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코재는 생각보다 얼른 나타나지 않는다.
율어의 금천 선암 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 임도 가까이 내려가도 코재가 아니다.
다시 오르막을 낑낑대며 오르니 철쭉봉이 나타나고 조금 더 가자 쾅대코재다.
고개가 아니고 작은 봉우리다. 조망이 좋지 않아 앞쪽의 작은 봉우리까지 지친 몸을
끌어본다.
광대코봉을 지나 조망이 열린 곳에 배낭을 던지고 의자에 앉아 소주를 꺼낸다.
잡목이 앞을 가리지만 남쪽의 봉두산과 예당 벌판과 그 너머의 득량만을 보며
술을 아껴 홀짝인다. 두방산 줄기의 병풍산과 비조암도 가깝다.
11시 5분을 지났으니 2시간 반 가량을 걸은 셈이다.
날이 더워 지친다.
다시 길을 나서 거의 평평한 능선을 걷는다.
고흥기맥으로 갈라지는 작은 봉우리를 지나 천치재의 생태다리를 건넌다.
언젠가 선암리의 느재마을을 지나 지나가 본 길이다.
어디선가 나무를 베어내는 전기톱 소리가 들린다.
덩치 큰 존재산이 버티고 서 있다.
소주를 마시어 조금 힘이 나는 듯하지만 키를 덮는 철쭉이 길을 막는다.
급한 경사에 철쭉에 할키며 숨을 헐떡이며 힘을 낸다. 12시가 지났다.
농업시대 출생인 나는 제때 밥을 먹지 못하면 어김없이 배고픈 신호가 온다
배가 고프고 힘이 떨어져 걸음은 갈수록 무거운데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지뢰제거 작업을 했지만 위험하다는 안내판을 몇 개 보며 철조망을 넘는다.
조망이 열리지만 자릴 잡고 앉기에 어중간하다.
철조망 사이에 난 작은 구멍을 끼어 둥글게 감으며 깔린 철조망 사이를 긁히며 지난다.
부드러운 능선을 걷는데 아랫쪽에 군인들이점심을 먹고 있다.
모후산 무등산의 조망이 열린다.
대서중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 자격으로 와 이곳에서 만나 편지를 주고받은
박기수 상병님은 지금 어디서 살고 계실까?
고대 공대를 다니신다며 빤듯한 글씨로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주시던 그 분은
제대와 함께 연락을 끊으셨다. 당시 진로가 막막하던 난 그 분과의 편지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커다란 포탄 세개를 보고 철망의 정문을 지나 찻길을 내려간다.
길은 지그재그로 이어지며 지루하다. KT 통신사의 구조물을 지나 구비를 돌아도 산길을 만나지 못한다.
더 지친다. 벌교 추동쪽 저수지 위로 올라오는 포장도로가 멀다.
어느 사이 왼쪽에 여러개의 산리본이 보이더니 산길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흔적이 완연하다. 누군가 나무 윗쪽에 노란 리본을 매달아
길을 짐작하며 소나무와 이파리없는 나무를 헤친다.
존제산 오르는 철쭉군락도 힘들었지만 내리막인데도 영 고약하다.
소위 호남정맥구간이라는데 관리가 너무 안되어 있다.
1시 50분이 다 되어 주릿재에 닿는다.
조정래태백산맥문학비를 게으르게 보고 회고정에 앉아 바람을 피해 앉는다.
바보가 챙겨 준 점심 도시락을 꺼내고 맥주를 마신다.
피로가 조금 풀리는 듯하다. 밥은 들어가지 않는다. 율어 벌판을 내려다보며 쉰다.
김시습의 시집을 볼까 하다가 그냥 봄바람을 맞으며 쉰다.
다시 챙겨 일어나 외서면소재지의 이정표를 보고 산을 오르니 2시 20분이 넘는다.
동소산 갈림길이 나오고 난 오른쪽으로 완만한 등로를 걷는다.
문병란 선생의 동소산머슴새를 다 읽지 못하고 있다.
기회되면 문덕면을 걸어야겠다.
길은 평탄하지만 몸은 힘이 떨어졌다.
나무를 벤 경사지를 지나고 목장 위를 지나기도 한다. 모두 입산금지 임산물채취금지 안내판이 자주 보인다.
4시 15분이 지나 석거리재주유소에 닿는다.
식당을 겸한 가게엔 두 아주머니가 티브이를 보고 있다.
캔맥주 두 개를 4천원에 산다. 길가에 앉아 마시며 벌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까
아니면 가보고 싶은 백이산을 오를까 고민한다.
몸은 지쳐 버스를 기다리고 싶지만 기약이 없다.
힘을 내 백이산 3.5km를 보고 오르기 시작하다가 묘지가 나타나 배낭을 벗고 맥주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