈을 가리우기 위하야 동포의 눈을 가리우는 어리석음을 배우지[學] 아니하리라. 또 동포를 격려할 필요를 아노라. 그러나 사실을 과장하거나 한갓 허장성세의 논(論)으로 동포를 속이는[欺罔]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본보는 어디까지든지 참되리라 온건하리라. 허위나 과장이나 논(論)을 위한 논, 문(文)을 위한 문은 아등(我等)의 결코 취하지 아니할 바라.”
진실을 말하는 언론, 공정하면서 공론(空論)을 배격하겠다는 편집 방침이었다.
이승만 공격에 앞장선 신채호의 《신대한》
1919년 10월 28일 《독립신문》 23호를 발행했을 때, 신채호는 주 2회 발행 《신대한》을 창간했다. 신채호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평정관에 이어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으나,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최고지도자 이승만 추대에 반대했다. 이유는 이승만이 국제연맹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추대되고 《독립신문》이 이승만을 지지하자, 신채호는 《신대한》을 창간하여 이승만을 공격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임시정부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신대한》 창간 전에 이광수가 신채호를 《독립신문》 주필로 초빙하려 하였으나, 신채호는 거절하였다. 《신대한》의 주필은 신채호, 편집장은 김두봉(金枓奉)이었다.
1920년에 총독부가 한국인 발행 신문 3종을 허가한 배경은,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발행된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과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의 국내 유입 등이 크게 작용해 언론정책을 바꿔야 했다. 총독부는 조선 통치의 방침을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가하게 되었다. 지하신문 발행으로 투옥을 감수하는 투쟁의 결실이었다.
90년간 숨어 있던 신문과 태극기
9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경우도 있었다. 서울 은평구 소재 진관사에서 발견된 3・1운동 신문 자료와 태극기였다. 진관사는 2009년 5월에 칠성각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숨겨 있던 지하 독립신문류 9점, 상하이에서 이광수가 발행한 《독립신문》 2점, 신채호의 《신대한》 3점, 그리고 태극기 유물을 발견했다. 9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독립정신의 표상이 햇빛을 보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유물은 다음과 같다.
•《자유신종》 3호(제4호, 제7호, 제12호)와 호외 1종
•《조선독립신문》 4호(제32호, 제40호, 제41호, 제42호)와 호외 1종
•《독립신문》 2호(제30호, 제32호) 상하이, 사장 이광수, 출판부장 주요한
•《신대한》 3호(제1호, 제2호, 제3호) 상하이, 주필 신채호, 편집장 김두봉
•3·1운동 당시에 제작된 태극기
이때 발견된 유물은 2010년 2월 25일 등록문화재 458호로 지정되었다.
총독부는 무단정치 기간에 한국인들에게는 일절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3·1운동 후에는 통치의 방침을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총독부의 정책 변화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지만, 국내에서 발행된 지하신문과 상하이 《독립신문》 《신대한》이 해외에 배포되고, 국내에 비밀리에 유입된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과장된 부분과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도 다뤘지만, 독립운동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본 측의 대응을 더욱 심층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