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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종윤, 선조가 서쪽으로 갔으니 이조선이 대륙에 있었다고?
대륙을 이조선이 지배하고 왕조가 거기서 나고 망했다고 하는 대륙이조선론의 원조, 김종윤은 임진왜란이 대륙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선조가 왜구에게 쫓겨 도망하는 데 서쪽으로 갔다는 표현 때문이라고 한다. 기타 서쪽과 관련된 기록과 대륙을 암시하는 이순신의 발언기록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반도 상황이라면 현재 서울 한양에서 평양 등을 보면 서쪽이 아니라 북쪽임으로 북쪽으로 갔어야 마땅하다고 한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대륙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글1 '김종윤/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책이있는마을/2001/224쪽)'
글2-위책 225쪽
글3-위책226쪽
글4- 위책227쪽
2. 위 기록들이 과연 대륙을 묘사하는 것인가,
김종윤은 위글 1,4 등에서 西幸, 西上, 西遷 등의 용어를 근거로 임진왜란이 대륙에 일어났으니 대륙을 이조선이 지배했다고 한다. 서행의 幸은 임금이 어디로 간다는 당시 임금행차 용어로 '거둥'을 뜻하는 것으로 이조실록과 문집에 흔히 쓰고 있다. 그리고 이 '西幸'용어는 이조선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일상적으로 쓰는 방위관념으로 나온다. 또한 고려조에서도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대체적으로 서쪽으로 갔다고 했을 때 '서행'이라고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의 경우 임진왜란시 반도의 한양에서 서북쪽인 평양으로 도주 했을때 서행이라고 쓰고 있다.
반면에 고려조에서는 개성에서 왕이 강화도로 갔을 때도 '서행'했다고 한다. 개성에서 봤을 때 강화도는 거의 남쪽에 있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서쪽 방향이라고 보고 서행이라고 쓴 것이다(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이조선은 지나족 이른바 중화를 사모하고 사대하는 통치지배이념으로 기틀을 잡은 정권이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이 중화사상에 맞추어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중화의 성현이나 지명을 빗대어 말하고 싯구를 하나 짓더라도 중화성현이 쓴 것을 인용하고 노래하였다. 또한 지명도 중화의 것을 갖다가 빗대어 썻다. 피지배세력들도 이러한 이조선 정권하에서 살아 남을려면 거기에 맞춰야 했고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요순이요, 황제헌원 등이다.
방위도 우리를 동국, 해동이라고 하였다. 중화의 중국에서 볼 때 동쪽의 나라, 그 바다의 동쪽이라고 스스로 변방으로 낮추어 불렀다. 따라서 자기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할 때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가면 이를 서쪽으로 갔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현재 서울 한양에서 평양으로 도주 할 때나 의주로 갈 때 모두 서쪽방향으로 갔다는 뜻으로 '서행'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좋은 대표적인 예가 구한말 을미의병을 일으킨 의암 유인석의 의암집에 적나라하게 나온다. 당시 유인석은 충북 단양에서 전투를 벌이다 왜군에게 밀리자 황해도 지역으로 가서 의병을 더 모집하여 왜군과 싸우고자 한다. 또한 만주 회인지역으로 옮기기도 하는데 이 때도 모두 서행이라고 즉 서쪽으로 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유인석은 이미 한반도의 이조선 땅에서 의병활동했음을 증명한 바 있다. 다음은 유인석의 의암집에 나오는 서행과련 기사다.
-1896년 병신4월13일 "단양읍에 이르자...서쪽지방 을 향하여 출발하여 강용한 인물을 모집하여 다시 떨칠 계획을 세웠다. 마땅히 서쪽지역(황해, 평안)으로 향해서 굳세고 용감한 사람을 모집하여 다시 위력을 떨쳐야 합니다(의암집 권56 년보)."
