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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이 아직 멀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다. 친일 소설가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해마다 수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순수문학을 기린다는 취지로 1956년부터 해마다 10월경에 시상돼온 이 상은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
1900년 10월 2일 출생한 김동인은 순수문학인으로도 보기 힘든 인물이다. 1925년에 발표한 <감자> 등은 순수문학으로 평가받지만, 1930년대 작품들은 그렇게 평가하기가 힘들다. 1930년대부터는 세상 조류에 휩쓸려 친일적인 정치 색채를 노출했기 때문이다.
김동인이 왕성하게 활동한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인상적인 정치 현상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향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을 침략하거나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이 이 시대의 가장 정치적인 현상이었다.
그런 현상이 심화되던 1930년대에 김동인은 그 흐름에 직접 뛰어들었다. 일본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문학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그가 남긴 친일 소설이나 산문으로 <일장기 물결 –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 <문화인의 총궐기>, <결전 신년의 교훈>, <남경조약>, <아부용>, <제재문제>, <고구마> 등을 예시한다. <감자>를 쓸 당시에는 순수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고구마> 등을 쓸 때는 제국주의에 편향된 정치적 작가였던 것이다.
문학인을 넘어 일제 선전·선동가로
그가 얼마나 과감하게 일제를 찬양했는지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들에서도 드러난다. 이 신문의 1942년 1월 6일 자 기사 ‘태평양송(頌)’에서 그는 영국과 미국도 태평양을 자기 바다라고 말하지 못했다면서 “인류에게 향하여 큰 소리로 능히 이렇게 부르짖고 이 권리를 주장할 지위와 실력을 가진 자는 오직 우리 일본 밖에는 없다”고 단언했다. 일본은 태평양을 일본해로 부를 자격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인물이다.
또 1월 23일 자 기사 ‘감격과 긴장’에서는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인제는 내선일체도 문젯거리가 안 됐다”라며 “지금은 다만 일본 시민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뛰어넘어, ‘내’와 ‘선’을 가릴 것도 없는 ‘한 백성’이 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위로 학병·징병 선전·선동, 대동아공영권·내선일체·황민화 선전·선동, 문학계 문필보국운동 주도 등을 열거했다. 문학인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일제 선전·선동가의 족적을 남겼던 것이다.
김동인의 친일 수준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 시상을 통해 김동인을 한국 문학의 사표로 형상화시키고 있지만, 김동인은 문학의 내용뿐 아니라 행동 처신에서도 세상의 사표가 되기에 부족했다.
<친일파 99인> 제3권에 수록된 문학평론가 임규찬의 기고문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 문학가로의 전락’이 <매일신보>를 근거로 소개한 1938년 일화가 있다. 김동인이 중병 때문에 매일 누워 신문만 읽고 바깥 활동을 못해 애태우던 시절의 에피소드다.
병석에 누운 김동인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친일파들이 분주히 활동하는 모습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건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보면서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탄해 마지 않았다”고 <매일신보>에 회고했다.
그해 11월 중순이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그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게 됐을 때였다. 이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즉시 택시로 총독부로 달려갔다. 학무국의 문을 두드렸다”라고 김동인은 썼다. 택시를 타고 총독부에 달려간 것은 자신을 해외에 파견할 황군 위문단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퇴짜였다. 지원자가 많아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친일파 99인>은 “다시 한번 김동인은 최재서 등과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를 찾아가 위문을 허락받는다”라고 설명한다.
김동인의 친일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 2시간 전인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에 총독부의 아베 다쓰이치 정보과장을 만나 사업 제안을 한 일이다.
김동인의 글인 <망국인기>를 근거로 <친일파 99인>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김동인이 아베 과장을 찾아간 것은 ‘문인들이 사업을 해주면 최고 5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동인 자신의 사업 구상을 설명하기 위해 8·15 당일에 총독부를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 과장과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아베 과장이 오전 10시 정각에 전화를 받더니 “은행에구 우편에구 간에 예금이 있거든 홀랑 찾게”라며 장시간 통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그냥 나오고 말았다고 김동인은 <망국인기>에 썼다. 재산을 정리해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는 총독부 관료 앞에서 친일 사업 구상을 밝히려다가 할 말을 못 하고 나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