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명(詞命 : 임금의 말 또는 명령)을 짓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 태조 때 태봉의 제도를 따라 원봉성(元鳳省)을 두었다가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꾸었으며, 현종 때 한림원으로 되었다. 문종 때 관원을 정해 판원사(判院事 : 宰臣 겸임)와 학사승지(學士承旨, 정3품) 1명, 학사(學士, 정4품) 2명, 시독학사(侍讀學士)·시강학사(侍講學士) 각 1명, 직원(直院) 4명(단, 2명은 權務官), 의관(醫官) 2명을 두었다.
1116년(예종 11) 글을 좋아한 예종은 한림원 관원의 품계를 올려 학사는 정3품으로 학사승지와 같게 하고 시독·시강학사는 모두 정4품으로 했으며, 또한 이들을 모두 본품(本品)의 행두(行頭)로 삼았다. 즉, 한림원의 관원은 같은 품계의 직위 중 가장 격이 높았던 것이다.
1275년(충렬왕 1) 문한서(文翰署)로, 1298년 사림원(詞林院)으로, 그리고 다시 문한서로 개칭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년) 사관(史館)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 되고, 1325년(충숙왕 12) 예문관으로 독립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한림원으로 개칭되어 학사승지·대제(待制, 정5품)와 공봉(供奉, 정7품) 1명, 검열(檢閱, 정8품) 1명, 직원(정9품) 2명을 두었고, 1360년 대학사(大學士) 2명을 늘렸다.
1312년 다시 예문관으로 개칭되어 대학사를 대제학이라고 고치는 등 개편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에 다시 병합해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이속(吏屬)은 문종 때 제정된 것으로 녹사(錄事)·승사랑(承事郎)·대조(待詔) 각 2명과 기관(記官)·서수(書手) 각 1명을 두었다.
한림원의 직능은 우선 사명을 제찬하는 일이며, 그 밖에 과거의 고시관, 즉 지공거(知貢擧)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우수한 유신(儒臣)들이 모인 곳이었으므로 왕에게 시강(侍講)하는 서연관(書筵官)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아울러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왕의 행차에 호종했으며, 서적 편찬 사업 등을 담당하였다. 한편, 지극히 높고 귀한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교섭이 긴밀했으므로 옥당(玉堂)·신선지직(神仙之職)·선국(仙局)·청절지사(淸切之司) 등으로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