-동년7월20일 "선생은 이미 서쪽지방에서 일을 못하자 다시 떨쳐서 압록강을 건너려 했다. 또 말하기를 해서(황해도)의 여러군은 모두 날뛰어 분발하여 병력이 이르면 크게 떨칠 것입니다. 부득이 하다면 청국으로 들어가 원조를 요구함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위 의암집756쪽)."
-7월 20일 이범직이 앞서 인도하여 서쪽으로 가다가 적당에게 잡혀 전사하다. 패하여 서행을 하게 되자 군인수백명을 인솔하고 먼저 요동에 도착했다가 청나라 사람에게 병기를 뺏겼다. 그 후 회인현에서 심양 그리고 다시 통화로 갔다(위 의암집 766족~767쪽)
-우리 華西이항로 선생의 문하생 가운데 직책을 이룬 제자들 가운데 그 중에 한분이 단서 태천의 박운암 선생이다(위 의암집 461쪽).
위 기사에서는 화서이항로 선생이 나오는데 호가 화서다. 즉 서쪽의 중화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의암 유인석의 직계 선생이다. 중화사상을 이 사람으로 부터 내려받았다. 얼마나 중화를 사모하여 사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김종윤은 '관서, 관동' 지역이라는 이름은 대륙에서나 통하지 한반도에서는 통하지 않는 다고 하며, 그러니 대륙 조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구한말 한반도 이조선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암 유인석의 문집 의암집에서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적병이 사방으로 막아서 위험했다. 이에 앞서 사람을 '關西'에 보내어 불러 모으게 하였는데(위 의암집756쪽)...'關東'지역의 상소를 낸 우두머리 홍재학이 양이와 화해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였다하여(위 의암집470쪽)..
또한 김종윤은 위글3 에서 보는 바와 같이'西鄙'라는 표현이 나오니까, 대륙이조선을 말한다고 한다. 즉 반도 한양에서 보면 북쪽이니 '北鄙' 라고 해야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의암집에는 '서도(평양)' 라고 하여 평양을 서도 즉 서쪽의 서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위 '西鄙'와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공은 西都(평양)에서 태어났다.평양은 옛적 기자가 세운 수도다. 기자는 홍범구주, 팔조금법을 가르침으로써 이 땅에 '소중화'를 열었으니 문명된 세계의 통치가 중국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천여년 동안의 아득한 세월속에서 도풍이 멀어지자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의암집/권지49행장,486쪽).
위 지도에서 김종윤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낙양이 이조선의 서울일 경우 선조가 평양 즉 장안으로 왜군에 쫓겨 도주했다면 서행이라고 쓰면 안된다. 남쪽으로 갔다고 해야 맞다. 정확히 서쪽이 아니다. 따라서 위 지도상의 한반도를 볼 때 반도 서울 한양에서 평양을 보면 거의 서쪽방향으로 보인다. 충분히 서행했다고 써도 무방한 것이다. 또한 왜군이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西上이라는 표현도 그리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도를 정방향으로 세워놓고 보느냐, 주변 나라와 상황을 고려해서 전체를 놓고 보느냐에 따라 방향은 상당히 달라진다. 이럴 경우 대륙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조정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서행은 정확히 반도이조선에서 선조가 평양으로 도주 또는 의주로 도주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즉 임진왜란은 한반도 이조선땅에서 일어났다.
김종윤은 위 글1에서 '島夷' 라는 것은 현재 일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대륙 복건성의 왜, 일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김종윤 위 책225쪽). 그러나 역시 의암집의 '격고팔도열읍'에서 '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http://cafe.daum.net/mookto/GbHv/22787), 현재 열도의 일본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유인석은 이미 증명되었듯이 반도의 이조선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김종윤은 위글2에서 ' 洛中胡差入城, 來在義州越邊九連城' 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 낙양에는 호인들이 한거번에 들어왔다, 왜인들이 구련성을 넘어 의주로 들이 닥쳤다." 라고 한다.
위 글은 李忠武公全書卷之一/襍著/上某叔書에 나오는 문구다. 그 문구 포함 원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위 구절 부분은 아래 파랑색 줄친 부분이다.
