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이주언
나의 첫 구두는 빨강
원피스 입고 빙글빙글 춤추면
첨탑 주위를 끝없이 돌고 있는 동화 속 지붕처럼
내 구두가 그려낸 둥근 세상이 보였다
한 계절 두 계절 지날 때마다
모서리가 늘어나던 나의 세계는 큐빅으로 빛나기도 했지만
뒷굽이 허리를 세우고 콧대를 세우고 미운 세계를 찍는 무기가 되기도 했던
길을 다 지나온 듯
굽이 조금씩 낮아질 때마다 세상은 한 겹씩 내려앉는다
구두가 사라지고 있다 신장의 가지런한 신발들 사이
신지 않는 뾰족구두 한 켤레
이제, 내다 버릴 때가 왔나 보다
서랍이 달린 여자
여자의 몸에 달린 서랍들. 가시로 손톱 밑 찔러대는 기억들. 찌르면서 부드럽게, 피 흘리며 고귀해지는 것들. 하나의 몸에 달린 치명적 기분들!
아랫배 서랍 열린다. 젖을 빨며 요람에 눕고 싶은 것들. 혈액으로 쏟아지기 이제는 지겨운, 가득한 하품과 지루의 표상으로 남은 것들. 캄캄한 궁에 들면 편안히 눈감는 것들이 붉은 눈동자로 흘겨본다. 쾅 닫아버려야지, 저것들! 그러나
해안 가득한 요람. 그 속에서 바둥거리며 뭇 생명이라 불리는 것들. 아직 이름 얻지 못한 것들이 운다. 입을 연다. 하나의 요람에는 하나의 발성법. 너희는 아직 하나의 서랍뿐이구나! 운다. 마법에 걸려든 태아가 운다. 끝없는 분열의 근원, 저 신생의 불안들에게
젖을 물린다. 뻥 뚫린 가슴으론 도대체 젖을 먹일 수 없다구! 가슴 서랍을 잃은 여자가 추억을 붕대로 친친 감고 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사라진 가슴 주워 모으고 있다. 꺼이꺼이 웃고 있다. 그녀를 향하던 경멸의 눈빛들이 바닥을 긴다.
이마에 달린 손잡이 잡아당긴다. 작다. 이 작은 서랍이 나를 지탱해주기를. 흙탕물 가득하다. 흙탕물의 역동 다 지났다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물결진다. 운다. 작게 운다. 너는 언제나 작게 울어야 한다고 주문을 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서랍이 쾅 닫힌다. 이마를 싸매는 비루한 자존심의
서랍들,
열렸다 닫혔다 열렸다……
갈등의 무한 반복이 전 생애라는 듯
누적
가끔 시골의 빈집을 이리저리 살펴볼 기회가 있다. 부엌의 수납공간에 남아 있는 그릇들과 마당에 뒹구는 세간살이는 사라진 사람의 일상을 품고 있어 식구들이 활기차게 살던 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집을 떠날 때 그들은 되돌아올 거라는 마음이었을까. 세간살이를 통해 보이는 그들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처럼 느껴진다. 설사 집주인의 삶이 끝났다 하더라도 그 삶의 마무리가 오래 지연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흔적들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생의 흔적들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누적 속으로 스며들지 않을까 싶다. 시골집은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누적 때문에 어떤 이는 기를 느끼고 조상신, 풍수, 운명 같은 것들이 있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 차이를 지닌 개별적 생들의 반복이 한없이 누적되는 공간으로 삶의 흔적들은 스며드는 것 같다.
배를 탈 때면 그 뱃길 위를 무수히 지나다녔을 사람들과 물건들이 생각난다. 대부분 무사히 건넜겠지만 때로는 물길 아래 수장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과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누적되어 온 것들이 물속에 스며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존재의 순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있다. 도로에 있는 스키드마크나 짐승의 핏자국이다. 숱한 생명이 도로를 지나다니지만 그처럼 삶의 흔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은 누군가의 특별하고도 짧은 경험 때문이다. 이런 치명적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존재를 기억케 하는 나름의 흔적들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도 많은 생명체들이 살다간 공간일 것이며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런 흔적들이 희미해지면서 아주 서서히 누적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한 개체가 소멸되는 양상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 동그란 볼륨을 갖고 있다가 서서히 내려앉는 산속 무덤은 점점 주변의 땅과 수평을 이루게 된다. 삶의 흔적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그 땅속에서도 작용과 변화가 일어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적되는 것 같다. 그가 한때 살았던 흔적은 무덤뿐만 아니라 마당에도 논밭에도 지나다닌 길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흙, 물, 공기로 스며든 삶의 누적들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