頃聞氣候違和。仰慮罔已。今則已見勿藥之喜耶。姪伏荷下賜。無事供劇。母親所患。或作或撤。久不得見差。伏悶伏悶。前稟藥材。隨所有下惠伏望。洛中。胡差入城。胡將能巨里。領一萬兵。以田獵事號稱。來在義州越邊九連城。賊謀難測極可慮也。適聞有便。憑候起居。
위 원문 파랑색 해당부분을 제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낙중에 오랑캐(누르하치)의 차사 즉 사신이 도성에 들어왔다(洛中胡差入城). 오랑캐 장수 능거리가 1만병사를 거느리고(胡將能巨里 領一萬兵) 전렵사로 호칭하며(以田獵事號稱) 의주 건너 변경 구련성에 와 있다(來在義州越邊九連城). 이렇게 뒤 부분까지 해석해야 본래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 이충무공전서 부분은 이순신이 그의 숙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서울에 오랑캐의 사신이 들어와 있고 의주 건너 구련성에는 오랑캐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걱정하는 편지다.
여기서 오랑캐는 당시 만주에서 일어나고 있던 누르하치의 여진족을 말한다. 호차는 오랑캐의 사신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낙중 즉 서울은 명나라의 서울도 될 수 있고 반도 한양 서울도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 누르하치는 왜군이 반도이조선을 침략한 것에 대하여 명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이 기병2만 보병2만을 보내서 도와 주겠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 명나라 서울에 간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명조정과 이조선 정권이 상의를 하였고 결국 이조선 정권은 거절하는 쪽으로 몰아 간다(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 9월 17일 갑술 4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5일 임오 6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누루하치는 파병허락이 떨어지는 즉시 반도이조선 평안북도 의주 건너편 구련성에 대기중이던 병력1만을 우선 선발대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김종윤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거기에 따라서 궤변을 들어 놓는다. 즉 "낙양에는 호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왜인들이 구련성을 넘어 의주로 들이 닥쳤다." 라고 한다. 이래 놓고 그러니 임진왜란은 대륙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위 원문에는 분명이 '왜인들' 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런데도 김종윤은 없는 원문까지 창작하며 대륙이조선 궤변을 늘어 놓는다.
<!--[if !supportEmptyParas]--><!--[endif]-->또한 김종윤은 위 글3에서 "瘴霧蠻煙 多疾疫死亡之患 을 "저 남쪽은 장무의 병이 많은 곳이서 그로인해 죽은 사람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해석해 놓고 있다. 위 내용은 李忠武公全書卷首/敎諭/遣兵曹佐郞勞軍犒饋敎書에 나오는 말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원문 전체 내용은 선조가1596. 兵曹佐郞 崔東立을 보내어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위로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이순신에게 자신이 도와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려운 환경속에서 왜구와 잘 싸우는데 고생이 많다는 등의 위로의 글이다. 그러는 와중에 저런 표현을 쓴것이다. 선조는 더운날씨에 싸우는 병사들이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장무만연'이라는 송나라 구양수가 표현한 기사를 빌어다 쓴 것이다.
즉 瘴霧蠻煙->宋·歐陽修《再和公儀贈白鷴》:“蠻煙瘴霧雖生處,何必區區憶陋邦"
解釋:指南方的煙雨瘴氣。借指荒涼地區
(http://www.chinesewords.org/idiom/show-1851.html)
이다. 위에서 선조가 의도한 표현은 왜구가 들 끓고 무더운 날씨가 횡행하는 전장, 황량한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질역에 죽어나가는 우환을 말한다. 김종윤이 말하는 것 처럼 대륙 남쪽지방에서 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병사들이 결코 아니다. 설사 김종윤의 말대로 위 장무질병이 대륙의 호남 광동 절강지방에서 만연하는 것(김종윤 위책 226쪽)이라고 해도, 광동과 절강은 김종윤의 말에 따르면 왜구의 본거지다. 따라서 여기서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호남은 지리적으로 볼 때 당시 왜군이 휩쓸고 다니는 곳과 멀다고 본다. 김종윤의 대륙 임진왜란설에 따르면 이미 왜군은 섬서성, 산서성 등 서북 쪽으로 대거 이동해서 전쟁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 위 김종윤의 다른 대륙이조선 근거는 그 자체만 가지고도 대륙이 아닌 반도이조선 근거로도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하고, 위 반박제시 근거보다 더 주관적이서 여기서는 반박을 생략한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반도서울 한양에 입성하는데 걸린 기간이 대체적으로 18~20일로 나온다. 김종윤은 부산이 대륙의 항주만 옆 항주라고 한다. 그리고 한양은 장안(서안) 또는 낙양이라고 한다. 자, 거리를 도상으로 단순 계산해 보자, 길게 잡아 20일 이라고 해도 대륙 항주에서 낙양까지 혼자서 맨몸으로 달려도 20일은 훨씬 더 걸릴 것이다. 반면에 이 시일을 반도 이조선에 갖다 대면 거의 들어 맞는다. 결국 임진왜란은 대륙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한반도 이조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종윤의 대륙이조선론은 자신의 아전인수격 문헌해석에서 비롯된 근거없는 주장이다. 객관적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이 위의 대륙이조선일 뿐이다.
@波奈留之國 혼자 무슨 말 하는지 이해 못하겠네요. 논리가 그리 없으신지?
분명히 말했습니다. 명나라로 가는데 굳이 한반도를 거쳐야 하는 가에 대해 당연히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항해술의 한계, 명과 일본 사이의 거리, 보급의 문제를 말했습니다. 어디에 잘못된 논리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순신의 역할을 말하면서 굳이 일본이 전라도 해안가를 차지하려고 한 이유는 그 당시 항해술로 한양과 평양과 같은 곳을 가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해안선을 따라 가야하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그만은 해군으로 전라도 지역을 공격한 것 이라구요.
이것이 곧 그 당시 항해술의 한계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죠? ㅋ
@波奈留之國 제주도도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제주도가 전진기지가 됩니까? 제주도에사 자체적으로 보급이 되나요? 결국 제주도는 중간 경유지로 일본에서 보급 물자와 병사를 가져오면 잠깐 있다가 다시 명나라로 가는 것 밖에 안됩니다. 한반도는 다르죠. 차지하게 될 경우 식량 보급과 병사를 거기서 바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정화가 아프리카로 간 방식이나 백제가 항해한 방식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굳이 전라도 해안가를 차지하혀고 한 이유와 같습니다.
모두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하늘미르님말처럼 연안 항해였죠.
@波奈留之國 서양을 거론해서 말하는 건데 그 당시 배와 항해술은 서양이 더 발달했습니다. 또한 그들도 상인의 입장에서 세계을 누빌 때 항상 배 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한 것이구요. 실제로 많이 침몰하고 지금도 보물선이라며 그 흔적이 남아있죠.
또한 그들도 위험을 알기에 대규모로 일본이 조선을 치듯이 대규모 병력을 가지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줄 아시는지? 그거야 말로 자살행위인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내가 무덤을 파는지 모르겠으며
하늘미르님이 내 말에 덧붙여 황해의 해류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그거는 쫄아서 왜 자기한테 그러냐고 하고
욕을 안하니 좋다? 누가 보면 내가 언제 욕한 줄 알겠습니다
@손님입니다 헐.....항해술? 연안으로 기어갈정도 항해술로 반도까지는 어찌왔을까요? 반도까지 항해할정도면 먼바다해봐야 수심이 깊은것도 아니고.. 조금만돌아가면 한양이고 평양인데.. 이정화는 조선태종떄의 인물임에도 서양까지 항해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백년후에 항해능력이 떨어졌다?..이해가 되시나요?
@손님입니다 유구로 해서 대만을 거쳐가면 되는 것을 굳이 제주도 까지...쯧쯧..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